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링, 일상이란 단어가 컨텐츠 분야에서 하나의 장르가 된지도 제법 오래 되었습니다. 많은 작품들이 평범한 이야기. 소박한 감동을 말하며 나타나고 있죠. 그중에선 쉽게 잊히는 작품도, 명작이라 회자되는 작품들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에화가는 대작이라 소개하기엔 어색하지만 쉽게 양산되는 작품은 단연코 아닙니다. 배경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근대의 매연에 젖어든 일본, 일명 '굿 에이지'라 불리며 아름답게 상상되는 시기이기도 하죠. 누에화가는 그런 공상이 아닌 암울한 시대에 드리운 일반 소시민의 현실을 담담히 바라봅니다. 비참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도 있고, 평범한 사람들의 막연함. 미련. 슬픔. 기다림 같은 애틋한 감정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잠시 말을 잊고 페이지를 가만히 바라보게 할 정도로요.
주인공 스가누마는 제목인 누에 화가란 별명으로 불리는 화가입니다. 누에란 불길한 울음소리로 화살을 맞고 죽었다는 가상의 괴물. 스가누마는 얄궂게도 두 그림을 완성한 후 일반적인 화가의 생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누에를 죽인 두 개의 화살과 연관지어 생각할 수도 있겠죠. 사람들에게 잊혀진 누에처럼 스가누마 역시 십년 동안 침묵의 삶을 삽니다. 동물들, 그것도 특징을 짜집기한 그림만 그리면서요.
기자거리를 찾아 신문 기자가 찾아온지 얼마 안 되는 날, 사진관을 운영하며 쾌활하고 세상 물정을 아는 친구가 한 일거리를 가져옵니다. 일반적으로 화가에게 들어올 의뢰는 아니었지만 그 절박함에 끌린 스가누마는 그림을 완성하죠.
이야기의 흐름은 이렇듯 스가누마가 받는 그림 의뢰. 각기 다른 사람들의 사연을 풀어놓는 식으로 진행됩니다. 이런 구성을 택한 작품은 상당히 많이 있어서 전형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죠. 일반적인 기법을 선택한 누에화가가 보이는 가장 훌륭한 개성은 여기서 비롯됩니다.
스가누마의 그림엔 생명이 깃든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가누마는 그림을 그릴 때 의뢰인으로서 전해들은 정보를 짜집기하는 기법을 주로 사용하고요. 그 과정은 다분히 인간적입니다. 그려지는 이의 성격. 버릇. 행동거지를 자세히 듣고 조금씩 조금씩 의뢰받은 이미지를 재현합니다. 눈 코 입 등 순서대로 그림을 그려나가듯 의뢰인의 사연을 하나 하나 알아가며 마침내 '진실'을 그리죠. 여러 가지 그림들이 완성되지만, 그 중에 따뜻한 어머니와 천진한 아이의 이미지가 자주 언급되는 건 우연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스가누마는 다분히 인간적인 사람입니다. 기본적인 생활력이 부족한 면모도 보이고 당황하거나 무서워 하기도 하며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죠. 그리고 그런 성격을 가지고 의뢰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그림을 그려주는 과정, 때로는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이어지며 혹은 웃음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 과정을 자연스럽고 긴장감을 늦추지 않으며 풀어내는 이야기 구성은 재미와 더불어 짙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완성된 그림을 보고 의뢰주들이 느끼는 감정이 독자들에게도 전해진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라 할만큼.
모든 사연이 '그 후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끝맺진 않습니다. 오히려 뒷날의 가시밭길을 예상을 주는 에피소드도 적지 않죠. 어쩌면 그것이 이야기에 생동감을 주는 장치로 보이기도 합니다. 현실을 살아가는 일이 누구에게나 장미빛은 아니니까요. 그런 고단함마저 부드럽게 아우르는 섬세하고 담백한 작화 역시 누에화가의 매력을 돋보여 줍니다. 여러 조연들의 귀엽고 뻔뻔한 모습 역시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해주고요.
누에화가는 몇번을 반복해서, 혹은 앞 부분을 돌아보며 읽는 취향을 가지고 계신 분들께 적극적으로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일본적인 배경 설정이 많지만 특별히 왜색이 짙게 드러나지도 않은 편이고요.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충사'와 '우세모노 여관'이 연상되었는데, 두 작품을 접하신 분들에게도 일독을 권해드리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