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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Oct 17. 2023

잿빛 유리 글라스

4

가게에 들어섰을 때 어머니가 남매를 반겼다. 오늘은 부활동까지 해서 이미 가게는 영업 중인 시간이었다. 야간 자율 학습은 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저녁 식사는 하지 않은 상황. 서현은 앞치마를 두르며 활기차게 주방으로 향했다. 막 들어온 마티니를 완성한 은선이 새삼 즐거워 보이는 서현을 의식한다. 서희가 한발 앞서 설명했다.

"오늘 부활동을 했는데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에요."

"그래? 서현이 무슨 부에 들었는데?"

"요리 연구부요."

조각 채소와 얇게 썬 생햄으로 아기자기하게 장식한 카나페를 내면서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 다시 주방으로 들어가면서 아들에게 말을 걸었는데, 기쁨과 설레임이 가득 베어 있는 모습이었다.

"서현아. 요리 연구부에 든 거니?"

"예. 재미있었어요."

"선생님은 어떤 분이셔?"

"담임 선생님이신데 아주 열정적이고 진지한 분이세요. 박력에 밀리는 것 같았어요."

"다른 친구들은?"

"딱 두명 더 있는데 희연이랑 수지라고 했어요. 열심히 하고 잘 하는 애들이었어요."

간단한 대화였지만 어머니가 진심으로 감동하고 있다는 걸 느낀 서현. 언제나 쌍둥이 남매가 평범한 나날을 보내길 바라는 어머니였다. 본인의 삶에 굴곡이 많아서일까. 아들이 보편적인 즐거움을 가졌다는 것까지 특별하게 여겨지는 것 같았다. 서희가 먹을 밥을 볶는 동작에서까지 기쁨이 느껴지는 서현의 모습. 곧 밥을 들고 주방을 나설 때에 맞추듯 그 뒤를 따르는 어머니였다.

"서희는 어떤 부에 들었니?"

"권투부요."

순간 어머니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가 사라졌다. 그 차이를 눈치 챈 서희였지만 거짓말 하는 취미는 없었다. 담담하게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할 뿐.

"기본 자세만 배웠는데 덤벼 보라는 식으로 말하길레 링에 올라갔어요. 세명을 때려 눕혔고요."

"그래..알았다. 너희 나이 또래에서 서희에게 상대가 될 사람이 있을리 없지. 잘했다."

'잘했다'라는 말에서 묻어나는 약간의 슬픔. 오빠가 준비해 준 밥을 먹는 것으로 서희는 감정을 숨길 수 있었다. 주문한 칵테일을 만드느라 바쁘게 일하지만 그런 모습을 못 볼 정도는 아닌 은선. 아까 서현이 요리부에 들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마스터의 모습을 굳이 입밖으로 내뱉진 않았다. 곧 바 끄트머리에 앉아 숙제를 시작하는 아이들을 잠깐 바라봤을 뿐.

서현과 서희의 학교 생활은 실타래 사이로 무늬가 새겨지듯 자연스럽게 풀려 나왔다. 수업이 끝나고 참여하는 요리 연구부 활동에 서현은 정말로 기뻐하는 것 같았다. 만두국을 만드는 날, 희연과 수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서현을 볼 수 있었다. 무척이나 듣기 좋은 음색이었지만 가사가 없었고 들어본 적이 없는 곡. 먼저 말을 건건 희연이었다.

"서현아. 무슨 노래야? 처음 듣는다."

서현은 깜짝, 놀란 듯 멈칫했다. 자신이 노래를 불렀다는 걸 인지 못할 만큼, 만두를 빚는데만 열중해 있다는 걸 들켜서인지 조금 당황한 눈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희현을 향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그, 그냥 흥얼거리는 거야."

"진짜? 듣기에 굉장히 좋았는데."

"서현이는 음악에 소질이 있나 봐."

수지의 말에 살짝 부끄러운 기분이 든다. 사실 서현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재능은 음악이었다. 단순히 흥얼거리는 사이에도 이상적인 멜로디를 구현할 만큼, 서현의 음색에는 창조성이라는 단어에 부족함이 없었다. 본인은 전혀 그것을 자각하지 못했지만.

