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현 Oct 17. 2023

잿빛 유리 글라스

2

“물론입니다.”

조금도 고민하지 않는 은수. “지금 일어나시겠어요? 저는 조금만 준비를 하고 나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먼저 제안할 땐 클럽에 있는 사람들 사이로 의문이 뿌려진다. 고개를 끄덕인 희연은 먼저 밖으로 나섰다.

“어머, 뭐야. 은수가 애프터를 하는 거야?”

“말도 안돼. 아무리 돈을 던져줘도 꿈쩍도 안 하는 은수인데..”

“나 그만 일어나겠어. 마음 상해서 더 못 있겠다고.”

손님들 사이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반향이 일어난다. 몇몇 호스트들이 은수를 말리려 했지만 돌아오는 건 차가운 눈빛 뿐. 지금도 충분히 멋지게 치장하고 있었지만 잠깐 준비한 사이 그 아름다움은 몇 배로 증폭되었다. “다녀올 테니까. 가게 정리 잘 해.” 짧게 명령하고 문 밖으로 나선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란 따위는 의식하지도 않는 것처럼.

희연은 은수를 잠시 바라본 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은수는 옆에서 함께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웃음 띤 얼굴로 희연을 바라볼 뿐. 희연이 이렇게 과음을 한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생경한 취기에 의식이 혼란스러워진다. 희연은 얼마 걷지 못하고 은수의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은수는 반쯤 희연을 부축하며 호텔 거리로 이끌었고, 그중 최고급 호텔로 들어섰다. 교육을 잘 받는 직원들은 취한 여자와 함께 들어선 은수에게 조금의 실례도 하지 않는다. 가장 비싼 스위트룸을 잡은 은수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희연을 침대에 눕혔다. 전혀 색정이 느껴지지 않는 눈으로 무방비한 여인을 바라보면서. 옷을 갈아입혀 주려던 은수는 곧 손을 거두었다. 메이드를 불러 가운으로 갈아입혀 달라고 부탁한다. 그 사이 자신은 잠깐 밖에 나가 조금이라도 의식을 가다듬는 은수. 곧 메이드가 나왔을 때, 옷도 잘 개켜두는 꼼꼼한 일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수고 했어요.”팁으로 건낸 돈은 이십만원. 누가 봐도 밤을 함께 보내려하는 모습이었지만 잠든 희연을 바라보는 은수의 눈에 깃든 건 깊은 애수였다.

“정말 오랜만이야. 다시 만나서 반가워. 희연아.”

넌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마음속에 묻었던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은수는 양 손으로 관자놀이를 감싸며 상념에 젖었다. 흡사 대답하듯이 희연의 입에서 한 마디가 흘러나올 때까지.

“진심으로 사랑했어..”

은수는 호스트 클럽 지배인으로 일하면서 타인의 심리를 파악하는 기술을 완벽히 익히고 있었다. 오늘 희연을 봤을 때부터 아픈 이별이 있었다는 건 충분히 눈치 챈 상태. 그리고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 또한. 두 사람이 서로 자신의 감정에만 젖어있는 순간 조금 시간을 앞으로 향한다. 은수가 서현이란 이름으로 희연과 함께 했던 시절을 생각하는 것. 당신에게 그 사실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개명하기 전, 은수의 이름은 서현이었다. 고등학교 입학식이 있던 날 쌍둥이 동생 서희와 함께 등교할 때였다. 남매는 별 말없이 걸음을 내딛었지만 특별히 서로를 무시한다거나 그런 분위기는 없었다. 둘 다 공부는 그럭저럭 하는 편이라 가까운 인문계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상황. 어머니가 폭력 조직과 연계된 칵테일 바를 운영하고 있다는 것과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는 사실은 쌍둥이에게 아무런 콤플렉스도 되지 못했다.

그때 희연은 버스에서 내려 입학하게 된 고등학교를 찾아가고 있었다. 교복을 줄이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곱고 윤곽이 뚜렷한 이목구비에 몸의 선이 워낙 아름다워서인지 길가던 사람들이 한번쯤 뒤돌아 볼 만큼 매력적이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렴. 이제 체조에 대한 건 다 잊어도 괜찮아.’

