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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Oct 17. 2023

잿빛 유리 글라스

3

"으응.."

서희는 약간 몸을 뒤척였지만 곧 침대에서 일어났다. 얼굴을 감싸쥔 상태로 일분 정도 있더니 바로 화장실로 향한다. 샤워기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서현은 계란 껍질을 깨고, 가볍게 휘저었다. 피망과 양파를 잘게 써는 와중 칼로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진다. 채소와 함께 기름을 따라낸 참치 통조림을 넣어 볶음밥을 만드는 손에는 거침이 없었고, 볶음밥을 따로 그릇에 덜어둔 후 계란을 팬에 따르는 모습엔 즐거움이 가득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아침식사를 준비했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모양이 제대로 잡힌 오므라이스가 금방 완성되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카락을 가진 서희는 감은 머리를 꼼꼼하게 말린 후에서야 주방으로 들어섰다. 서현이 조리도구를 설거지하는 잠깐 동안 김치와 나물 두 가지를 꺼내고 수저, 젓가락을 챙기는 서희. 아침잠이 없는 편인 남매는 말없이 식사를 했다. 눈빛만 봐도 서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만큼, 마음까지 쌍둥이인 두 사람의 아침 시간은 늘 평온했다. 음식 냄새와 설거지 소리가 잠깐 의식을 건드린 걸까. 잠에 빠져있던 어머니는 살짝 방문을 열고 아이들이 학교 갈 준비하는 걸 확인했다. 서현은 섬세한 손길로 서희의 머리를 빗겨 주고 있었다. 세 식구가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재산 중 하나인 아름다운 머리카락. '오늘도 저 애들에게 좋은 일이 있게 해주세요.' 습관처럼 기도하며 어머니는 피곤한 몸을 침대에 뉘였다. 가슴 한켠을 차지한 죄책감을 긍정으로 어루만지면서.

학교에서 첫 수업을 받는 동안 서현은 맨 앞자리에서 좋은 태도를 보였다. 선생님의 말을 잘 듣고 필기도 꼼꼼하게 한다. 희연 역시 이미 몇차례나 예습한 내용이지만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천 조각에 염료가 파고들듯 지식을 받아들였다. 국어 시간이었는데 선생님은 거의 희연과 서현을 마주보며 수업을 한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 학생들의 성실한 태도는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서현아. 같이 밥 먹을래?"

점심 시간이 되어 급식실로 가려던 희연은 스스럼없이 물어 보았다. 이미 교실 밖에서 소아와 두명의 친구가 기다리고 있다. 서현은 가볍게 웃으며 도시락 통을 들어 보였다.

"난 괜찮아. 싸 왔거든."

"급식 안 먹어?"

"응. 중학교 때부터 도시락은 내가 만들었어."

"정말? 대단하다..난 요리는 전혀 못해서.."

"친구들 기다려. 얼른 가봐."

"아, 그래. 도시락 맛있게 먹어. 서현아."

"급식 맛있게 먹어."

희연은 친구들과 함께 급식실로 향했다. 옆 교실에서 온 서희는 복도에서 그 무리와 살짝 스쳤고, 예민한 청력으로 이야기 소리를 감지한다.

"희연아. 너 쟤가 마음에 들어?"

"응, 옆 자리에 앉은 짝이잖아."

"특별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구나. 중학교 때 다른 애들하고 이야기한 적도 거의 없었어. 나쁜 애는 아니지만 뭘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어서."

"괜히 뒷담화 하지마. 그냥 평범한 애지 뭐. 친하지도 않은 여자애가 밥 같이 먹자는데 그러자고 할 남자애가 있겠냐. 그것보다 얼른 서두르자. 오늘 반찬 닭강정이야."

소아가 유연하게 화제를 돌리자 친구들은 반쯤 장난치는 기분으로 걸음을 빨리 했다. 오빠를 나쁘게 말하는건가 했던 서희는 피식 웃으며 서현이 기다리고 있는 교실로 들어선다. 아침식사 때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도시락을 비우는 남매. 담백하고 수수하지만 엄청난 노력이 들어간 정물화를 연상시키는 모습이었다. 오빠가 빈 도시락통을 정리하는 것에 맞추듯 서희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 권투부에 들까 해."

