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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에 절망하지 않는 길은 변화하는 것 뿐.
희연은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잠시 쉬었다. 3시간 째 꼼짝도 않고 업무에 집중한 모습엔 위엄마저 느껴진다. 대한민국에서도 손꼽히는 대기업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30살 여성. 회사에서 정한 퇴근 시간에서 삼십분 남기고 사흘 후의 일까지 완벽하게 끝내는 건 이미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부하 직원 중 한 명이 적당한 피로를 느끼며 말을 건다.
“희연 언니. 오늘 한잔 어때요? 저도 일다 끝냈는데.”
“미안. 남자친구 만나기로 해서. 요즘 통 못 만났거든.”
“정말 대단해요. 오래 가네요. 2년째인가요?”
“이제 햇수로..삼년 됐지.”
부하 직원은 애교 있게 혀를 내밀었다. 우스꽝스런 미소에 살짝 웃는 얼굴로 답하는 희연. 오늘은 금요일 저녁, 한주 내내 계속되던 야근이 끝나고 대부분 정시 퇴근하는 분위기였다. 그 중에서도 첫 번째로 퇴근하는 희연에겐 소녀 같은 두근거림이 드러난다. 남자친구와 약속한 분위기 좋은 칵테일 바로 향하는 발걸음은 더없이 가벼웠다.
미리 와서 스카치 위스키를 마시던 남자친구는 희연을 보자 밝게 웃음 지었다. 그는 뛰어난 장사 수완으로 상가 건물을 두 채나 소유하고 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는, 소위 엘리트 인생이라 말하기에 완벽한 남자였다.
“늦어서 미안해요. 빨리 온다고 왔는데..”
“뭘, 나도 이제 막 왔는걸. 그것보다 한잔 해야지? 바텐더. 블로우 잡으로 크림 듬뿍 올려서 한잔 부탁해요.”
희연은 칵테일이 앞에 나오자 환하게 웃었다. 피로한 자신을 위해 달콤한 메뉴를 고른 모습에 새삼 반하기라도 하듯이.
“요즘 일이 조금 많았어요.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잘 안 풀려서..”
일이야기로 화제를 이끄는 희연. 남자친구의 푸근한 미소는 고된 업무마저 즐겁게 만드는 했다. 가게에 있는 몇몇 손님들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고 있었지만 희연이 정말로 기뻐한다는 걸 느끼기엔 충분하다. 지난 달에 팀장으로 승진해서 일까. 한층 일에 책임감을 느끼며 최선을 다해온 그녀에겐 이런 시간이 행복에 겨울 정도였다. 약 삼십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남자친구는 희연의 손등에 가벼이 손가락을 얹었다. 은근하지만 살짝 온기가 도는 살갗에선 색정이 감돈다.
“우리..이제 같이 밤을 보낼 수 있지 않을까?”
희연은 남자친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었다. 삼년 동안 더할 나위 없이 신사적이고 다정했고, 혼전순결을 말하는 자신을 이해해준 남자를. 이미 몇 달 전부터 마음을 허락하고 있던 희연이 조용히 손을 거두는 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흡사 첫사랑을 고백하듯 수줍게 입을 여는 희연은 나이보다 훨씬 어리고, 순수함이 묻어났다.
“조금만..조금만 기다려줘요. 결혼하고 나면..그때.”
삼년을 사귄 연인이 사랑을 속삭이고 있을 때, 멀지 않은 거리에서 삼년간 클럽을 맡아온 은수는 한창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조직 폭력배가 소유하는 호스트 클럽. 일본식 캬바 클럽을 벤치마킹하여 테이블로 호스트들이 찾아가는 방식으로, 빛이 나는 것 같은 멋진 남자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지배인을 맡고 있는 건 서른 살의 은수였다. 백 팔십이 넘는 키에 넓은 어깨. 75 킬로의 균형 잡힌 체격. 고등학생을 연상케 하는 동안에 환상에 가까운 우윳빛 피부는 소설 속 주인공과 같았다.
“여기 샴페인으로 세 병 더.”