집을 나서기 전 아버지가 옷매무새를 잡아주며 건넨 말. 희연은 여섯 살 때부터 리듬 체조를 시작한 바 있었다. 성실한 성격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에 임했고 스승들도 재능을 인정했다. 빈궁하지 않은 집안이어서 부모님 역시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잇달아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보인 희연은 체조와 연계된 미래를 꿈꾸었지만, 중학교 2학년 때 허리 부상으로 체육 계열 학교 진급이 좌절되어 일반 고등학교에 입학한 것. 이제 허리에는 통증이 전혀 없었다. 재활 치료 기간 동안에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은 보람이 있었다. 안정적으로 고교에 진학한 것은 본인도 자부심을 가지는 일. ‘열심히 하자.’그렇게 생각하며 교문에 들어서는 희연이었다.

“다른 반이네.”

학교 게시판에 붙어있는 반 배정표. 서희는 시선을 옮기지 않고 툭 내뱉었다. 별 관심 없었던 서현 역시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자신의 반으로 걸음을 옮길 뿐. 조금 일찍 나섰는지 반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깐 생각하는 듯하던 서현은 맨 앞자리에 앉았다. 소위 명당이라 불리는 맨 뒷자리는 별로 당기지 않는 듯. 겉에 입은 코트를 벗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이어 두 번째로 들어온 희연의 기척을 느껴도 반응하지 않았다.

“안녕..”

희연은 서현의 옆자리에 앉으며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뒤에 가서 앉겠지. 하고 생각하던 서현은 흘낏 시선을 두었다. 키가 크고 얼굴도 예쁜 모습은 잘 의식하지 못한다. 티 없이 맑은 웃음이 눈에 확 들어왔을 뿐. 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답했다.

“어..안녕.”

“제일 먼저 왔는데 이 자리에 앉았네.”

“뒷자리는 별로라서..그러는 너야말로 굳이 앞자리에 앉았잖아.”

“수업은 잘 듣고 싶어서. 아, 난 희연이라고해. 정희연.”

“난 이서현이야.”

“잘 부탁해. 서현아.”

희연은 계속 웃음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중학교 때 왕따와는 다른 개념으로, 친구를 사귀는 걸 귀찮아했던 서현으로선 지금 상황이 마음에 안 들 법도 했다.

“나도 잘 부탁해. 희연.”

서현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희연이 가진 빼어난 미모에 첫눈에 반한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사실 꾸밈없이 맑은 태도에 감정의 동요를 일으킨 것이었지만. 얼굴 선 같은 타고난 외견이 무척 잘생긴 서현이었지만 여드름과 주근깨가 조금 많은 편이었다. 처음 보는 여 학우가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게 조금 어색했지만 싫지는 않다. 희연은 가방을 내려놓고 서현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었다.

“서현이는 어디 중학교 나왔어? 난 양명중학교.”

“난 진선중학교.”

“정말? 내 친구들 중에 진선중 나온 애들 많은데. 혹시 신소아라고 알아?"

”그 공부 운동 다 잘하고 집 잘 사는 여자애 말하는 거지? 이름은 알고 있어.“

”맞아. 나랑 같이 체조했던 애야.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네. 초등학생 졸업하고 연락끊겨서 진성중에 갔다는 것만 알고 있었거든.“

”체조를 했어?“

”아, 응. 여섯 살 때부터..“

”엄청 오래했나 보네.“

”이젠 그만 뒀는데 뭘.“

이야기가 오래 늘어지는 기색이 엿보일 때 다른 학생들이 하나 둘 교실로 들어섰다. 그 중에는 방금 언급되었던 소아도 있었다. 희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가자 소아는 깜짝 놀란 듯 손을 맞잡으며 인사한다.