"잘 어울리겠네."

서희의 곱상한 외모는 보통 체격이지만 기초 체력이 괴물 급이라는 걸 알리기엔 어울리지 않았다. 이 열일곱 여자아이의 신체능력은 프로 운동선수와 동급, 혹은 그 이상이라는 게 분명한 사실. 생각한 대로인 오빠의 반응에 말을 잇는 서희.

"오빠는 들고 싶은 거 있어?"

"별로.."

"동아리 활동이 필수라고 하던데."

"그럼 아무 거나 들지 뭐."

학교 게시판에 앞으로 갈 때까지만 해도 서현의 생각엔 변함이 없었다. 동아리 활동이 활발한 이 학교에선 부원 3명에 지도 교사 한명이면 정식 부활동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글귀를 바라보는 서현. 독서. 영화. 축구나 농구 같은 스포츠에 태권도와 유도 등의 무술까지 상당히 다양한 게시물이 붙어 있었다. 눈으로 훑어보며 뭘 해야할까..생각하던 차, 담임 교사인 휘선이 용지 하나를 게시판에 막 붙여 놓았다. 요리 연구부. 라고 크게 쓰여진 글자에 조금 급하게 그린 듯하지만 제법 귀여운 캐릭터가 웃고 있다. 키는 조금 작은 편이지만 어깨가 떡 벌어진 다부진 체격의 휘선 선생님이 직접 그렸다 생각하니 웃음이 나올 노릇이었다. 서현의 얼굴은 무표정할 뿐이었지만.

"어, 서현아. 동아리 뭐 들까 고민 중이니?"

"네."서현은 고개 숙여 인사한 후 짧게 답했다. '학생들이 다가서기에 좋은 교사가 되어야 해.' 마음 속으로 다짐한 선생님은 나름 부드럽게, 객관적으로 보면 안 어울리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한다.

"선생님이 자취를 오래 했거든. 안 그렇게 보일지 모르지만 요리에는 조금 자신이 있단다. 어학연수 갔을 때 식당에서 일했고 말이야. 무엇보다 올 해엔 담임을 맡게 되었으니 학교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너희들에게도 모범적인 교사로서.."

자신의 생각에 밀려 필요없는 말까지 주절주절 늘어옿는다는 걸 알아채지 못하는 선생님. 서현은 답하지 않고 '말씀하시고 싶은 만큼 그냥 들으면 되겠지.'그저 사이 사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가정 선생님의 허락은 받았고 말야. 요리 책도 최고급 교재로 열 권이나 준비했어. 덕분에 이번 달은 카페에 못 가겠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고 말고 그리고 또.."

"선생님. 식사하셨어요? 서현이도 있네."

교내를 함께 걷고 있던 희연과 소아가 인사했을 때서야 선생님은 정신을 놓은 채 말을 너무 많이 했다는 걸 알았다. 서현의 무심한 얼굴을 보니 얼굴이 달아오를 만큼 민망함이 드러나고, 서현은 일부러 살짝 웃으며"잘 하실 수 있을 거예요."어색함을 감추어 주었다. 그 모습에 용기가 회복되었는지 희연과 소아에게도 요리 연구부에 대해 말을 늘어놓는 선생님.

"일단은 한식 조리사 자격증 메뉴들로 시작할까 해. 요리하는게 손에 익으면 각 나라의 가정식을 주로 하고..재료비를 모아 고급 식당 레시피도 해보는 게 목표란다. 일주일 전부터 제과제빵도 배우고 있어서.."

"정말 멋있어요. 선생님. 계획까지 확실히 해 놓으셨군요."

희연은 정말로 감탄했는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전 방송부에 들기로 했어요."악의 없는 웃음을 짓는 소아는 선생님이 제법 귀엽다고 생각한다. 어린 새처럼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희연 역시. 희연의 반응은 단순한 호의 이상인 듯 싶었다. 잠깐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눈을 빛내며 한 걸음 다가선다.

"선생님. 저 요리 연구부에 들고 싶어요."

"정말이니?"

"그럼요. 저 집안일은 제대로 할 줄 아는게 없거든요. 라면도 몇번 안 끓여 봤어요."

