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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Oct 17. 2023

잿빛 유리 글라스

7

"그 애들이 이제 중학생 쯤 되었나?"

"올해 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시간 잘 가는군."

은현은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아들인 은선이 자신을 조직의 윗사람으로만 대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걸까. "일어나라. 중간보스까지 되는 녀석이 그럴 것 없어. 앞으로는 내가 시킬 때만 무릎을 꿇으면 돼."은선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반듯한 자세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의 묘사를 생각하면 가정사가 삭막할 듯 싶지만 원망한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은현은 지갑을 꺼내었다. 초등학생 때의 서현 서희 남매의 사진을 빼내더니, 가져올 거라고 알고 있기라도 한 듯 은선이 건내는 쌍둥이의 최근 사진을 끼워 넣었다.

"사내 녀석은 피부가 왜 이 모양이야. 여자애는 예쁘기만 한데."

"아직 어리니까요, 서현이는 나이 들면 더 멋있어질 것 같습니다. 서희도 그렇고요. 누가 뭐래도 형님의 아이들이니까요."

아까 다른 간부가 언급했듯 은선은 은현의 아들이었다. 십대 때부터 어두운 세계를 살아왔던 은현은 조직에서 시키는 대로 결혼을 했고, 은선을 얻었다. 은선은 중학생 때부터 싸움 깡패로 거칠 것 없는 삶을 살았던 과거, 어머니는 자식과 남편에게서 미래를 볼 수 없음에 절망하여 행방을 감추었다. 그 사실이 큰 충격이 되어 은선은 배다른 동생이 되는 서현 서희 남매의 생활을 돌보아 주고 있었던 것. 쌍둥이 남매는 자신들의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있었다. 은현이 입에 물고 있던 담배는 그대로 타들어가 재가 되어 떨어진다. 

'먹고 살 돈은 줄테니까 편하게 살아도 좋아.'

'조직에서 관리하는 술집 하나를 맡겨주시면 아이들과 조용히 살고 싶습니다.'

'마음대로 해. 아이들에게 아버지 행세를 하진 않을 테니까.'

스무 살도 안 된 정부가 아이들을 낳은 후 했던 대화. 하지만 상념으로까지 이어지진 않는다. 은현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걸 느끼고 꾸벅 인사하는 은선. 등은 돌렸지만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이는 모습이 어쩐지 의미가 담긴 것처럼 보인다. 문을 나서기 전 확인하듯 한마디 묻는 것은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아이들 어머님에게 전하실 말씀은 없으신가요."

"없어. 너도 그만 가 봐라. 고맙다."

"알겠습니다."

아래 조직원들에게 깍듯한 인사를 받으며 건물을 나온 은선은 그간 바텐더로 사느라 잊고 있던 폭력배 시절 기분이 드는 걸 느꼈다. 은선은 비공식적으로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최악의 싸움 깡패 출신이었다. 바텐더 은선 만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알게 된다면 뼈마디가 얼어 붙을 것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은 현실. 그리고 지금 은선이 돌봐주는 남매들도 결국은 그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은선은 생각했다. 서희는 어릴 때부터 잔인하고 호전적이어서 무투파로 딱 어울렸다. 중학교 때 까지만 해도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고, 그러면서 심신 양쪽으로 강함이 깃들어 있는 서현에게 은현의 뒤를 잇게 할 계획이 있었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 친구를 사귀면서 예측이 조금 어긋났다. 오늘 왔던 부부 손님이 학교 친구의 부모님이라는 것도 신경쓰이는 일.

'아까 시비걸던 녀석이 무리라도 이끌고 와서 싸움 걸어주면 좋겠군.'

은선은 일부러 천천히 걸었다. 한참 힘을 과시하고 싶었던 십대 때는 거의 매일 밤거리를 걸으며 필요 이상으로 싸워대곤 했다. 걸어다닐 때부터 무술을 배운 것도 이유였지만 천성적으로 호전적이었으니까. 바텐더로서 성실하게 살아온 것도 몇년 되었다해도 과거의 기억을 흐릿하게 하기엔 역부족. 술과 담배 연기에 절여진 공기가 예리하게 영혼의 날을 세운다. 과연 은선의 욕구는 헛되지 않았다. "은선 형님." 아까 언급했던, 이 지역을 관리하는 싸움 깡패인 영훈이 앞길을 막아섰으니까. 거느리고 온 열 명의 부하들은 구십도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야쿠자가 인사하듯 무릎에 손을 얹고 몸을 조아리는 영훈. 은선의 앞을 막아섰던 불한당이 얼굴에 케찹을 들이부은 듯 피투성이가 되어 주저 앉아 있는 것을 보자, 은선은 피식하고 웃었다.

"아랫 것이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형님."

"그건 어떻게 알게 된 거냐."

"저 녀석이 형님께서 제 이름을 말한 걸 중간쯤 되는 애들에게 말했습니다. 무례를 범한 걸 저한테 전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해 봐. 세밀하게."

은선은 영훈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목소리에서 심기가 편하지 않다는 걸 느낀 영훈은 이제 무릎을 꿇고 고했다.