"만두는 면 요리 중에선 으뜸이라 할 수 있지. 우리 나라에선 예전부터 여름엔 찐만두 형태로. 그외의 계절에선 장국에 삶아 익혀 먹었단다. 만두의 종류는 만두피. 소의 재료. 만드는 모양에 따라 매우 다양한.."

오늘도 줄줄이 설명을 늘어놓는 선생님이었다. 이젠 적응이 되어 아이들은 요리를 하는 동안 잘 들어준다. 어느덧 학생들이 학교에 적응하는 봄을 거쳤고 계절은 여름을 향해 걷는 중. 심드렁한 기분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한 서현이었지만 요리 연구부 활동은 생각보다 더 큰 기쁨이 되어 주었다. 가족들 앞에서만 보이는 노래하는 모습을 무의식 중에 친구들 앞에서 드러낼 만큼. 올해는 더위가 조금 일찍 찾아왔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와 창밖으로 강한 햇살이 비치는 사이 예쁘게 만두를 빚는 모습은 풋과일의 신선함과 닮아 있었다. 선생님이 우린 육수에 만두를 넣고, 사용한 기물을 설거지 하는 사이 수지는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수줍음이 많지만 이미 희연과 서현에게 친구가 되었고 베풀 줄 아는 성품을 가진 수지. 마음 속으로 몇번 고민하다가 결심하여 말한다.

"얘들아. 오늘 우리 제과점에 올래? 빙수라도 먹고 가."

평소 친구에게 아주 살갑게 대하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서현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한번에 두세 가지 일을 금방 해내는 희연은 만두소를 담았던 스텐볼을 설거지하며 기쁘게 대답한다.

"정말 그래도 돼? 난 좋아."

"미안..나 오늘 돈을 안 가져와서.."

"아니야. 서현아. 올 해에 빙수 메뉴 두 가지 늘렸거든. 그냥 먹어도 돼. 맛이 어떤가 말해줘도 좋고..걱정 하지마."

서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수지의 태도에서 자신이 말 실수를 했음을 알았다. 바로 사과하기엔 타이밍이 좋지 않고, 조금 생각하다가 "그럼 나도 갈게."일부러 약간 과장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그 모습을 알아 보고 십대 아이들의 귀여운 모습에 웃음을 짓는 휘선. '요리 연구를 만든 건 정말 잘한 일이었어.'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들을 위해 직접 구입한 고급 보온통에 만두국을 담아준다. 부활동을 마치고 복도를 걷는 사이, 서현은 늘 그랬듯 지하로 걸음을 내딛으며 말했다.

"아, 잠깐만. 서희한테 잠깐 친구들이랑 있다 가겠다고 말하고 올게."

"서희도 같이 와도 돼."수지는 미리 생각해놓은 듯 바로 말했다. 서희와 같은 반이기도 했고, 친구를 잘 사귀지 않는 서현과 잘 지내고있다는 것만으로도 서희는 수지에게 잘 대하고 있었으니까. 권투부 연습실에선 한창 셰도우 복싱 훈련이 한창이었다. 오늘 요리 연구부가 조금 일찍 끝나기도 했지만, 체육 계통은 다른 부서에 비해 약간 시간이 길게 잡혀 있었다. 경쾌하게 발을 내딛고 어깨에 힘을 뺀 채 다양한 각도로 주먹을 날리는 서희. 이미 다른 학교와의 친선 경기에서 무패를 자랑하는 권투의 에이스가 되어 있었다.

"항상 상대방을 눈앞에 그려! 생각없이 주먹 날리지 말고!"

지도 교사는 큰 소리로 학생들에게 외쳤다. 호전적인 성격과 더불어 가르치는 데에 재주가 있는 그는 학생 시절 종합격투기 선수로도 활동한 바 있었다. 누운 기술에도 익숙했지만 모든 격투기의 기초라 할 수 있는 권투의 매력에 빠져 수학 교사인 지금도 매일 트레이닝을 할 정도. 학생들이 안이해질 틈도 없이 지도를 계속하는 그에게 점차 강해지는 제자들을은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기쁨이었다.