"의외구나. 집에서 부지런히 움직일 것 같았는데."

"체조 때문에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맨날 연습만 해서..그만 두고도 재활 치료랑 공부 때문에 기회가 없었어요. 제 밥은 제가 차려먹을 만큼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아주 기특하구나! 걱정마라. 선생님이 하나하나 가르쳐 줄 테니까! 그래, 서현이 너도 들 거니?"

"네?"

"네라고 말해줘서 고맙다! 이야 벌써 두 명이나 들어오기로 하다니. 의욕이 생기는 데!"

이미 흥분한 상태라 말이 안 통하는 상태의 선생님. 서현은 아니라고 하려다가 '어차피 아무 데나 들 생각이었는데 잘 됐지 뭐.' "잘 부탁드릴게요."고분고분하게 말했다. 희연은 서현의 손을 잡으며 살짝 놀란 듯 작게 소리쳤다.

"서현이 너도 같이 하는 거야? 정말 잘 됐다..우리 잘 해보자!"

"그래..알았으니까 손은 좀.."

"아, 미안. 그럼 선생님.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그래. 선생님만 믿으렴!"

거의 초등학생처럼 기분이 좋아진 선생님은 서둘러 교무실로 달려갔다. "우리도 그만 가자."소아가 희연과 함께 자리를 뒤로 한 후 서현은 자신의 손을 가만히 주시했다. 서희 말고 다른 여자아이와 손을 잡아본 건 처음있는 일. 희연은 늘 과장되게 기뻐했고 곧잘 진심으로 감동하는 성격인 듯 싶었다. 그렇지만 수업 중이나 간간이 보이는 진지한 모습을 보면 마냥 순진한 아이가 아닌 것도 같고. 언제나처럼 흘려 넘기지 않고 이성인 동급생에 대해 떠올리는 건 서현에겐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시선을 게시판에 둔 채, 서현은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었다.

며칠 후 공식적으로 동아리 활동이 시작된 날. 가사실습실에 모인 건 서현과 희연. 그리고 수지라는 여학생이었다. 조용한 성격이지만 끈기있고 요리를 좋아하는 아이. 희연은 만나자마자 반갑게 인사한다.

"안녕. 난 3반의 정희연이라고 해.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응..난 신수지..잘 부탁해."

"얘는 같은 반, 나랑 짝이야."

"반가워. 수지야. 난 이서현이야."

"아, 안녕."

여중을 나온 수지는 동년배의 남자애와 말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희연과 이야기를 조금 길게 늘이는 모습. 서현은 가스 렌지와 각종 냄비, 찜솥. 오븐을 둘러보며 '생각보다 시설이 좋은 것 같네.'그렇게 생각하는 와중, 희연 덕에 이 동아리에 함께 할 수 있었던게 다행이란 생각이 살짝 스며들었다.

시작 종 치기 삼분 전. 요리 연구부 지도 교사 지휘선은 문 밖에서 몇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해병대 시절 빠릿한 분대장이었던 걸 상기하며 '잘 할 수 있어!'스스로에게 되뇌이고, 눈 앞의 현실을 친절히 알려주는 종소리에 이끌려 가사 실습실 문을 열었다.

"자, 다들 모였니!"

기운차게 외치며 들어서는 선생님. 희연과 서현. 수지는 멀뚱히 서 있었다. 그 모습에 순간 '내가 너무 소리를 크게 했나?'했지만 오히려 더욱 활기를 모으듯 목소리를 높인다.

"요리 연구부에 온걸 환영한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끝은 창대하리라는 격언을 가슴에 안고, 앞으로 잘 해보자꾸나!"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건 희연이었다. 천천히 박수를 치기 시작한 것. 서현은 그 소리에 이끌려 따라서 박수를 쳤고 뻘쭘하게 서 있던 수지도 곧 손을 맞부딪혔다.

'아이들이 아주 열정적인걸?'

선생님은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평상시 담당하는 영어 수업보다 더 빠른 속도로 칠판을 글자로 가득 채운다. 한국의 음식 문화에 대해 적은 내용. 수지는 필기를 해야 하는 건가 싶어 일단 가져온 필기구를 꺼낸다. 마찬가지로 샤프를 꺼내려 하는 희연과 서현을 가볍게 저지시키는 휘선이었다.