"처음 보는 자가 영훈이 형님을 언급했는데, 보통내기가 아닌 것 같아 달아났다고, 어떤 분인지 모르겠다며 인상착의를 설명했습니다."

"오호..그리고?"

"은선 형님께서 조직 사무실에 오셨다는 연락을 받고 거리에 오신 걸 알았습니다. 형님을 몰라본 아랫 것이 무례를 범한 걸로 추측하여 적당히 타일러 데려 왔습니다."

"알았어. 고개 들어."

영훈은 은선보다 두 살 더 많았다. 오랜 깡패 생활로 윗사람의 비위를 알아채는 건 도가 튼 상황. 은선을 올려다 보는 순간 흙발을 면상에 올려 놓으리라는 건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우리 영훈이, 요즘 편한 것 같다."

은선은 영훈의 얼굴에 얹어진 발에 딱 기분 나쁠 정도로 힘을 주었다. 그 모습에 아예 무릎을 꿇는 부하들. 아까의 불한당은 이미 두려움에 질려 이성적인 판단을 잃어버린 모습이었다. 영훈의 얼굴은 납으로 된 가면을 쓴 듯 감정이 드러나지 않고, 은선은 발을 들어 얼굴을 투욱 쳤다.

"시비 건 사람이 누군지 안 정도에서 끓어야지. 저렇게 피떡을 내놓으면 내가 미안하잖아."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조직 생활 끝나냐. 너 믿고 맡긴 형님들이 뭐라 생각하실까. 내 기분도 이렇게 별론데 말야."

"죄송합니다."

은선은 입술을 살짝 움직이더니, 큰 동작으로 영훈의 뺨을 갈겼다. 상처로 얽은 영춘의 얼굴에 움찔 떨리는 모습이 보이자 부하들은 일제히 이마를 지면에 대했다. 그리고 입을 맞추어 간청한다.

"용서해 주십시오. 형님." 

"저희가 똑바로 모시지 못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하아, 하고 잠시 숨을 몰아쉬는 은선. 눈 앞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신경에 거슬린다. 뼈마디를 뒤트는 가학 욕구를 어떻게든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는 눈치였다. 은선은 손바닥으로 영훈의 뺨을 툭툭 때렸다. 띡 기분 나쁘기에 알맞을 정도로.

"영훈아. 내가 말야..정말 이러고 싶지가 않아. 표정관리도 잘 하는 너한테 이래봤자 아랫 것들만 족칠 것이고. 진짜 싫단 말야."

"죄송합니다."

"그래..지금 네가 할 말이 그것 뿐이지."

은선은 몸을 일으켰다. "됐어. 긴장 풀어."짧게 말하고 손을 거두는 모습은 흡사 욕구를 진정시키는 살인자가 칼을 집어넣는 듯한 분위기. 깡패 무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수면에 떨림을 일으키듯 말을 풀어 놓는다.

"필요 없을 만큼 주먹질은 하지 마. 내 생각보다 저 녀석을 더 손봐준 게 기분 나빠서 그런 거니까."

"알겠습니다."

"나 간 다음에 애들 적당히 잡고."

"알겠습니다."

아까부터 전혀 표정변화가 없는 영훈. 상처에서부터 철가면 같은 얼굴 모두가 공포스러웠다. 그에 반해 특별히 거칠게 보일 것도 없는 은선이 영훈의 뺨을 가볍게 두드린 후 걸음을 옮긴다. 조직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된 이들은 영훈의 무서움에 질린 채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는 상황. 은선이 몸을 돌릴 때도 고개를 조아렸던 영훈은 한참 있어서야 고개를 들었다. 부하들을 쳐다보더니 "형님 하시는 말씀 들었지. 필요 없을 만큼 주먹질은 하지 마라."흡사 은선의 말투를 따라하듯 그대로 말했다. "가자. 다들 가게 단속, 애들 관리 잘 해라." 한 차례 피바람이 불거란 예상은 빗나갔다. 윗사람에게 절대 복종하는 성향의 영훈이었지만 은선이 보여준 기분 나쁜 접촉. 그런 요인들을 무시한 영훈의 조용함에 부하들은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려야 했다.

기말 고사가 끝난 시점의 학교로 주의를 기울인다. 고생한 만큼 점수가 나온 학생들도, 생각없이 노느라 성적에 관심이 없는 축, 그저 그렇게 시험을 치룬 이들에게 시간은 공평했다. 서현은 평균 팔십 오점. 서희는 팔십. 수지는 팔십 칠점. 희연은 몇 부분 실수해서 평균 98점이었다. 성적표를 받은 요리 연구부의 세 사람은가사 실습실에 모여 부활동이 시작되기 전 이야기를 나눈다.

"희연이 정말 대단하다..열심히 공부하는 건 알고 있지만.."

"수지도 잘 했으면서 뭘 그래."

"내가 제일 못 받았는데 그런 말들 하는 거 너무 하다."

