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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Jun 09. 2020

웹소설.피투성이 소나타

14화

일요일 오전 열 두시. 시현은 버스를 탄 채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먼 거리까지 외출하는 일이 드문 시현의 일상. 버스에서 내린 곳은 대한민국에 땅값이 제일 높은 곳에 속하는 도시였다. 가로수가 내뿜는 산소로는 차가운 문명의 기척을 지울 수 없었다. 여러 유명 메이커 카페와 레스토랑을 지나 도착한 곳은 일층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대형 제과점과 같은 주인이 운영하는 카페였다. 어지간한 중소기업 수준의 재산. 본점인 이곳 말고도 네 군데 정도 체인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제과점으로 들어간 시현은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하루 종일 있을 수 있을 법한 여러 빵과 과자를 둘러 보았다. 화려함과 소박함의 공존. 다양한 종류와 깊은 맛. 흡사 제품들이 말을 거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생기가 넘친다. 제품마다 특유의 색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같이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겉 표면, 클래식하면서도 신선한 형태엔 이야기가 머물러 있는 듯 했다. 기본에 충실한 기술과 범상치 않은 감수성. 꾸준한 연구가 아니면 이 정도의 빵과 과자는 탄생할 수 없었다. 찾아오는 손님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시식용 빵은 내놓기가 무섭게 없어진다. 질과 양. 모든 면에 있어 손님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존재하는 제과점이었다.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이 가게의 이름은 정모란 제과점. 시현이 태어나 처음 빵을 마주한 아이처럼 경탄이 섞인 눈으로 매대 앞에 서 있을 때, 육십대 나이에도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는 정모란 여사가 먼저 다가왔다. 다소 여윈 체격에 날카로운 눈이 객관적으로 보면 무서운 인상이었지만 항시 잔잔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어 마주 보기 나쁘지 않았다. 시현의 뛰어난 감각을 생각하면 약간 늦게 스승의 등장을 알아챈 편. 시현은 예의를 혹독하게 훈련받은 일본 무도가처럼 반듯한 자세로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스승님."

"어서 와라. 바쁠텐데 와 줘서 고맙다. 식사는..했겠구나."

"저는 에스프레소 한잔이면 됩니다."

스승 정모란. 그녀는 은아와는 반대로 시현의 어린 시절은 몰랐지만 성인이 된 이후의 시현에 대해선 거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는 카페 한 쪽에 앉았다. 곧 커피가 나오고, 시현은 품위있는 동작으로 잔을 들어 올렸다. 꽃과 같은 향과 초콜렛의 쌉쌀함. 부드러운 뒷맛의 오리지널 블랜드 커피. 싱글 오리진 커피를 주로 마시는 시현이었지만, 뭐라 반박할 수 없는 정밀한 계산의 블랜드 커피는 기쁨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시현의 예민한 미각은 전율로 떨리고, 소년 같은 미소가 얼굴에 번진다. 단숨에 잔을 비운 시현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 맛있습니다."

"최고의 칭찬이구나. 고맙다."

모란 여사는 싱긋 웃었다. 고된 세월이었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 하는 일에 종사한 탓일까. 얼굴에 자리잡은 주름마저 아름답게 보였다. 시현은 천천히 자신의 근황에 대해 말했다. 주변 사람들의 살아가는 이야기. 그 사이 자신이 개입한 여러 사연들을. 모란 여사는 주의깊게 들어 주었다. 옳다 그르다 판단없이 조용히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시현의 감정적 피곤함을 달래준다. 그리고 오늘 시현을 불러들인 가장 큰 이유였던, 시현이 만들고 모든 각도를 찍은 웨딩 케이크를 확대 출력한 사진을 꺼낸다.

"이 패턴과 가운데 꽃 모양 데코는.."

식빵 전문점을 운영하니 직업적으로는 케잌 데코레이션을 할 일이 없는 시현이었다. 과거 모란 여사 밑에서 이 제과점에서 일할 땐 놀라운 역량으로 케잌을 만들기도 했지만. 모란 여사는 사진 곳곳을 손으로 짚어가며 미흡한 점과 개선 사항을 지적했다. 지나치게 엄격한 분위기가 아닐까 싶지만 이런 자리를 마련한 것 자체가 최고의 칭찬임을 시현은 알고 있었다. 과연 모란 여사는 단순히 잘못을 들추는 게 아니었다. 시현의 버릇과 습관. 지향하는 미적 감각을 파악해 더 나은 결과물을 창조하도록 이끄는 것. '빛나는 나무'에서 토요일마다 케익을 열개 씩 주문 제작하기로 결정한 시현을 돕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거의 한 시간 동안 지식을 전수한 모란 여사는 시현의 손을 잡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너의 스승이라는 점이 자랑스럽다. 부디 정진해 다오. 시현아."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감사의 마음과 제자로서 존경심이 깃든 정중한 태도로. 바로 몸을 돌려 스승을 뒤로 하는 시현을 보며 모란 여사는 가슴에 차오르는 긍지를 느꼈다.