"아아, 적을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참조하자는 거니까. 으흠..! 우리 나라에선 기원전 천년 경에 이미 쌀과 보리, 잡곡 등을 재배하고 있었단다. 삼국 시대의 중농 정책에 본격적인 농업국으로 성장했고..콩만으로 메주를 쑤어 간장과 된장을 만들기도 했지. 그리고 또.."

몇번이고 생각한 것인지 선생님의 설명은 줄을 이어 흘러나왔다. 다행히 아이들이 학구열이 있는 편이라 주의 깊게 들어준다. 요리에 취미가 있던 서현에겐 무척이나 흥미로운 지식. 희연도 눈을 반짝였고 수지 역시 이따금 고개를 끄덕여가며 몰입하는 것이었다. 쌀에 대한 역사에서 근대 곡물 시장에까지 나가려던 휘선은 깜빡 정신을 차렸다. '이러다간 오늘 실습도 못하고 시간이 지나가 버리겠는걸.' 

"자, 그럼 오늘은..한식 조리 기능사 시험에 나오는 비빔밥을 해 보자!"

선생님은 교재에 나와있는 재료 및 분량을 그대로 칠판에 적었다. 바로 준비 된 앞치마를 두르고 조리를 시작하는 휘선. 서현이 먼저 쌀을 물에 씻었고 수지와 희연은 선생님이 지시하는 대로 애호박과 고사리, 도라지에 청포묵을 썰기 시작했다. 왼쪽 손가락을 편 상태로 칼질을 하는 희연의 모습에 선생님이 살짝 교정을 해준다.

"칼을 쓸 때는 손가락을 구부려서..손 두번째 마디 앞으로 칼을 대어서 해야 손을 베지 않는단다."

희연은 잠깐 혼란스러워 하는 기색이었지만 수지의 손 모양을 보고 금방 요령을 파악했다. 능숙하게 칼을 다루는 수지에게 말을 거는 선생님.

"수지는 칼질하는 자세가 아주 제대로구나. 집에서 자주 하니?"

"부모님이 제과점을 하시거든요..주방에서 몇번 도운 적이 있어서.."

살짝 수줍어하는 수지. 쌀을 씻는 와중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서현은 곧 의식을 손끝에 두었다. 착착하는 소리가 경쾌하면서 작업에 속도감을 더한다. 쌀을 세번 씻은 후 전기 밥솥에 넣는 손길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계란 껍질을 까 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하는 동작엔 즐거운 마저 엿보인다.

"계란 지단은 제가 할게요." 

빠른 손놀림으로 계란 막을 풀고 팬에 기름을 둘러 불에 올리는 서현. 노른자를 살짝 흘려보내자 치직하는 소리가 세어나온다. 딱 이상적인 정도로 익자 가볍게 건져낸 후 바로 흰자를 붓는 모습엔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선생님은 입술을 동그랗게 모으며 살짝 휘파람을 불었다.

"서현이도 요리를 하나 보구나?"

"집에서 요리는 거의 제가 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바쁘시거든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휘선. 나름 열심히 도라지와 고사리를 자르던 희연은 주방일에 익숙한 친구들을 새삼 경탄한 듯 바라보았다. 본인 역시 생각보다 빨리 칼질의 요령을 익혔지만, 거의 매일같이 해서 손에 익은 두 사람과 비교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둘 다 정말 잘한다..신기해."

"희연이도 금방 배우는 것 같구나. 걱정하지 마라. 너희 셋 모두 조리 기능사 시험 정도는 가볍게 패스할 만큼 가르쳐 줄 테니까!"

주먹 쥔 손을 가슴 앞에 붙이며 선언하는 선생님이었다. 이번 학기부터 시작한 요리 연구부의 지됴교사가 된 것만으로도 자신감이 넘치고, 재능있는 학생들이 더해지니 의욕이 하늘을 찌르는 모양이다. 밥이 되는 동안 썰어놓은 도라지. 애호박. 고사리를 조리하는 아이들. 서현이 애호박의 물기를 짜고, 고사리를 양념하는 수지. 희연은 도라지에 소금을 뿌려 주무른 후 물에 씻어 쓴 맛을 빼두었다.

