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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Oct 17. 2023

잿빛 유리 글라스

6

마마의 얼굴은 밝았다. 희연의 아버지에겐 약간 심적 부담감을 주는 모습이었지만. '이렇게 젊은 어머니를 두고 있는 아이들이라면, 과연 아버지는 어떤 사람일까.' 어찌할 수 없는 의문과 딸아이에 대한 걱정이 점차 굳어져 갔다. 옆에 있는 친구와의 대화가 어려울 만큼. 어른의 관록은 그런 생각을 잘 접어가며 짧은 만남을 '다음에 만날 약속'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한 시간 정도 후 돌아온 아버지는 "희연이는 자나?"아내에게 물었다. 당연한 말을 굳이 하지 않는 남편이 그런 질문을 한 게 의아했지만 어머니는 "삼십분 전에 자려고 들어 갔어요." 자세하게 답했다.

"그래.."

살짝 방문을 연다. 곤하게 잠든 희연을 확인하고서야 거실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남편이 뭔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시간은 열한시. 남편은 생각하는게 있으면 잠을 제대로 못 이루는 성미였다. 희연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술은 안하셨죠? 차라도 한잔 드릴까요?"

"괜찮아..아니, 녹차로 한잔 줘."

정말로 어떤 생각에 매달려 있구나. 아내는 남편의 발치에 앉아 동그란 눈을 깜박이는 네로를 보다가 온수 포트에 전원을 넣었다. 향긋한 차 향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가라앉길 바라며 녹차와 팥이 들어있는 모나카를 내온다. 희연의 아버지는 차를 한 모금 마신 후 언제나 그렇듯 아내에게 마음을 털어놓았다.

"희연이가 학교에서 새로 사귄 친구 말인데.."

서현. 서희. 쌍둥이 남매에 대해선 희연의 어머니도 희연에게 들은 바 있었다. 둘 다 외견이 준수하고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한다고, 공부도 보통 수준으로 하면서, 운동을 했던 희연이 보기에도 체력이 뛰어나다는 말까지 한 적 있다. 그런 아이들이 술집을 운영하는 어머니 밑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무의식적으로 염려가 되는 건 어른으로서 당연한 것이었을까. 아내는 잠깐 생각을 하더니, 남편이 앉은 소파 옆에 앉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중년 남성의 손에 얹어지는 약간 짧고 통통한 손가락. 연애할 때부터 심신의 피로를 덜어주던 조용한 배려였다.

"나쁜 일을 한 것도 아닌데.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손님들이 취하지 않도록 조절하는 가게라면서 당신이 좋아했잖아요. 다음에 저도 함께 가봐요. 우리 희연이 친구의 어머니인 셈이잖아요. 저도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기도 하고요."

희연의 어머니는 조용하면서 사교성이 있는 편이었다. 희연이 체조를 할 때 함께 배우는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신경을 쓰면서 식사를 함께하거나 귀가를 도와준 적이 많다. 지금도 당시에 알게 된 아이 어머니들과 연락을 주고 받을 만큼. 그, 주 금요일 오후 여섯시. 희연이 친구들과 학교 독서실에서 공부한다는 문자를 받은 후 부부는 서현이네 가게 앞에서 만났다. 막 얼음과 과일 준비를 끝내고 오픈 하자마자 들어온 손님. 

"어서 오세요."

바 안에 이등병이 연상되는 차렷 자세로 서 있던 은선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살짝 웃으며 인사한 마마는 단골 중 한명인 희연 아버지를 바로 알아 보았다. 한번이라도 온 손님의 얼굴과 이름을 또렷이 기억한다고 말하듯이.

"어머. 오늘은 사모님이랑 같이 오셨네요,"

"처음 뵙겠어요. 남편이 아주 좋은 가게라고 해서 왔는데..인테리어가 참 깔끔하고 좋네요."

"감사합니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희연 어머니에게 마마의 밝은 미소가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아무리 봐도 삼십대 중반 정도로 밖에 안 보이는 얼굴. 남편이 말한대로 고등학교 자식들이 있다고는 도저히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럼에도 약간 애잔해 보이는 눈동자는 세상의 거친 면을 많이 보아왔다는 걸 드러내는 것 같다. 부담없는 은은한 조명과 장밋빛 바탕에 금빛 깃털이 수놓인 벽지는 청결한 분위기와 더불어 '술집'이라는 선입견을 걷어내고, 희연의 부모님은 지나치게 생각하는 걸 잠시 미루었다. 

"오늘은 운전을 안할 거니까 ..칵테일이 좋겠어."