버스를 타고 집을 돌아오는 중이었다. 한 할아버지 한분이 탓는데, 카드를 찍자 잔액이 부족하다는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뒤에 타려는 사람들이 있어선지 바로 내리지 못하고 일단 안으로 들어선다. 자리에 앉아 지갑을 뒤적거리는 모습에 버스 기사는 운전을 계속했다. 할아버지는 등에 지고 있던 가방을 앞으로 꺼내 주머니를 뒤지고, 바짓 주머니도 쑤석거리더니 안절부절하는 모습이었다. 다음 정거장에 갈 때까지 돈을 내지 않자 운전사가 "요금 주세요."퉁명스럽게 말했다. 할아버지는 어렵게 말을 끄집어내 미안하다는 듯 늘어놓았다.

"기사 양반..내가 지금 급해서 그런데, 한번만 그냥 갑시다."

"할아버지 사정만 봐드릴 수 없습니다. 내리세요."

"허, 그것 참.."

버스는 정류장에 서 있던 참이었다. 타려는 사람들이 올라온 후에도 할아버지가 내리지 않자 승객들 사이로 싫은 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바로 앞자리에 타고 있던 시현은 현금을 꺼내"제가 대신 내겠습니다."요금함에 넣었다. 

"아이고. 고마워요. 젊은이."

할아버지는 주름 가득한 얼굴에 웃음을 드리우며 시현에게 인사했다. 시현은 살짝 고개 숙여 화답한 뒤 다시 창가에 시선을 두었다. 사람들 사이로 두런두런하는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참 착한 사람이네."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았기에 시현은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크림 패턴에 대해 생각했다. 한 할머니가 옆까지 다가오자 시선만 살짝 옮기는 시현이었다. 할머니는 가타부타 말 없이 바나나 두개를 건냈다. 생각을 방해받는 게 싫었지만 나쁜 의도가 아니라는걸 알기에, 시현은 조용히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기특해서 주는 거야. 받아. 얼른"

할머니는 억지로 시현의 무릎 위에 바나나를 올려두고 얼른 버스에서 내렸다. 시현의 몸놀림이라면 다시 바나나를 집어 할머니가 메고 있던 장바구니에 넣을 수 있었다. 얼굴만 봐도 고집불통인 할머니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걸 느껴 그냥 있었던 것일 뿐. 스승의 가게에서 사온 빵이 들어있는 가방에 바나나를 집어 놓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시현은 얼마 안있어 버스에서 내렸다.

이곳 상점가에 자리 잡은 것도 적지 않은 시간이 흘렀구나. 시현의 능력을 알아본 몇몇 제과장들이 좋은 조건의 호텔 주방이나 파격적인 보수를 제안하며 스카웃 제의를 넣는 건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최근에 만든 웨딩케이크의 사진을 제과제빵 정보 교류 카페에 올린 후 상담 문의 메일이 열 건 넘게 들어왔다. 스승님조차 그 카페에서 사진을 확인하고 먼저 시현에게 연락한 것이었고.

'살아가는데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아.'

시현은 하늘을 올려다 보며 가벼이 숨을 내쉬었다. 서른 세살 나이가 되도록 술과 담배를 접하지 않았고 여자를 품어본 경험도 없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죽음과 마주하는 듯한 보스 시절과 성실히 기술을 익혀 온 이십대 시절. 단조롭지만 충실한 인생이었고 무엇에도 미련 따윈 느끼지 않았다. 무의미한 담배 연기와는 다른 감정이 묻어난 한숨을 뒤로 하며 시현은 가게로 향하는 걸음을 계속했다.

"참외 얼마에 해요?"

"두개 천원입니다."

과일상 앞에서 젊은 새댁이 가격을 묻는 것을 보았다. 참외가 샛노랗고 아주 실한 것이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배일 정도였다. 새댁의 손엔 콩나물과 두부 한모가 담긴 장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시현은 몇번 '빛나는 나무'로 찾아와 창가에 비치는 빵들을 바라보기만 하다 발길을 돌리는 일이 잦았던 새댁이란 걸 알아 보았다. 남편이 건설업에서 비정규 노동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임신 6개월 쯤 되어 배가 많이 부른 새댁은 참외가 정말 먹고 싶었는지 쉽게 걸음을 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시현의 지갑엔 천원짜리 세장이 들어 있었다. 다른 손님에게 과일 값을 계산해주는 사장님에게 말을 거는 시현. 