"비빔밥은 영양학적으로 균형 잡힌 일품요리로..제철 나물로 색이 뚜렷한 것을 준비해야 하지. 특히 전주, 진주 비빔밥이 유명한.."

몇번이고 외웠던 글을 읊으면서도 선생님은 이상적으로 청포묵을 무쳤다. 그 와중 채썬 쇠고기를 볶는 손길은 절묘하단 말이 어울린다. 곧 밥이 다 되었다. 너무 질지도, 되지도 않게 잘 지어진 백미밥엔 유난히 먹음직스러운 윤기가 흐른다. '간장이랑 날계란 넣고 비벼 먹으면 딱이겠네.' 적당한 길이로 썰어 조리가 끝난 나물 종류와 쇠고기, 계란지단을 밥에 올리고 가운데에 약고추장을 얹자, 기능사 시험의 기준에 딱 맞춘 비빔밥이 완성되었다. 분량을 정확히 계산하여 한 사람 앞에 일인분씩 네 그릇. 휘선은 생각보다 훨씬 볼품이 난 것에 기뻐하여 큰 동작으로 박수를 쳤다.

"다들 수고 했어! 완벽해!"

자기 손으로 요리를 해본 게 처음인 희연은 조리 과정에 참여하고 완성품이 나온 것에 살짝 고양감을 느꼈다. 부모님 가게에서 바쁘게 도울 때에 비해 여유가 있는 시간에 만족하는 수지. 서현은 요리의 즐거움에 대한 여운을 뒷정리로 풀 생각이었다.

"아, 서현아. 설거지는 다 먹고나서 같이 하자. 다들 어서 먹어볼까? 슬슬 배도 고플 거고..격식 차릴 것 없으니 마음 편하게 먹으렴."

선생님이 숟가락을 들자 먼저 밥을 비빈 건 희연이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 수지였지만 잘 모르는 남자애가 옆에 있다는 사실에 조금 머뭇거리고, 그 모습을 눈치챈 서현은 제대로 비비지도 않고 밥을 퍼먹었다. 꼼꼼하게 씻고 물조절을 워낙 잘해서인지 그냥 먹어도 입에 감기는 맛. 뿌듯한 기분으로 학생들을 바라보고 밥을 떠먹는 것을 같이 하느라 휘선은 꽤나 바쁜 눈치였다. 조금 조용하지만 만족스러운 시식이 끝나고 다 함께 뒷정리를 한다. 요리할 때 못지 않게 아주 빠른 서현의 손길에 감탄하는 두 여자아이. 약간 거리감을 두는 경향이 있는 서현은 그 시선에 잘 모르는 감정이었던 수줍음이 움트는 걸 느꼈다.

"다들 정말 잘했다. 조심해서 들어가렴."

"수고 하셨습니다."고개 숙여 인사하는 서현.

"안녕히 계세요."희연과 수지는 동시에 인사했다. 교실을 나서며 희연은 두 친구에게 묻는다.

"다들 같이 갈래? 난 세호 아파트에 사는 데."

"우리 집으로 가는 방향이긴 해."

"잘 됐다. 괜찮으면 다른 친구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어?"

"으, 응."

수지는 조금 멈칫하는가 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모르는 아이들과 같이 간다는게 수줍은 성격에 부담은 되었지만, 눈에 띌 만큼 겁쟁이는 아니었으니까. 서현은 보통 말투로 가벼이 인사했다."

"난 동생이랑 같이 가야 돼. 그럼, 내일 만나."

"어, 조심해서 가 서현아,"

"안녕.."

두 사람과 헤어진 서현은 권투부 연습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운동 계통 동아리 특유의 약간 강압적이면서 서늘한 느낌이 낯설지 않는다. 스포츠를 즐기는 성향은 없지만 기초 체력 훈련을 꾸준히 해온 서현. 희선 선생님의 박력에 휘말리지 않았다면 나 역시 이 곳 중 한 곳에서 있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권투부 연습실을 찾았다.