"저도 같은 걸로 할게요. 너무 강하지 않은 걸로요."

"플레어 스타일의 마티니는 어떨까요? 멋진 커플 손님 앞에서 솜씨를 보이고 싶은데요."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가벼이 손목을 움직이는 은선. 장난스러우면서도 어쩐지 진지한 태도에 희연의 부모님은 동시에 웃음을 지었다. 딸의 친구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에 온 거지만,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으니 연애할 때의 달콤한 시간이 생각난다. "좋은 걸로 해줘요." 기다렸다는 듯 은선은 셰이커를 들었다. 플레어 바텐더라면 숙달되는 것이 선택이 아닌 의무인 화려한 저글링. 보틀과 셰이커를 능란하게 공중에 던지고 아슬아슬하게 받아드는 모습이 이어진다. 흡사 황제 앞에서 묘기를 선보이는 백금의 어릿광대처럼. 잠깐 과장된 연기를 하는 사이 부부 손님은 그 유려함에 탄성을 질렀다. 얼음이 녹아 맛이 떨어지기 전 바로 셰이커에 딸기와 과즙을 넣고 흔드는 작업을 하고, 은색으로 빛나는 촘촘한 금속 체에 걸러낸 후 동시에 두 잔을 낸다.

"스트로베리 보드카 마티니. 나왔습니다." 

표면에 떠 있는 얼음의 파편, 아이스 플레이크에 반사된 빛은 아름다울 정도였다. 환상에 이끌리듯 부부는 글라스를 가볍게 쥐었다. 미리 이야기한 것처럼 건배한 후 칵테일을 맛보는 사이, 삶은 계란을 반으로 잘라 체에 내린 노른자에 재료를 섞은 에그 스터프드가 나왔다. 파슬리 장식은 간결하지만 멋스러운 조화를 이룬다. 새콤달콤, 일반적인 마티니와는 전혀 다른 이색적인 맛에 매료되는 손님들을 바라보며 마마는 친절하게 말했다. 

"안주는 보기 좋은 부부 손님에게 드리는 서비스 입니다."

마마는 진심으로 부부가 함께 가게를 찾아준 걸 기뻐하는 것 같았다. 그 순수함이 살짝 의식을 꼬집는 것처럼 생각되는 가운데 희연의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아주 맛있군요. 제가 아는 마티니가 아닌 것 같아요."

"이런 칵테일이라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겠어요."

서비스로 나온 에그 스터프드를 입에 넣자 수제 마요네즈의 농후함과 고소함이 부드럽게 혀를 감싼다. 희연 아버지는 이전에도 자주 왔기에 마마의 요리솜씨가 무척 좋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미각돌기에 기쁨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세상에. 이 계란 요리 너무 맛있어요."진심으로 감탄하는 희연 어머니. 이어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은선과 마마는 점점 분주해 졌다. 희연 부모님은 찾아오기 전의 목적을 잊어버린 듯 진심으로 바에서의 시간을 즐긴다. 약 한 시간이 바쁘게 지나가고 손님들이 각자의 대화에 몰입할 때 즈음이었다. 희연 어머니는 마마를 불렀다.

"잠깐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길게 말하진 않을게요."

마마는 검은 색 스커트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 회사원 옷차림과는 다르지만 안정되고 단정한 인상을 준다. 어깨를 살짝 덮는 머리카락은 찰랑찰랑 윤이 나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찾아올 때만 해도 희연에게 들은 대로 '서현 학생 어머니 되시죠?'라고 말할 생각이었다. 술집을 운영하기엔 젊은 나이가 아닌가, 아이들은 몇살 때 낳은 건지. 남편은 어떤 사람이냐고. 대나무를 깎아 날을 세우듯 그런 질문을 하려 했다. 이전 남편을 안심시켰지만 내심 딸이 나쁜 친구를 사귄게 아닐까 불안했던 마음.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지려할 때 애써 웃음을 짓는다.

"서비스로 나온 계란 요리를 어떻게 만드는지 가르쳐 주실 수 있나요? 간단하게라도 좋으니까요."

'희연이에 대한 염려로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상처 입힐 수는 없어.' 희연의 부모님은 딸아이를 최우선으로 생각했지만 선입견에만 매달릴 만큼 속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이 친구 부모님이라고 가정사를 함부로 캐묻는 건 무례한 행동. "어렵지 않아요. 삶은 계란을 반으로 잘라 노른자에 마요네즈와 머스타드를 버무려서.."손님들을 대하느라 심적으로 피로할텐데 전혀 귀찮은 기색없이 답해주는 마마였다. 비록 지나치게 젊어 보이지만 악의나 가식을 찾아볼 수 없는 친절한 태도는 신뢰감을 준다. 부부는 체이서로 나온 탄산수로 입 안을 행구며 약 삼십분을, 처음 왔을 때를 합치면 두 시간을 머물렀다. 