”소아야!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희연아..너도 이 고등학교 왔어? 잘 됐다. 정말..“

소아의 외견도 무척 예쁜 편이었다. 그 나이 대의 여자아이들이 그렇듯 활발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서로의 얼굴엔 밝은 웃음이 감돈다. 다른 남학생들의 시선이 살짝 모이는 가운데 서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친구들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고, 예쁜 아이 둘이 함께 있으니 부담스런 기분도 들어서. 그 사이 희연과 소아는 같은 중학교에서 온 다른 친구들을 서로에게 소개하는 등 밝은 모습을 보였다. 곧 시간이 되어 모든 학생들이 자리에 앉았을 때, 담임 교사가 문 밖에서 살짝 심호흡을 한 후 교실로 들어선다.

“다들 반갑다. 난 담임을 맡은..지휘선이라고 한다. 앞으로 일년 동안 잘 지내보자.”

남자 선생님으로 영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해병대를 제대하고 고등학생 때 운동을 했다는 건 굳이 말하지 않은 사실. 담임을 맡은 건 처음이어서 쫙 빼입은 정장에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한 모습이었다. 말을 하는 동안 목소리가 살짝 떨리거나 어색하게 손짓을 하는 걸 보며 한 여학생이 옆에 있는 친구에게 아주 작게 속삭인다.

“선생님 귀엽다.”

다행히 들리진 않은 것 같았다. 학교에서 보내게 될 일정이 전달되는 동안 맨 앞에 앉은 서현은 필요한 사항은 모두 받아 적는 등 보통의 태도를 유지했다. 자기 소개할 때도 “이서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단순한 반응을 보일 뿐. 옆자리에 앉은 희연이 “정희연이라고 합니다. 모두와 친해지고 싶어요.”활발하게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도 별 감흥을 받지 않는 눈치. 그런 태도는 하교할 때까지 이어졌다. 옆 반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희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쌍둥이 남매는 몇 마디를 나누었다.

“자리는 맨 앞자리 앉았어?”

“응. 일찍 왔으니까.”

“난 맨 뒷자리 앉았는데.”

“그게 편할 수도 있잖아.”

“마음에 드는 애는 있었는지 모르겠네.”

“옆에 앉은 애가 활발하더라고.”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고등학생 남매가 도착한 곳은 집이 아닌 번화가의 칵테일 바였다. 바 안을 행주로 닦으며 장사 준비를 하고 있던 어머니가 살짝 웃는 얼굴로 아이들을 반겼다. 고등학생 자식들이 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젊고 아름다운 모습. 일란성 쌍둥이인 남매의 고운 외견에 대한 증거가 되기에 충분했다.

“어서 오렴. 학교는 어땠니?”

“괜찮았어요.”

“오빠가 옆에 앉은 친구가 활발하다고 했어요.”

“정말? 친하게 지내렴. 너희 나이 대에 활발하다는 건 좋은 거야.”

“알겠어요. 우리 배고프니까 제가 뭐 좀 만들어 먹을 게요.”

서현은 코트를 벗고 소매를 접어 올렸다. 익숙하게 바 안쪽 주방으로 가서 재료가 뭐가 있나 살핀다. “나 볶음밥 먹고 싶어.”바에 앉아 주문하는 서희의 얼굴에 지어지는 웃음. “좋아. 양파에 계란이랑 맛살이 있네. 잠깐만 기다려.” 양파를 잘게 다지는 동안 울려나오는 가벼운 칼질 소리가 즐거움이 된다. 얇게 썬 마늘과 파를 기름에 볶고, 충분히 향이 우러나자 양파와 잘 풀어놓은 계란을 넣고 능숙하게 팬을 흔드는 서현. 밥솥에서 어제 만든 밥을 꺼내어 볶는 손길은 살짝 웃음이 지어진 얼굴 표정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가늘고 길게 썬 맛살은 맨 마지막에 들어가 살짝만 익히고 간은 굴 소스로 한다. 완성된 볶음밥을 공기 그릇에 넣어 모양을 낸 후 접시에 올리자 숟가락을 들고 기다리던 서희가 환하게 웃었다. 서현은 바에 앉은 동생 앞으로 볶음밥을 내밀며 과장된 손짓을 보인다.