대기업 회장의 조카라는 중년 여사가 기분 좋게 추가주문을 넣는다. 이제 막 이십대 초반인 호스트가 세 명이나 붙어서 담배에 불을 붙여주거나 술을 따라주며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다들 전혀 가식적인 느낌이 없어 오히려 부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런 만큼 손님들의 만족도는 높을 수밖에. 은수는 한 테이블에 앉지 않고 느린 걸음걸이로 가게를 돌아다니며 가끔 손님들에게 몇 마디 하거나 웃어보이는 식으로 서비스를 했다. 주방에서 내온 과일이 담겨있는 접시를 테이블마다 돌리는 모습은 여자라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구현한 듯싶었다. 때때로 손님들은 호스트에게 스킨쉽을 하려 했지만 대부분 감질맛 나는 선에서 그만 두어야 했다. 이 클럽에선 음란행위가 엄격하게 금지 되어 있었으니까. 월급날이면 클럽에 얼굴 도장을 찍는 한 아가씨가 일행에게 소곤거렸다.
“그거 알아? 이 클럽에서 벌어들이는 돈의 절반은 은수 덕분에 들어오는 돈이라는 거.”
“전혀 과장 같지 않은 걸. 저 정도면 다른 가게에서도 탐낼 듯싶어.”
“서른 살이면 호스트 생명 끝난대도 과언이 아닌데, 저렇게 잘생긴 것 좀 봐. 혹시 아직 동정이지 않을까?”
“퍽이나, 이런 가게에서 일하는 남자 사는 모습이야 안봐도 뻔하지.”
“아무래도 좋아. 저 얼굴만 보고 있어도 술이 그냥 넘어간다니까. 나 리샤르로 한병 더 주문해야 겠어.”
한 테이블에서 나가는 지출이 백만원이 우습고, 테이블 열두 개는 손님으로 꽉 차 있었다. 일반적인 미남. 거친 듯 와일드한 매력. 여자로 오인할 만큼 예쁜 용모. 성인인지 의심스러울 만큼의 귀여움. 그런 호스트들이 달콤하게 속삭이며 술을 권하는 건 기나긴 밤 동안 이어지는 일탈된 즐거움이었다. 어느 정도 가게에 분위기가 잡힌 후 은수는 주방 뒤쪽 문으로 나가 잠간 숨을 가다듬었다. 별 없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자투리 과일을 하나씩 입에 넣은 모습엔 아이처럼 순수함이 엿보인다. 어쩌면 클럽 지배인이라는 직업엔 필요 없어 보이지만 강점이 될 수 있는 그런 매력이.
어둠 속에서 아이 울음소리를 닮은 긴 흔적이 새겨진다. 은수는 살짝 웃으며 쭈그려 앉았다. 새까만 털로 덮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야옹 거리며 친구에게 다가선다. 은수가 쉴 때마다 찾아오는 고양이로 벌써 만난 지 반년 정도 된 참이었다. 은수는 능숙하게 고양이의 턱 밑을 간질인 후 안주로 만들고 남은 튀김 조각을 내 준다. 기분이 좋아져 고르륵 소리를 내며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 약 오분 정도 여유를 즐긴 은수에게 조금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형. vip 고객분들 일어나시는 데요.”
“금방 갈게.”
가벼이 한숨을 쉬는 은수. 여자들에게 욕정의 대상이 되는 건 익숙한 일이었다. 정중하게 인사하는 동작만으로도 성적 만족감을 느낄 만큼, 은수의 외견은 신이 지나치리만큼 아름답게 빚었다는 표현이 과장이 아니었다. 즐거운 웃음 소리와 끈적한 술주정으로 얽힌 시간이 지나간다. 몇몇 호스트들이 미리 퇴근하는 시간이 다가오자 은수는 가게 정리를 확인하면서 짧게 지시한다.
“오늘 애프터 가는 애들 불러 와줘.”
모두 세 명. 상당한 체격의 남성적인 청년과 예쁘장한 이가 두 명이었다. 은수는 불러들인 호스트 앞에서 약간 차가운 눈빛을 띈다. 아랫사람을 잘 챙기면서도 손님들을 철저하게 관리하는 지배인. 눈앞에 있는 이들이 손님과 어느 정도 접촉을 가졌는지도 체크해둔 상태였다.