서현과 희연. 수지는 문 밖에서 잠시 기다렸다. 끝나려면 이십분 이상 기다려야 함을 체크한 서현은 친구들에게 말했다.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두 사람은 공원에라도 가 있어. 끝나면 데리고 갈게."

"그, 그래? 희연아..우리 먼저.."

권투부의 박력에 약간 위축된 수지는 희연을 바라보았다. 유심히 셰도우 복싱 자세를 관찰하고 특히 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는 희연. 서현에게도 그런 모습이 의외로 다가온다. 그 모습이 너무나 진지했기에 수지는 먼저 가 있자는 말도 못 꺼내는 눈치. 곧 세 사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아챈 지도 교사는 문가로 걸어가 물어 보았다. 

"응? 너희, 무슨 일이냐?" 

"서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현이 한발짝 앞으로 나서며 답했다. 짐승 무리 중에서 가장 강한 수컷이 가족을 보호 하듯이. "그래. 알았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으니..들어와 앉아서 기다려라."교사는 선선히 승낙했다. 수지가 조금 겁이 나는 눈치여서 서현은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라고 말하려 했는데, 막 셰도우를 끝낸 이학년 학생이 서현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서희 쌍둥이 오빠야?"

운동부 특유의 약간 거친 느낌이 드는 목소리. 땀을 훔치던 서희의 눈동자에 약간 날이 서는 것과 서현이 대답하는 것은 거의 동시였다.

"예, 맞아요."

"여드름이 좀 나 있어서 그렇지 똑같이 생겼네. 너도 주먹 좀 쓰나?"

"싸우는 건 싫어해요."

"권투는 싸움이 아냐. 임마. 구경 온 김에 너도 한번 해볼래? 내가 상대해 줄테니까."

수지는 무서웠지만 친구에게 이상한 시비를 거는 게 싫었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서현아..그냥 가자.." 말한다. 그 초라한 목소리에 왠지 화가 나는 서현. 자신만만한 이학년 선배의 모습에 조금 기분이 나빠지는 참이었다. 지도교사는 서희에게 들은 대로 이런 식의 구경거리를 좋아하는 눈치였다. 사실 서희가 저지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서희는 운동 끝났을 때 하는 습관으로 머리를 풀어 헤쳤다. 선생님은 가볍게 손을 맞부딪히며 소리를 높인다.

"아, 괜히 시비걸지 마라. 오늘 운동은 여기까지.."

"저는 상관없습니다. 운동부 선배님 수준이 궁금하기도 하고요."

말을 꺼냈던 이학년은 입술을 실룩였다. 양아치 기질이 있어 사람에게 시비거는 게 일상이었는데 강하게 나오는 상대방과 싸우는 일도 잦았다. 다른 부원들도 서희의 오빠라는 말에 호기심이 드는 모습. 서현은 교복 상의를 벗고 받쳐 입은 티셔츠 차림으로 링에 오른다. 글러브를 끼고 있는 2학년은 씨익 웃으며 헤드 기어까지 장비했다.

"핸디캡으로 손 발을 다 써도 좋아. 내 몸에 한대라도 맞출 수 있다면 말이지."

"감사합니다."

서현은 글러브를 받았지만 잠깐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의외의 제안을 한다.

"저는 맨손으로 해도 될까요?"

권투부 부원들 사이에서 약간 소란이 일었다. 맨 주먹으로 권투를 한다는 건 상대에게 부상을 입힐 위험이 있지만 본인 역시 손을 보호할 수 없다. 싸움을 건 2학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고 지도 교사는 조금 크게 말했다.

"맨 주먹은 위험하다. 글러브를 끼도록 해."

"전 글러브를 끼는 게 더 위험합니다. 맨손으로 가격하진 않을테니 허락해 주세요."