“특제 맛살 볶음밥. 맛있게 드십시오.”

서희는 두 손을 맞잡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했다. 종교는 없었지만 오빠가 해주는 요리를 먹을 때의 습관. 남매에게 이런 시간은 아주 오랫동안 이어져온 것이었다. 가게를 운영하느라 바쁜 어머니는 하루 한 끼는 자식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다. 아침에 피곤한 몸으로 퇴근하는 어머니에게 투정부릴 만큼 생각이 없지는 않은 남매. 서현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김치찌개나 계란 프라이. 닭볶음탕 정도는 수월히 만들었고, 중학교 때는 책을 보면 어지간한 요리는 척척 해낼 정도가 되었다.

“저 왔어요. 아직 안 늦었죠? 오늘따라 일이 생겨서..”

한 남자가 조급한 발걸음으로 가게에 들어섰다. 갸름한 얼굴 선과 눈썹 옆의 점이 매력적으로 보이는 서른 네 살 청년. 이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는 은선이었다. 잘 알고 있는 사이인지 함께 식사를 하던 남매도 반갑게 인사한다.

“어서 와요. 형.”

“밥 먹었어요, 오빠? 볶음밥 좀 먹을래요? 맛있는데.”

은선은 생긋 웃은 후 서둘러 옷을 갈아 입었다. “천천히 해도 되요. 아직 오픈 시간 이십분 남았으니까.” 서현의 어머니가 말했지만 은선이 준비를 마치고 나오기까진 십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귀여운 편에 속하는 외견과 일한은 손이 아주 빨랐고, 칵테일 만드는 실력은 나무랄 데 없어 손님들에게 인기가 있는 은선. “밥 먹고 있었구나? 천천히 먹어. 난 오는 길에 빵 사 먹었으니 괜찮아. 콜라라도 꺼내 줄까?”빠르게 말하면서도 바 안의 진열장에 놓인 보틀을 하나하나 닦는다. 술의 재고를 파악함과 동시에 술에 대한 지식을 정비하고 애착심을 들이는 중요한 업무. 바텐더가 된지 10년 차인 은선이었다. 이미 칵테일에 쓰이는 술의 특징은 모두 파악한 바. 얼음 조각을 송곳으로 깨고 있는 지배인을 의식하며 더욱 보틀을 닦는 손길에 속도감을 높인다. 서현과 서희가 식사를 마칠 즈음 마무리한 후 바로 과일을 준비한다. 호화로운 안주가 될 고가의 과일을 손질할 때는 서현 역시 함께 했다. 능숙한 솜씨로 레몬을 썰면서도 말을 거는 은선.

“오늘 고등학교에 입학했지? 앞으로 힘들겠구나.”

“힘들긴요. 딱 좋을 때죠.”

“혹시 시비걸거나 그런 애는 없었어? 걸어온 싸움은 받아주는 게 남자의 예의야.”

“전혀 없었어요. 반 애들 다 착해 보이던데요. 학교 분위기도 좋았고요.”

“짝은 누구야? 남녀 공학이라고 들었는데 혹시 여자애?”

“예쁘고 밝은 애였어요.”

오빠와 은선이 함께 일하는 동안 서희는 빈 그릇을 설거지하고 자투리 과일을 한데 모으는 데 일손을 보탰다. 오늘 들어온 맥주 상자를 들어 올리는 것 정도 전혀 힘들지 않는 것 같다. 보통 체격이었지만 서희는 또래 사내아이들과 비교하기가 민망할 만큼 힘이 셌고, 꽉 채워진 술병 상자를 두 개씩 옮기는 동안 힘쓰는 소리 하나 내뱉지 않는 것이었다. 여섯시 삼십분이 되자 모든 준비가 끝났다. 주방에서 일을 도왔던 서현은 안쪽에서 빠져나와 바 한쪽 구석에 서희와 함께 앉았다. 이 가게는 대중적으로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마스터의요리 솜씨와 은선의 칵테일 센스는 근방에 입소문이 나 단골도 제법 많다. 문을 연지 17년 정도 된 세월 동안 성실하게 쌓아온 평판, 얼마 안되어 중년의 부부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웃는 얼굴로 들어섰다. 