“지수는 처음 가는 거니까 가벼운 데이트 정도로 해둬. 선열. 오늘까지는 밤을 보내도 괜찮아. 가한은 이번에 정리하도록 해. 더 이상 화대를 받는 건 안 되니까 확실히 끊어.”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하든 호스트들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범죄 조직과 연결되어 있는 이 클럽에선 모든 호스트들이 관리를 받는다. 중간 보스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은수의 명령은 절대적. 본인이 지나친 화대를 챙기지 않는 성향이 있어 반론을 표시하는 이는 없었다.
영업시간이 끝나고 주방까지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은수는 클럽에 있었다. 모든 호스트들이 퇴근한 후 의자에 앉는 젊은 지배인. 아무도 없는 자취방에 돌아가기 싫다거나 한 건 아니었다. 몇 년 째 계속하고 있지만 늘 일을 마치면 찾아오는 염세적인 피로를 주시할 뿐.
며칠 후, 퇴근할 시간이 가까워 왔을 때 희연은 핸드폰 메신저 알람을 들었다. ‘오늘 내 맨션으로 와줘.’ 남자친구의 메시지였다. 희연의 연인은 무척이나 신사적인 남자였다. 몇 번 맨션에 간 적이 있었는데, 관계에 대한 요구를 거부하는 희연을 책망하거나 집착하지 않았으니까. 같이 음식을 만들어 먹거나 가벼운 게임을 하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낸 기억만을 생각하며, 희연은 기쁜 마음으로 퇴근했다.
가는 길 중간쯤에 맛있는 케이크 가게가 있는 게 행운으로 느껴졌다. 달콤하고 진한 풍미의 초콜렛 무스 케이크와 담백한 치즈 케이크를 한 조각씩 고른다. 유난히 보기 좋은 웃음을 짓는 점원에게 “고마워요. 수고 하세요.”환하게 인사하는 희연. 맨션 입구에 다다랐을 땐 하루의 피로감마저 옅어지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지는지. 문 앞에 다다랐을 땐 연애 초기의 설레임으로 가슴이 두근거린다. 벨을 눌렀을 때, “열려있으니 들어와.” 대답이라도 하듯 밝은 얼굴로 들어서는 희연이었다.
“오래 기다렸죠? 케이크를 좀 사왔는데..”
다음 순간, 기쁨은 파편조차 남기지 못한 채 잘려 나가버렸다. 연인은 긴 소파 배드에 누워있었다. 아무 것도 입지 않은 채로. 그리고 양 옆에는 성적 매력이 마구 드러나는, 아름답지만 천박한 눈빛을 한 두 여인이 있었다.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알몸 그대로 드러낸 모습. 성행위가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점액이 흡사 희연을 비웃듯 주변에 뿌려져 있었다.
희연은 순수했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침착함, 어쩌면 자존심이라 해야 할 마음이 이끄는 대로였을까. 희연은 이전에 연인과 맞췄던 커플링을 손가락에서 빼내었다. 여자 친구가 반지를 떨어뜨리는 걸 바라보는 남자의 눈빛은 성적인 만족감과 비열한 쾌감으로 힘이 풀린 채, 흐릿하게 열려 있었다. 관계를 하기 전부터 충분히 만족스런 돈을 받은 여인들은 고객의 의향을 완전히 파악한 듯했다
희연은 몸을 돌려 짐승들에게서 달아났다. 그들이 보는 앞에서 울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 남자는 희연에게 있어 단 한줌의 미련도 남기지 않고 결별한 것이었으니까. 거리로 나와 한참을 걷는 와중에도 케이크 상자를 붙잡고 있는 손은 꼭 쥐어져 있었다. 자신이 잃어버린 마음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마스카라가 번져 얼룩덜룩 할 만큼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내렸다. 그리고..목까지 올라오는 구역질보다 더 숨통을 틀어막는 건 스스로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결혼하기 전까지 순결을 지켜야 하는 거란다.’