창문이 열려 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학생들이 링 주변에 몰려 있는게 확 눈에 들어왔다. 글러브를 끼고 있는 서희의 모습, 이미 링에는 헤드 기어를 갖춘 학생 한명이 실신한 채 쓰러져 있었다. 셔츠에 비치는 선 만으로도 충분히 단련되었음이 보였지만, 오늘 처음 권투를 한 서희에겐 상대가 안되는 모양. 담당 교사는 떨리는 주먹을 움켜 잡으며 흥분을 가라앉힐 정도였다.

"다음엔 나야."

"무슨..잠자코 물러나 있어."

서희는 몰랐지만 지금 실랑이를 하는 이들은 학교 안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들이었다. 시시한 싸움을 잇달아 세번이나 해서 약간 무료한 기분이 드는 서희는 밖에 기다리는 오빠를 보았다.

"선생님. 시간 다 된 것 같은 데요."

서희는 태어나서 한번도 사람을 두려워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보다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언제나 무심하게 대할 뿐. 서희의 움직임에 정신이 팔려있던 담당교사는 그제야 현실로 돌아왔다.

"자, 자! 오늘은 여기까지다. 다들 빨리 청소하고 귀가하도록."

"선생님! 아직입니다! 일학년 한테 유망주가 셋이나 당했는데.."

"입 다물어! 불만 있는 녀석은 다 끝나고 나한테 직접 말해라! 어서 청소 시작해!"

실신한 친구를 들 것에 옮기던 한 이학년이 매서운 눈빛으로 서희의 뒷모습을 노려 보았다. 두번이나 틀어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풀어 헤쳐지는 순간, 그 모습은 두려울 만큼 아름다운 검은 물결을 이루었다. 방금 보여준 짐승 수준의 신체 능력과는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는 듯. 모든 학생들이 체육관을 청소하는 동안 서희를 의식하지 않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 다들 흥분한 것 같아서."

서희는 오빠와 함께 교문을 나서며 말했다. 서현으로선 여동생이 권투부에 들겠다고 했을 때부터 예상한 모습이긴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단 서희에게 상대가 될 사람이 없었나 보군, 그런 결론이 지어졌다.

"첫째 날이었는데 선배들이 1학년하고 스파링을 한거야?"

"기본 자세만 배웠어. 다 끝나갈 때쯤에 1학년들 한테 자신 있으면 링에 올라와 보라고 도발을 해서."

"선생님이 있던 것 같던데."

"싸움 구경을 좋아하는 타입이야. 가르치는 재주는 있어 보였지만."

"조금 봐주면서..했을 리는 없고. 그래도 살살한 것 같더라."

"너무 겁을 주고 싶진 않았거든. 마지막에 상대한 선배는 그래도 주먹이 살짝 맵더라."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학년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겠네. 일부러 맞아 준거?"

"마음 먹었다면 피할 수 있었지만."

남매의 대화는 언제나 그렇듯 딱딱한 어투로 오고 간다.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증거. 서희는 역시 갑작스럽게 요리 연구부에 들어간게 신경이 쓰인 듯했다. 권투부에 대한 화제가 끝나자 분위기를 바꾸어 먼저 이야기를 꺼낸다.

"요리 연구부는 좀 어땠어? 영어 선생님이 지도교사라고 하던데. 여자애들은 다들 귀엽다고 하는 선생님이야."

"아주 열성적이시긴 하더라."

"부원은 몇명이었어?"

"희연이랑 수지랑 나. 이렇게 세명."

"딱 최소 인원이었네. 이름으로 말하는 걸 보니 꽤 마음에 들었나 보네."

"희연이는 열심히 하려고 하고 수지는 잘 하더라고. 나도 다른 사람이랑 같이 요리해 본 건 처음이어서 즐거웠어."

서현의 얼굴에 살짝 웃음이 스민다. 서희에게 요리를 해줄 때 보여주는 얼굴과는 조금 다른 감정. 비빔밥을 했는데 딱 기능사 시험에 맞춘 형태였다느니, 그래서 더 신선했다. 재료를 좋은 걸 써서 맛있더라.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오빠는 계속 웃고 있었다. '정말 재미있었나 보네.'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는 게 서희의 장점. 어머니의 가게로 향하는 동안 이야기는 곧 멎었지만 서현이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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