“안녕. 마마.”

“은선 씨. 오랜만이에요.”

은선은 능숙하게 물수건을 내밀었다. 근방에서 물류창고를 운영하고 있는 부부로 일과를 마치고 가볍게 술을 즐기곤 하는 단골. 서현의 어머니에겐 본명보다 더 익숙한 마마라는 호칭이었다. “늘 드시던 거로 할까요?” “오늘은 멕켈란 온더락으로 할게.” “전 뱀부가 좋겠어요.” 기분 좋게 주문하는 부부는 견과 안주 서비스를 받으며 오늘 하루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석에 앉아 오늘 학교에서 받아온 교과서와 시간표를 체크하는 쌍둥이 남매를 의식하기까진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학생 때부터 학교를 마치면 이곳 바에서 숙제와 공부를 하곤 했기에 대부분의 손님들이 알고 있었다.

“애들이 벌써 고등학생이야? 세월 참 빠르네.”

“이젠 다 컸구나.”

서희는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고 서현이 “그렇게 됐어요.”짧게 인사했다. 시간은 흐르고 사람들이 일어나며 새로 찾아오는 것이 반복된다. 손님 한명 한명의 주량을 알고 조절해 가며 팔기 때문에 만취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서현은 그런 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에 기대었다. 아버지가 누군지, 왜 이런 가게를 하는가에 대해 묻는 건 스스로 정한 금기 같은 것. ‘고등학교 때도 그냥 얌전히 있다 졸업하자. 중학교 때 그랬던 것처럼.’ 저녁 여덟시 쯤 되자 남매는 한창 바쁘게 돌아가는 바를 뒤로 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까지 이십분 정도 거리를 함께 걷는 동안 먼저 입을 연건 서희였다.

“가게가 잘 되는 것 같아 다행이야. 은선 오빠도 열심히 일해주고.”

“그렇지 뭐. 나도 그냥 학교 마치고 오면 주방에서 일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하지 그래? 나는 우리 둘 다 어머니 일을 도왔으면 해.”

“허락하지 않으시잖아. 친구 사귀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만 하시고.”

서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싸늘한 성격이지만 가족에 대해선 특별한 감정을 가지는 열 일곱 살 여자아이. 부엌에서 요리를 할 때 말고는 만사에 무관심한 오빠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 ‘오늘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니까. 다른 반이 된건 아쉽지만 일단은 지켜보자.’ 남매가 아파트로 돌아갔을 즈음. 자기 방에서 내일 학교 수업 받을 준비를 마친 희연은 시간을 확인했다. 엄마가 저녁 먹으라고 부르기까지 사십분 정도 남아 있었다. 침대에서 뒹굴거리고 있던 애완 고양이 네로는 주인이 익숙한 몸짓을 시작하는 걸 본다. 바닥에 앉더니 양 다리를 아주 천천히 벌리는 희연. 다리가 완전히 찢어져 180도를 넘어 살짝 브이 자가 되는 고난도의 유연운동에도 전혀 무리를 느끼지 않는다. 지면에 배와 턱을 붙인 체 한참을 있더니 바로 이어지는 물구나무 자세. 완벽에 가까운 밸런스와 근력. 리듬 체조 선수라는 꿈은 멀어졌지만 하루 한 시간 정도의 운동은 생활습관으로 굳어져 있었다.

몸을 휘어 복근에 힘이 들어가는 브릿지 운동을 하다가 가볍게 일어선다. 네로는 꼬리를 살랑이며 야옹. 하고 희연을 불렀다. 살집이 통통하게 잡힌 네로를 끌어안자 알싸하게 풍겨오는 고양이용 샴푸 냄새. 기분이 좋아지는 향을 맡으며 고등학생 첫 날이었던 오늘을 떠올린다. 같은 중학교를 나온 친구들도 있고. 아직은 잘 모르지만 착하게 보이는 아이들이 많았다는 걸 상기한다. 함께 체조를 했던 소아를 다시 만나게 된 것도 충분히 기쁜 일.