힘든 회사일을 버티며 모두에게 인정받고, 호기심과 사랑의 경계선에서 순결을 지켜온 희연의 버팀목. 그것은 할머니의 가르침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희연을 자주 돌봐주었던 할머니는 곧잘 손녀에게 무릎베개를 해 주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희연은 할머니를 깊이 사랑했지만 모든 말에 공감한 건 아니었다. 그런 마음까지 의미 없게 느껴질 만큼 할머니는 희연에게 깊은 애정을 주었고 삼십대가 된 지금까지 희연의 기억 속에 소중하게 남아있었다.
‘네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미남이었단다. 사실 나 젊었을 때가 지금보다 성에 대해 문란했지. 하지만 할아버지는 나를 처음이자 유일한 아내로 맞아 사랑해 주었어. 희연아. 이 할미는 네가 행복한 가정을 이루기 만을 바랄 뿐이란다. 내가 죽은 후에라도 말이야.’
제가 어리석었어요. 할머니를 탓하는 건 아니었다. 혼전순결을 지켜온 건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으니까. 다만 연인이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방법으로 결별을 선언해야 했는지. 슬프도록 아픈 의문은 갈퀴가 되어 여인의 마음을 옭아맬 따름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이미 시간은 늦은 밤. 고개를 숙인 채 흐느끼던 희연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어둠의 침묵을 허락지 않는 네온사인과 밤을 밝히는 술, 담배연기에 젖은 싸늘한 공기가 의식을 유혹하고 있었다. 희연은 고개를 들었다. 호스트 클럽 상가 건물은 생각보다 더 찾기 쉬웠다. 흐느낌은 그쳤지만 얼굴엔 눈물 자국이 선명한 희연. 입구에는 압도적으로 덩치가 큰 거한이 두 명이나 서 있었다. 검은 양복을 입고 있는 그들은 여인들이 가게 안으로 들어갈 때마다 고개를 숙이곤 했다. 희연은 화장이 번진 얼굴을 감출 정신도 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처음 온 건데..여기서 남자들이랑 술 마시면 되는 건가요..?”
몰골이 이 모양이니 거부하겠지. 그런 생각은 착각이었다. 거한 중 한명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희연의 가방과 케이크 상자를 받아들었으니까. 다른 사내는 정중하게 물러나며 가게 안쪽을 향해 손을 내민다.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고객님.”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몰라 살짝 고개를 숙인 후 열어주는 문 안쪽으로 들어간 희연. 테이블에 앉아 남자들의 접객을 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이 민낯으로 드러나 있었다. 테이블 마다 가림 막도 거의 없어 가게 전체가 같은 좌석이란 느낌이 든다. 자리에 앉기 전 화장을 고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가오는 웨이터는 이제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생글생글 웃는 얼굴은 여인의 상처마저 부질없는 것처럼 만드는 듯 했다.
“주문하기 전에..화장을..조금 고치고 싶어요.”
“이쪽으로 와 주시겠어요?”
웨이터가 안내한 화장실은 이름 있는 호텔 수준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앉아서 화장을 할 수 있는 자리까지 마련된 고급스런 분위기. 희연은 눈물 자국이 지워질 정도로만 간단하게 화장을 했다. 기본 바탕이 무척 아름다운 편이고 화장이 잘 받는 얼굴이라 화장실을 나왔을 땐 아까의 눈물 젖은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 정도. 많은 여자 고객을 겪어온 웨이터 역시 고개를 잠깐 숙이는 것으로 놀라움을 숨겼다. 자리를 안내 받은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무릎에 올려놓으며 앉았다. 가정교육을 잘 받은 학생을 연상케 하는 모습. ‘평소 이런 가게에 오는 유형이 아니로군.’ 웨이터는 무릎을 꿇은 후, 공손하게 메뉴판을 펼쳐 희연에게 보여주었다.
“기본 이용료 십 만원으로 위스키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다른 주류와 안주는 따로 주문하셔야 하고요.”
“일단 기본 이용료로 할게요..우유에 탄 위스키도 따로 주문해야 하나요..?”