"그만 일어나 볼까."

"그래요. 정말 잘 먹었어요. 마마. 나중에 또 올게요."

"얼마든지 환영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은선은 민첩하게 바 밖으로 나가 문을 직접 열어주었다. 대부분 바의 문은 갱들의 은신처라는 별명이 붙을만큼 두껍고 무거운 편. 처음 들어올 땐 뭔가 비밀스런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그렇기에 현실에 찌든 피로감을 벗어낼 수 있는 곳이었다. 희연의 부모님은 손을 꼭 감싸쥐고 연애 할 때의 달콤한 기억이 피어남을 느낀다. 걱정했던 마음은 마마의 미소와 친절한 태도로 거진 날아가 버렸다.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에게 웃어보일 때, 혼자 바로 걸어오던 서희가 그 모습을 보았다. 서희는 살짝 고개를 숙이고 희연 부모님을 스쳐 지나갔다. 관찰력과 분석력이 있어 사람을 잘 기억하는 소녀는 중년 남성이 아주 잠깐 얼굴을 본, 희연을 데리러 왔던 아버지라는 걸 눈치챘다. 처음 네 사람이 함께 공부한 날, 오빠와 함께 바에 왔을 때 자신들을 몰래 주시했다는 것까지 기억하자 썩 유쾌하지 못한 기분이 든다.

"어, 서희야. 오빠는?"

남매가 함께 오지 않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직 공부하고 있어요. 오래 앉아 있으니까 답답한 기분이 들어서 저 먼저 왔어요." 평소처럼 가장 자리가 아니라 은선과 어머니 서 있는 맞은 편 중앙 자리에 앉는 서희. 다른 손님들은 테이블에 앉아 있어 바에는 아무도 없었다. "먹을 것 좀 주세요." 말을 툭 던지는 서희. 오빠가 볶음밥을 해줄 때 기뻐했던 모습을 떠올리면 확연히 기분이 안 좋은 것 같다.

"방금 나간 부부 손님. 오빠가 학교에서 새로 알게 된 친구 부모님이세요."

"그랬구나."

감자 튀김을 한 웅큼씩 집어 입에 가져가는 서희에게 파인애플 쥬스를 따라주는 어머니. 아까 부부가, 특히 아내 쪽에서 하고 싶은 말이 있던 것 같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일 때문에 바빠 남매가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 행사에 참여한 적이 없는 어머니. 퇴폐 업소는 결코 아니었지만 혹여 안 좋은 소문이 돌까봐 불안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을 대해 온 경험으로 희연 부모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었고, 자신을 배려해 준 것에 고마운 마음까지 든다. 서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들이 무슨 이상한 말 같은 거 안 했어요?"

"전혀. 잘 먹었다고 기분 좋게 인사하고 가셨단다."

"그래. 남자 분은 자주 오시는 분이야. 여자 분도 우리 가게에 아주 만족하신 눈치였어."

은선은 경계심을 세우고 있는 서희를 풀어주려는 듯 끼어들었다. 감자 튀김 큰 접시를 반이나 먹어치운 서희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오기 전 희연과 수지. 두 사람과 공부하느라고 처음으로 동생이 먼저 돌아가겠다는 걸 막지 않은 오빠를 생각한다.

"오빠는 지금 친구들이 아주 마음에 드나 봐요."

서희의 목소리는 푸념에 가까웠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학교 생활에 전혀 의욕을 보이지 않던 오빠. 운동도 공부도 괜찮게 하 편이지만 아무하고도 친해지지 않았기에 주변 아이들에겐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란 말을 들을 따름이었다. 서희 역시 학교에서 제대로 대화하는 건 오빠 뿐이었고 고등학교 올라 와서도 그런 생활이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술집 아이라고 우리랑 같이 놀지 말라고 하는 거 아닐까요."

일부러 상처입으라고 하는 말. 대부분은 그렇게 받아들일 것 같다. 하지만 어머니는 딸의 목소리에 깔려있는 허무감을 알았다. 손을 내밀어 서희의 머리에 얹는 동작엔 깊은 애정이 배어 있었다.

"나에 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으신 것 같았지만..배려해 주신 눈치였어. 불안한 마음이 없진 않았을 텐데 감사한 마음이 들었단다. 서희 너도 너무 기분 나빠하지 않아도 괜찮아. 다음엔 내가 먼저 인사하고 싶었으니까."