“희연아. 와서 밥 먹어라.”

“네. 갈게요.”어머니의 다정한 부름에 환한 목소리로 답하는 희연. 네로도 가벼운 걸음걸이로 주인의 뒤를 따른다. 희연은 자리에 앉기 전 우유를 따라 네로 앞에 놓았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아빠 엄마의 뺨에 입을 맞추는 동작.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던 아빠는 폰을 내려놓았다.

찌개 냄비를 내려놓는 어머니의 얼굴에는 밝은 웃음이 지어져 있다. 세 식구 모두가 식탁에 모여 앉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우유를 핥아먹기 시작하는 네로. 눈앞에 있는 단란한 가족의 존재가 세상의 전부인 고양이로선 당연한 일이었다.

“학교는 좀 어땠니. 아는 애들 많이 있었어?”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아버지. 겨울 동안 아주 열심히 공부한 딸이 무사히 일반고에 진학한건 직장에서도 이야기를 꺼낼 만큼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희연은 오늘 학교에서의 일을 잠깐 떠올리며 답한다.

“네. 중학교 같이 다닌 친구도 있었고..아, 맞다. 소아를 만났어요.”

“소아가?”

엄마는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희연이 체조를 그만 두면서 부모들끼리도 연락이 안되는 상태였으니까. 이사 문제로 중학교가 갈라지면서 친하게 지냈던 이웃을 떠나보낸 일이었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엄마를 위해 소아와 이야기한 사실을 털어놓는다.

“소아도 중학교 3학년 때 체조를 그만 두었대요. 선수 생활 할 때부터 잦은 발목 부상으로 고생했는데 한계가 왔다고 했어요. 워낙 공부를 잘하니까 고등학교 진학엔 별 문제가 없었나 봐요. 아는 친구도 많은 것 같았어요. 새로 이사온 집이 근처니까 나중에 놀러 오라고 하더라구요.”

“괜찮으면 집에 한번 놀러 오라고 하렴.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소아 엄마한테 할 말이 많으니까. 정말 잘 되었구나. 아, 옛날 얘기만 했네. 오늘 입학했으니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엔 조금 일렀을까?”

“아. 옆자리에 아주 잘생긴 애가 앉았어요.”

된장찌개를 마시던 아빠가 아주 약하게 기침을 한다. 옛 친구 이야기를 하던 엄마는 딸이 내놓은 이야기에 새롭게 관심이 가는 눈치. 우유를 반쯤 마신 네로가 가족을 바라볼 때 희연은 오늘 처음 만난 서현에 대해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 애가 교실에 제일 먼저 왔는데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었어요. 여드름이랑 주근깨가 좀 많긴 했는데 얼굴이 아주 미남형이더라고요. 조금 쌀쌀해 보이긴 했지만..서현이라는 이름이었어요. 똑같이 생긴 쌍둥이 여동생이랑 같이 하교하더라고요. 아, 소아가 중학교 생활을 아주 잘했나 봐요. 친구는 아니지만 서현이도 이름을 알고 있었다고..”

“서현..?”

과한 호기심이나 경계심이 과는 다른 감정. ‘쌍둥이 여동생...? 잘 생기고 주근깨.. 왠지 낯설지가 않은데, 기분 탓인가..’아내와 딸의 화제가 다시 소아에게 돌아가자 조용히 식사를 계속한다. 부디 희연이 학교에 잘 적응하기를 바라면서. 우유를 깨끗이 먹어치운 네로는 곧 가족들이 거실 티브이 앞에 모이기를 기다리듯 소파에 가 자리를 잡았다. 설거지를 함께 하는 모녀와 반찬을 정리하는 가장을 여유있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아침 여섯시 반. 서현은 핸드폰 알람이 시작되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시 반에 돌아온 어머니가 주무시는 걸 확인하고 아직 자고 있는 서희에게 다가가 살짝 어깨를 미는 모습은 무척이나 은밀한 기분을 자아낸다.

“서희야. 일어나.”

이전 08화 잿빛 유리 글라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