“아, 우유도 기본 이용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희 가게에선 저온 살균으로 처리한 유기농 최고급 우유를 취급하고 있습니다. 분명 마음에 드실 겁니다. 말씀하신 대로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호스트는 지명하실 이름이 있으신가요?”
“이 가게 처음이라서요..음..말을 잘 들어주시는 분이면 좋겠어요..”
“예. 감사합니다. 즐거운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웨이터의 태도와 목소리는 접객의 정석과도 같았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정도로. 심신이 피로한 지금의 희연이었지만 왠지 잘 들어왔다는 생각이 든다. 희연은 한결 가라앉은 기분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들의 나이 대는 중장년이 대부분인 듯싶었지만 20대로 보이는 경우도 꽤 있었다. 무척이나 값이 나갈듯한 고급 술과 호화로운 과일 안주. 간단한 음식도 취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테이블을 흘끔 거리는 것도 실례겠지.’ 희연은 가게를 파악하듯 조금 시선을 넓게 바라보았다. 무엇보다 생경한 것은 호스트들의 태도였다. 다양한 매력을 드러내지만 하나같이 여자 손님들의 기분을 만족시키고자 하는 모습. 개중에는 부담스러울 만큼 애교를 부리는 이도 보인다. 물론 접객을 받는 손님이야 좋아서 입을 다물지 못했지만.
갑자기 가게에 새로운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았다. 약간의 술렁임. 위스키와 우유, 빈 잔이 얹어진 은쟁반을 든 남성이 가벼이 걸음을 옮길 때부터. 희연은 그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천만원 대는 될 명품 양복 차림에 시계 같은 액세서리도 최고급. 그런 치장과 어우러진 외견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약간 충격을 받을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용모가 남자에게 허락된다는 것에 혼란처럼 느껴진다.
“어서 오십시오.”
희연에게 배정된 호스트. 이 클럽의 지배인이자 NO.1인 은수는 상냥한 웃음을 지으며 희연의옆 자리에 앉았다.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빼어난 외모의 호스트가 앉자 희연은 약간 당황한 눈치. “우유 비율은 얼마나 할까요?” 은수의 눈동자는 갈색이었다. 순수해 보이진 않았지만 타락하다거나 퇴폐적인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지금껏 나이트 클럽 한번 가본 적 없는 희연으로선 호스트에 대해선 상상해본 적도 드물었다. 막연하게 클럽 같은 곳에 가면 삶이 망가지는 게 아닐까 생각지만, 눈앞에 있는 매력적인 남자에겐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그런 안락한 기분마저 들었다.
"너무 강하지 않게 넣어 주세요.”
“예. 7:3 정도가 괜찮겠네요.”
빈 잔에 반 정도 우유를 따르고 위스키가 담긴 글라스를 기울인다. 은수의 손은 곱상한 외견과는 대조적으로 핏줄이 도드라진 강인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손가락이 가늘어 여성적으로 보이기도 했고, 약간 빠른 듯한 움직임엔 섬세함이 돋보인다.
“드셔보세요. 취향에 맞지 않으시면 바로 말씀해 주시고요.”
“고마워요.”
희연은 두 손으로 잔을 쥐고 천천히 들이켰다. 멕켈란 위스키의 스무드한 맛이 풍미 짙은 우유와 어우러져 부드럽게 목젖을 적신다. 반 정도를 한 번에 비운 희연은 가벼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맛있다..”
“입에 맞으신가요?”
“네..정말 맛있어요.”
심란한 기분에 좋은 술이 파고들자 마음이 안정된 것일까. 희연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 모습에 은수는 한결 더 밝은 표정을 지었다. 주변 테이블에서 자신을 주시하는 다른 손님들의 존재는 알지도 못하는 듯이.
“오늘 피곤한 일이 있으셨나요?”
은수의 물음에 희연은 다시금 눈 밑이 아려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 이 사람은 돈을 목적으로 나를 접객하는 것일 뿐이야.’
“조금..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회사에서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으셨나요?”
“그런 건..아니에요. 저희 회사엔 좋은 사람만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기분 상하셨다면 사과할게요.”