"빨리 해보죠."상대는 어서 빨리 주먹을 날리고 싶다는 듯 가볍게 팔을 움직였다. 지도 교사는 선생님으로서 위험 부담을 질 수 없다는 생각보다 과연 서현이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한 눈치. "좋아. 해 봐라." 공이 울리고, 링 위에 선 두 소년은 서로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서, 서희야. 말려야 되는 거 아냐?"

수지는 서희의 어깨를 흔들며 다급하게 말했다. "너무 위험할 것 같아." 희연 역시 마찬가지. 서희는 오빠와 친하게 지내는 두 사람에게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지워지기 전, 링을 바라보던 이들 사이로 놀람에 찬 탄성이 흩어졌다. 서현은 주먹을 날리는 상대의 품에 파고들어 팔을 목에 건 상태로 중심을 이동시켰고, 2학년 학생은 그대로 링 위쪽으로 내던져졌다.

"칫...!"

2학년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던져진 상황에서 이미 자존심은 무너진 것과 마찬가지. 서현은 가벼이 손을 벌리며 은근하게 제안했다.

"이 정도에서 끝내는 게 어떨까요?"

"흐읏!"

탄력적으로 무릎을 뻗으며 돌진한다. 상대의 턱을 노리고 위력적인 어퍼컷을 날렸지만 가벼운 몸짓으로 회피하는 서현. 이번엔 발을 이용해 중심을 무너뜨리고 양 손으로 어깨를 강하게 민다. 또 한번 주저앉은 2학년은 실질적인 타격이 아니었다는 것에 더 큰 정신적 패배감을 느끼는 듯 싶었다. 바로 일어나 몇번이고 주먹을 날려 보았지만, 몇 합을 주고 받기도 못한 채 땅바닥을 뒹굴 따름이었다. 어째서 글러브를 거부했는지 알게 된 지도교사는 이미 서현에게 매료되는 기분이 든다. 유술의 원리를 완벽하게 파악하지 않고서야 저 정도로 타격 선수를 제압할 수 없었으니까.

"재미없군요."

상대가 녹초가 되어 쓰러지자 서현은 싸늘한 어조로 한 마디를 내뱉었다. 투지를 불태울 여력도 없는 2학년을 내버려 둔 채 링을 내려온다. "기다렸지. 미안."다시 교복 상의를 입고 희연과 수지에게로 돌아가는 모습은 그 것만으로도 권투부에 대한 도발과도 같았다. 지도 교사는 자기도 모르게 한쪽 손을 들어 소란이 일어나려 하는 권투부 부원들을 진정시킨다. "끝났으면 빨리 청소하고 집에 가죠."서희의 말이 그 침묵에 찬물을 끼얹었다. 서희에게 할 말이 있는 이들은 많았지만 그저 청소에 열중함으로 반감을 숨길 뿐. 서희가 서현과 희연. 수지와 함께 학교를 나설 때까지 지도 교사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서현아. 아까 정말 대단하더라!"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희연이었다. 훈련받은 권투 선수를 일방적으로 제압했던 아까의 모습을 떠올리면 많이 어색한 웃음을 짓는 서현.

"잘 아는 형이 무술에 능하거든. 어렸을 때부터 배운 거라 방법을 아는 것일 뿐이야."

"일대일로 열심히 배웠나 보구나?"

"조이고 꺾는 동작 배울 때 조금 아프긴 했어."

체조를 해서 운동에 대해 할 말이 많은 희연은 잇달아 여러가지를 물었다. 중심점을 잡아 던지는 기술.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이치에 대해 말할 때 서현 역시 목소리에 점점 활기가 돌았다. 약간 뒤에 있던 수지는 옆에서 함께 걷는 서희에게 말을 건다.

"서현이 참 대단해. 그런 기술을 가지고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어."

"나랑 싸우면 아마 오빠가 이길거야."

"저, 정말?"