"..알았어요. 어머니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도 경계하진 않을 게요."

"그래. 고맙다. 우리 딸."

감자 튀김을 싹 먹어치운 서희는 참고서를 꺼내들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앉았다. 오빠가 오기까지 시간을 채운다는 개념으로 하는 공부. 모녀의 모습을 처음부터 바라봤던 은선은 악의없는 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밀려오는 약간의 씁쓸함.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약간의 트러블이 있을 거라 예상은 했다. 이번엔 좋게 지나갔지만 아까의 부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 서현 남매가 어릴 때부터 거의 아버지 대신으로 생활을 챙겨준 은선이었다. 이전에 말한 대로 무술을 가르친 스승이기도 했고. 그날 근무를 모두 마친 후, 퇴근한 은선은 가게에서 한참 떨어진 유흥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둠이 서린 거리는 위험한 향취를 풍기고 있었다. 룸살롱과 단란주점. 그 밖에도 쾌락을 목적으로 하는 여러 가게가 성황이었다. 흡사 밤이 영원한 것처럼 느껴지는 거리에서, 천천히 걷는 은선에겐 그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만 여겨지는 듯했다. 술 취한 이들과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 사이를 몇번이나 지나쳤을까. 거들먹 거리며 걸어오던 한 불한당 한명이 은선에게 시선을 두었다. 크큭,하고 웃더니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부딪힌다.

"죄송합니다."

은선은 짧게 사과한 후 지나가려 했다. 이런 반응까지 예상한 것처럼 불한당은 은선의 앞을 가로 막았다. 덩치가 상당히 큰 편이라 보통 체격인 은선과 비교하면 머리 하나가 더 있는 모습. 입술을 씰룩이며 불량스럽게 지껄이기 시작한다.

"형씨. 미안하다면 다야? 성의를 보여야 할 거 아냐?"

"죄송해요. 지금 가진 돈이 없어서. 그리고 빨리 가봐야 합니다. 그만 보내주세요."

"지금 장난해!"

불한당은 버릇처럼 시비를 걸고 폭력으로 만사를 해결하는 전형적인 양아치였다. 주먹을 뒤로 확 끌어올렸다 내지르는 건 전형적인 삼류 싸운꿈의 움직임. 은선의 동체 시력은 프로 권투 선수와 동급 이상이었다. 상체를 가볍게 틀어 바보처럼 동작이 큰 공격을 흘려 버린 후, 한 걸음 내딛으며 강렬한 올려치기로 불한당의 턱을 가격한다. 은선으로선 무척이나 살살 쳤지만, 얻어 맞은 쪽은 턱을 움켜쥐며 바닥을 뒹구는 것이었다.

"아파, 아파! 아프다고 젠장..!"

제대로 들어간 공격이었다면 의식이 끊어졌을 노릇. 은선으로선 나름 배려를 한 것이었지만 당한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듯하다. 욕설을 토해내며 몸부림치던 불한당은 조금 고통이 덜해지자 침을 뱉으며 일어섰다. 어린 아이처럼 소리를 지른 것이 스스로에게도 한심하게 느껴진 듯했다.

"이 새끼..너 뭐하는 새끼야! 내가 누군지 알아! 넌 오늘 진짜 죽었어!"

사실 턱이 너무 아파 당장 달아나고 싶었지만, 은선의 체격과 조용한 태도에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단 착각이 든 모양이다. 그 모습에 짧게 한숨을 쉬는 은선. 불한당은 어지간히 멍청하여 그런 반응을 겁먹은 거라고 판단했다.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어서 지갑 열어 봐."

"어디 조직이냐."

"뭐? 이게 죽으려고 환장했나..어디서 반말이야?"

"묻잖아. 무슨 조직 소속이냐고."

"하! 넌 오늘 진짜 죽었어. 잠깐 기다려 이 자식아. 지금 당장.."

"영훈이 불러."

은선의 입에서 영훈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불한당의 얼굴에서 거짓말처럼 핏기가 싹 가셨다. 이 근방 유흥가의 거리 세력을 관리하는 조직 행동 대장 중 가장 악명높은 깡패였으니까. 불한당은 영훈보다 한참 지위가 아래인 잔챙이 폭력배일 뿐이었다. 자신은 감히 이름조차 담지 못하는 이를 아무렇지도 않게 언급하는 은선은 공포나 다름없는 노릇.

"영훈이 부르라는 말 안 들리냐."