은수는 약간 고개를 숙여 보였다. 갑작스런 저자세에 어쩐지 미안한 마음이 드는 희연. 아직 이름도 묻지 않은 게 생각나고, 추가로 주문을 해야겠다. 마음먹는다.
“메뉴판 좀 가져다 주세요. 그쪽도..”
“은수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네, 은수 씨도 뭐 좀 마셔야죠..?”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깐 있다 가실 거면 기본 이용료만으로 충분하니까요.”
상냥한 사람이네. 희연이 본 은수는 딱 그런 모습이었다. 희연은 돈을 쓰는 데 있어선 검소한 성격. 하지만 잔혹한 결별의 아픔에 마음의 깃대는 표류하고 있었다. 희연은 오십만 원짜리 와인과 십만원 정도 되는 안주를 주문한다. 은수가 손을 들어 웨이터를 부르고 메뉴를 전할 때, 몇몇 여자 고객들의 수군거림이 있었다. 평소 테이블에 앉아 전속으로 접대를 하는 건 은수의 모습이 아니었으니까. 이 클럽 안에서 은수가 가진 절대적인 주도권과 손님에게 명확한 선을 긋는 태도. 카리스마로 작용하는 그런 면이 아니었다면 당장 소란이 일어나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만큼 이 가게에선 은수에게 욕정을 품으며 집착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으니까.
희연은 와인이 담긴 글라스를 살짝 흔들며 향을 음미했다. 환상 세계의 결혼식을 연상케 하는 달콤한 잔향이 의식을 감싼다. 과음을 하거나 취한 적은 없는 희연은 품격 있는 애주가였다. 연인과 함께 그날의 피로를 한잔 술로 달래던 기억이 목구멍을 타고 올라와 역한 흔적이 묻어나려 할 때, 글라스를 든 채 웃음 짓고 있는 은수를 의식한다.
‘그래. 다 끝났어.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멋진 남자와 함께 기분 좋게 즐기자.’
가벼이 건배한다. 맑은 마찰음과 함께 딮 퍼플 컬러의 와인이 찰랑이는 건 슬픔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희연이 와인의 맛을 천천히 즐기는 동안 은수는 섬세한 손길로 시중을 들었다. 결별한 연인이 이전에 보여준 신사적인 태도에 비해 더 조심스러운 느낌. 그러면서 부담을 주지 않는 그런 기분이 든다. 희연은 잠시 말을 하지 않은 채 있었고. 은수가 불편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다는 점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게 만들었다. 글라스를 비운 희연은 잠깐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는다. 그 한순간에 드러난 아픔과 미련. 어지럽게 얽혀진 후회와 슬픔을 파악하는 건 숙련된 호스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위스키..마실 수 있을까요.”
“예. 기본 이용료에 포함되어 있으니 부담가지지 마세요.”
“은수 씨는 정말 친절하시네요.”
바로 대답하지 않는 은수. “이번엔 온더락으로 해드릴 게요.” 희연은 두 손으로 위스키 글라스를 감싸 쥐었다. 흡사 기도를 하는 걸까. 고개 숙인 채 있던 여인은 결단을 내리듯 단숨에 잔을 비웠다.
“여기 체이서 부탁해.”
은수는 웨이터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매력적인 남자야.’ 위스키의 여운에 쓸려가는 와중 희연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도 멋진 남자였는데. 언제나 날 배려해 주고 이해해 주었는데. 난 결혼할 날만 기다리고 있었는데..왜 그런 걸까. 내가 그렇게 경멸스러웠던 걸까. 꼭 그런 방법으로 결별해야 했을까. 서로가 납득할 수 있는 길은 정말 없었을까. 이젠..정말 아무 것도 모르겠어.’
은수는 안주로 나온 새우 카나페를 희연 앞으로 옮겨 주었다. 딱 손에 잡기 좋은 위치에 포크를 놓아줄 때 희연은 울컥하고 감정이 떨림을 일으킨다. 잔을 붙들고 있던 손이 은수의 손등에 얹어질 때, 눈물을 머금은 여인의 눈동자는 아름다운 청년을 비추고 있었다.
“은수씨..애프터 가능 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