수지는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서희의 강함은 이미 학교에서 정평이 나 있었으니까. 그런 서희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이 질 거라 말하는 건 놀랄만한 일이었다. 오늘 권투부에서 있던 일도 학교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킬 듯하고, 수지는 새삼 쌍둥이 남매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서현에게 유술을 가르쳐 준 이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바의 바텐더 은선. 서희 역시 어렸을 때부터 은선에게 실전식 중국 무술을 배운 바 있었다. 둘 다 운동에 보통 정도의 자질을 가진 것 뿐이었지만 익숙해질 때까지 호되게 훈련시켰다는 것 또한. 굳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여러가지로 놀란 수지를 가벼운 이야기로 풀어주는 서희였다. 오후의 짙은 하늘 아래를 거니는 사이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아파트 단지 옆의 좋은 위치에 문을 열고 있는 단풍나무 제과점. 앉아서 먹을 테이블이 여섯개 정도 준비되어 있는 베이커리 카페였다.

"다들 어서 와. 여기가 우리 제과점이야."

서현은 와..하고 작게 감탄했다. 테이블을 제외하면 제품이 있는 자리는 약간 작은 편이었지만 빵과 과자가 말 그대로 빼곡하게 들어서 있었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식빵은 마트의 대용량 벌크 제품과 비슷한 크기. 소보루, 단팥 같은 빵들도 혼자 다 먹기에 부담스러울 만큼 큼직해서 하나에 천원이라는 가격이 오히려 저렴하게 느껴진다. 재료를 아끼지 않고 맛있게 구워진 쿠키 종류도 이천 오백원부터. 컵케잌과 롤케잌. 카스테라 역시 아주 풍부한 종류가 진열되어 있었다. 멀지 않은 거리에 프렌차이즈 제과점이 몇군데 있었지만, 꾸준히 안정적인 매출을 올리는 만큼 제품의 질과 양은 제일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서현은 아까 링 위에서 보여줬던 모습과는 다른 아이같은 눈동자로 제과점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너무 멋있다. 수지야. 이렇게 좋은 제과점이 근처에 있는 줄은 몰랐어."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오빠랑 아버지가 열심히 일하셔서 그래. 아, 어머니도 늘 노력하시고."

"수지도 일을 돕는다고 동아리에서 말했잖아?"

"그렇긴 하지만..난 아직 학생이니까 자주는 못 도와드려..주말엔 간단한 작업을 같이 하긴 해.."

수지는 평소보다 더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제과점에 들어서면서부터 잇달아 감탄사를 말하는 희연과 서현의 모습에 왠지 기쁨을 느끼는 듯. 서희는 오는 길에 하나 샀던 선물용 과일주스 상자를 고쳐 잡았다. 오늘치 빵을 다 만들고 내일 아침에 구울 반죽을 준비하던 수지네 아버지와 오빠. 카운터를 보고 있던 어머니가 환하게 웃으며 걸어 나왔다.

"어서 와라. 수지야. 친구들 데려온 거야?"

"네. 새로 시작한 빙수를 같이 먹고 싶어서요."

"정말 잘했다. 다들 어서 오렴."

중학교 때부터 이 곳 제과점으로 친구를 데려온 건 드문 일이어선지 어머니는 눈에 띄게 기뻐하는 눈치였다. "안녕하세요. 같은 반 서희입니다. 이거.." 서희가 내밀 주스 상자를 받아들 때 수지네 어머니는 아주 기특하다는 듯 맑은 표정을 짓는다. "전 희연이라고 해요. 저랑 여기 서현이도 수지랑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이거..두고 쓰시면 좋을 거 같아서.."오는 중 몰래 뛰어가서 사온 핸드 크림을 내미는 희연. 친구들이 뭘 가져온 걸 보자 수지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귀여운 선물을 받아든 어머니에게 수지의 친구들은 어린 병아리 마냥 사랑스럽게 느껴진다. 

"정말 고맙다. 모두 가정교육을 아주 잘 받았구나. 어서 자리에 가서 앉으렴. 우리 제과점의 빙수를 대접할 테니까. 빵은 먹고 싶은 만큼 얼마든지 먹어도 돼."