목소리는 처음부터 아주 침착했다. 분노나 의문을 담지 않아 오히려 삭막하게 느껴진다, 불한당은 조금 뒷걸음질을 치는가 싶더니 바로 달아나 버렸다. 은선은 쯧, 하고 혀를 찬 후 "요즘 애들 관리 완전 개판이군." 중얼거렸다. 조직에서 중간 보스 정도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은선에겐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당장 영훈을 찾아가 뺨이라도 때리며 똑바로 하라고 채근할까 하다가 그냥 걸음을 옮긴다. 실행에 옮기면 아래 애들만 죽어나갈테고, 지금은 할 일이 있었으니까. 점점 거리의 안쪽으로 향하던 걸음이 멈춘 것은 한 사무실 건물 앞이었다. 이런 곳에 사무실 건물이 필요할까 싶은 의문이 감도는 곳. 건물 문을 여는 순간 두 사람의 시건이 은선을 찌르듯 날아들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답하는 은선에게 경비를 서고 있던 이들이 바로 고개를 숙인다.

"은현 형님 계시냐."

"오늘 일을 좀 하셔서 목을 좀 축이고 온다 하셨습니다."

"필요하시면 연락해 드리겠습니다."

"..됐어. 안에서 기다리겠어."

은선은 그냥 봐도 싸움에 잔뼈가 굵은 것이 분명한 이들을 아무렇지 않게 대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 그들은 대신 버튼을 눌러주고 고개를 한번 더 숙인 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은선이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섰을 때, 아까와는 다른 시선이 그를 맞이했다.

"아이고. 이게 누구야. 은선이 아니냐."

친근하게 말을 거는 이는 안경을 낀 한 중년 사내였다. 보라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얼핏 사람 좋은 동네 아저씨를 연상시킨다. 은선은 깍듯하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간 뵙지 못했습니다. 형님."

"그런 말이 어디 있냐. 이렇게 얼굴 보여줬으면 됐지.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이냐?"

"은현 형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형님. 이란 호칭에 중년 사내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떨떠름한 얼굴로 말을 잇는 모습은 조직폭력배치곤 꽤나 유해 보인다.

"아버지한테 형님 소리를 붙이는 경우가 어디 있냐?"

"은현 형님이 그렇게 불러도 상관없다 하셨습니다."

"그것 참..아무튼 은현 형님도 어지간하시다니까. 금방 오실테니...잠깐 나랑 말벗이나 해 다오."

중년 사내는 굳이 서 있으려하는 은선을 억지로 소파에 앉혔다. 나누는 이야기는 보통의 말이 오가는, 어찌 보면 공허한 대화였다. 최근 동향을 묻는 중년 사내에게 은선은 매일을 성실하게 지내는 일상을 단조롭게 대답할 뿐.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 사내는 사무실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이들에게 음료수라도 사오라고 시켰고,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 전 은선이 기다리던 이가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조직 보스 바로 밑인 세명의 주요 간부 중 하나인 은현. 오십대 나이에도 흡사 소년 같은 아우라가 맴도는 아름다운 외모였다. 키가 크고 약간 야읜 듯한 체격이었지만 날카로운 눈빛은 마주하기 두렵다는 인상을 준다. 은선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듯한 몸짓으로 인사했다.

"오랜 만에 뵙습니다. 형님."

"그래. 잘 지낸 것 같구나."

중년 사내는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라 하기엔 지나치게 형식적인 모습이 눈에 거슬리는 것 같았다. 마침 음료수 심부름을 보냈던 부하가 돌아왔고, 그는 은현과 은선 사이에 서며 나름 부드럽게 말했다.

"자, 자. 둘 다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마십시오. 일단 앉아서.."

"자넨 나가 있어."

"아니. 형님. 제 말은.."

"우리끼리의 일이야. 나가."

은현의 목소리는 꼭 쇠가 갈리는 것 같았다. 얼굴에 새겨진 약간의 주름으로는 감출 수 없는 용모였지만, 그 내면에 깔린 잔인성은 조직 안에서도 악명이 높았다. "오래 안 걸립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은선이 안심시킨 후에야 중년 사내는 방을 빠져나갔지만 신경이 쓰이는 눈치. 둘만 남게 되자 은선은 언제나 아버지를 대할 때 그랬듯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대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은현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잠시 동안 침묵이 흐르는 가 싶더니 담배를 입에 문다. 불을 붙여주길 기다리는 동작 없이 스스로 성냥을 켜 불을 붙이는데, 성냥 상자에 새겨진 선정적인 여자 사진이 그의 맑은 외모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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