"안녕하세요."

"오, 식빵 사장님. 어서 와."

"참외 삼천원 어치만 주세요."

과일상 사장님은 알이 굵은 참외로 골라 비닐에 담아 주었다. 시현은 아무렇지 않게 과일을 사는 것에 대한 부러움과 궁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자존심이 묘하게 얽혀 있는 새댁의 얼굴을 확인했다. 참외 두개를 꺼내어 새댁의 장바구니에 넣어줄 때, 새댁은 다행히도 거절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친절에 가슴이 벅차오를 뿐. 시현은 정감어린 눈빛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나중에 저희 가게에서 식빵 사주시는 겁니다."

"감사합니다.."

시현과 새댁은 가려는 방향이 같았다. 새댁은 시현이 준 참외를 꺼내 와사삭 베어 물었다. 입 안을 가득 메우는 달콤함에 일상에 대한 걱정마저 날아가 버리는 것 같다. 두입에 참외 반을 먹은 새댁은 부끄러운 듯 배시시 웃었다.

"제가 지금 천원밖에 없거든요..참외를 사면 내일은 밥하고 김치만 먹어야 해서 선뜻 사질 못했어요.."

"그럴 수도 있죠."

값싼 동정이나 위선은 깃들 틈이 없는 시현의 잔잔한 눈빛. 새댁은 신세를 입었지만 결코 비굴한 감정을 가지지 않았다. 시현에게 고개 숙여 고마움을 표시하며 힘주어 말한다.

"남편 월급 들어오면 꼭 밤 식빵이랑 야채 식빵 사러 갈게요."

새댁이 집으로 들어간 후 시현은 바나나를 하나 우물거리며 가까운 공원으로 향했다. 늦여름이지만 바람이 많이 불어 별로 덥진 않았다. 반팔 티셔츠를 입고 농구와 축구에 여념이 없는 학생들을 귀엽게 바라본다. 스포츠라면 종목에 관계없이 능숙한 시현. 군인 시절 운동을 잘한 덕분에 포상 휴가를 받은 적이 꽤 많았다. 아마추어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는 것은 좋은 심심풀이였다. 스승과 대면한 긴장을 걷어 내려는 걸까. 시현은 활기찬 운동장에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 앉혔다.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과일 가게 딸 은지가 완두콩 빛 새 자전거를 타고 있는 걸 보았다. 이전에 같이 있었던 소년이 은지가 쓰러지지 않도록 잡아주고 있다. 소년은 은지가 속도를 낼 법하면 손을 놓았다가 비틀거리는가 싶을 때 다시 잡아주곤 했다. 은지는 휘청휘청 하면서도 점점 속도를 내곤했다. 그렇게 한 십분 연습을 했을까. 둘은 자전거를 세워놓고 그늘가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슨 대화를 하는지 은지는 박수까지 쳐가며 연신 까르륵 웃곤 했다. 수줍음이 있는 소년이었지만 지금은 얼굴에 산들바람 같은 웃음이 깃들어 있었다. 자전거 연습은 그만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귀여운 모습에 시현마저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가게에 돌아온 시현은 쪽방에 몸을 뉘었다. 몇몇 사람과의 만남에 감정의 피로가 많이 걷어진 상태. 어느새 요가의 호흡법을 구현하며 편한 송장 자세로 옅게 남아있는 피로를 해소한다. 십분 정도 있은 후 시현은 바로 일어났다. 손목을 가볍게 스트레칭하며 연습용 크림을 꺼내 짜주머니에 채우는 동작에 주저함은 없었다. 나무로 만든 데코레이션 연습용 모조 케잌을 회전판에 올리고 훼라를 들어 크림을 씌우는 과정이 너무나 유려했다.

'스승님이 지적하셨던 부분만 한 시간 정도 해 보자.'

시현은 깨끗하게 코팅된 크림 위로 크림을 짜기 시작했다. 칼날이 들어와도 깜박이지 않을 듯한 진지한 눈빛에 비치는 건 화려하게 피어나는 크림 꽃송이. 이전 웨딩 케이크에서 아쉬웠던 점으로 몇번이고 반복하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스스로 정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시현의 진지한 태도는 흔들리지 않았다. 형광등 하나만 켜져 있는 일요일의 '빛나는 나무'. 시현의 부드러운 면모가 드러났던 하루의 마무리를 단단히 매듭짓듯, 시현의 진지한 몸동작은 숙련된 아름다움으로 오랫동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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