테이블은 절반 정도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그 중 창가 자리를 골라 친구들을 앉게 한 수지는 일단 쟁반에 빵을 담아온다. 제일 먼저 단팥빵을 베어무는 희연. 서현은 소보루 빵을 반으로 찢었고 서희는 꽈배기 도넛을 집어 들었다. 우물거리는 와중 수지는 살짝 가슴이 두근거리고, 모두가 동시에 "맛있다."라고 말할 땐 설렘 가득한 기쁨을 느꼈다.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마음대로 가져 와." 

"진짜 그래도 돼?"

서희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고, 수지는 "그럼. 있는 거 다 먹어도 돼." 인심 좋게 답했다. "다 먹지는 못하겠지만.."쟁반과 집게를 들고 일어선 서희는 혼자서 먹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는 양의 빵을 담아왔다. 수지와 희연은 약간 놀란 듯 눈을 크게 떴고 서희는 겸연쩍어 볼을 살짝 긁었다.

"나..많이 먹거든."

"아, 걱정하지 마. 진짜 많이 먹어도 괜찮으니까. 생각보다 더 잘 먹는 것 같아서 조금 놀란거야."

"고마워."

서희는 도넛을 두개나 먹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적우적 빵을 밀어넣는다. 의외의 모습을 본 즐거움에 마주 보며 웃는 희연과 수지. 서희가 보기보다 대식가라는 걸 알고 있는 서현은 물 한잔을 떠와 동생 앞에 놓아 두었다. 망고와 딸기. 과일 퓨레가 올라가 있는 빙수 두 그릇이 앞에 나오자 집중되는 아이들의 관심. 다들 스푼을 들어 빙수를 떠 입으로 가져간다. 아까와 같은 약간의 정적. 혀 위의 얼음이 녹는 순간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웃음이 터져나왔다.

"진짜 맛있다."

"정말 맛있으면 웃음이 나온다는 말이 진짜였어."

서희는 쉴 새 없이 빙수를 떠 먹느라 말도 하지 않을 정도였다. 서현과 희연은 뭐가 그리 즐거운 계속 웃고 있었고 수지는 '오늘 친구들을 데려오길 정말 잘했어.'그렇게 생각했다. 수지네 가족들이 흐뭇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이들의 한 때는 추억이라는 사진첩에 끼워지고 있었다. 

"아..정말 맛있었어. 오늘 저녁은 안 먹어도 될 것 같아,"

희연이 살짝 배를 만지며 숨을 몰아쉬었다. 제과점을 나선 세 사람은 버스 정류장에서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건 희연 혼자였지만 오늘 먹었던 빵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즐거웠으니까. 곧 버스에 몸을 실은 희연은 창가에 앉아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서현과 서희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참 순수한 아이 같아."

먼저 입을 연건 서희였다. 서현 역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

"아는 게 무척 많은 것 같은데 드러내지 않는 듯해. 그러면서 때로는 무척 진지하고. 순진한게 아니라 순수하다는 말이 딱 맞는 애란 저런 걸 말하는 거겠지."

"그래..? 오빠 마음에 꽤 들었나 보네. 그런 말까지 하는 걸 보면."

"글쎄. 친구로 같이 지내기에 매력적인 아이 같긴 해. 외모도 아주 예쁘고 말야. 서희 너와 비교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

오빠인 서현과 달리 여드름이나 기미가 거의 없는 서희는 긴 생머리가 어우러져 정말 아름다운 외견이었다. 늘 자연스럽게 서희보다 예쁜 아이는 없어, 그렇게 말하는 서현이 그런 말을 했다는 건 희연이 정말 미인이라고 웅변하는 것과 같았다. 어머니의 가게를 향해 걷는 동안, 희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서현에겐 활기가 돌았다. 오빠가 다른 이에게 큰 관심을 보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서희로선 그 사실이 짙은 이질감으로 다가온다. 일단 친구로서 잘 지내고 있는 희연에게 적대감을 보일 일은 없었지만, 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약간 의구심 섞인 눈으로 오빠를 바라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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