서현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수지와 희연이 재미있어 하는 모습만 봐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처럼. 서희가 보았다면 배신감까지 느낄 만큼 밝은 느낌. 곧 담당 교사가 밝은 얼굴로 교실에 들어섰다. 분별력을 주겠다는 의도로 조금 어렵게 냈던 영어 시험. 희연은 백점.수지는 구십 오. 서현은 구십이점을 받았다. 평균 점수도 아주 좋다는 것까지 확인하자 새삼 가슴까지 뿌듯할 정도였다. 시험이 끝난 후 방학을 앞두고 처음 맞는 부활동 시간. 휘선은 언제나 처럼 조리법을 칠판에 적기 전 가볍게 박수를 쳤다.

"자, 얘들아. 오늘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이번 방학 중에 한식 조리사 자격증 시험이 있는데. 그동안 너희들이 해봤던 음식들이야. 혹시 도전해 보고 싶다면 말해보렴."

아이들은 잠깐 서로 눈치를 보았다. 그간 실습을 시험 규격에 맞춘 메뉴 위주로 했기에 어색하거나 어렵다는 느낌은 없다. 잠깐 생각을 하던 희연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공부와 운동. 부활동까지 모든 학교 생활에 적극적인 모범생 답다고 해야할까.

"저 해보고 싶어요."

"전 자신이 별로 없어서.."

소심하게 움츠러드는 수지. 서현은 자신감을 주듯 과장된 손동작을 하며 수지에게 말했다.

"우리 중에서 칼질을 제일 잘하는 게 수지 잖아. 한번 해보자. 그동안 많이 배우기도 했고.."

"그래도.."

"나도 해보고 싶어서 그래. 같이 하면 좋겠어."

"사실 부모님이 제과제빵 기능사 준비하면 어떻겠냐고 하셔서..하긴..그건 급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는 지 알고 있으니까..선생님. 저도 해 볼게요."

"그럼 세 사람 모두 도전하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니?"

"네."

"열심히 할게요."

"전 기능사 자격증 처음 해보는 거예요."

하고자 하는 열의가 엿보이는 학생들의 모습에 기쁨이 가득 차오른다. 되도록 내색하지 않으려 잠시 헛 기침을 한 후, 지금까지 실습했던 메뉴들을 칠판에 적기 시작했다.

"방학 때는 보름에 한번 부활동이 있으니까..난이도가 있는 어선과 칠절판 같은 걸로 연습하자. 필기 시험에 필요한 자료와 문제집은 내가 프린트해서 주마. 어디까지나 동아리 활동의 일환이니까 너무 긴장하거나 집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방학 전 마지막 시간이니 필수적으로 익혀야 하는 계란 지단을 해보자. 계란 많이 사왔으니 습관으로 만든다 생각하고 연습하는게 좋겠다."

다들 그동안 수업으로 계란 지단의 요령을 익힌 바 있지만 시험을 앞둔 마음으로 열심히 연습했다. 서현이 친구들과 함께 노력하는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을 때, 서희는 손에 밴디지만 감은 채 샌드백을 치고 있었다. 프로 선수도 3분간 미트치기후 1분 휴식이 상식이었지만, 서희는 최고 속도로 오분째 계속했다. 그럼에도 숨이 가쁘거나 기세가 약해지는 모습은 전혀 없다. 남녀 공학이지만 동아리 활동이 활발한 학교라서인지 여학생들도 꽤 보인다. 몇몇 학생들은 다이어트로 시작한 경우도 있었지만 서희의 혹독한 트레이닝에 감화되어 다들 진지하게 연습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

"자, 다들 몸을 데워놔라. 오분 후부터 스파링 시작한다."

담당교사의 지시에 학생들은 더 격하게 움직였다. 서희는 아예 3분 오십초 동안 무호흡으로 샌드백을 쳤다. 열일곱 소녀라 하기엔 공포스러울 만큼 빠르고 강한 주먹. 군기가 살벌한 고등학교 운동부였지만 2,3학년 중에도 서희를 쉽게 보는 이는 없었다. 스파링이 시작되고, 맨 마지막 순서인 서희는 팔짱을 낀 채 링 위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을 주시한다. 던지고 꺾는 기술에 능한 서현과 대조적으로 타격 기술에 익숙한 서희. 무술을 가르칠 때 은선은 오빠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지만 싸움에 능한 건 여동생이라고 판단했다.

'지루하군..'

서희는 하품이 나오려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인 예의로서 내색은 하지 않았다. 체력적으로 가장 왕성한 고등학교 권투부의 훈련도 이 열일곱 소녀에겐 아이들 놀이를 연상케 한다. 서희가 은선과의 대련에서 처음으로 무승부를 이룬 건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티브이에서 가끔 종합 격투기 시합을 보기도 했지만 모든 무술을 익힌 은선의 가르침은 문신처럼 육체에 새겨져 있다.

의자에 앉아 졸고 싶다는 생각까지 참아가며 기다린 끝에 마침내 다가온 스파링. 상대는 체급에서 10kg 정도 차이가 나는 2학년 선배였다.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지만 담당교사가 심하게 다치지는 않을 까 걱정하는건 오히려 2학년. 본인 역시 긴장이 되는지 해드 기어를 쓰는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서희는 발바닥을 지면에 붙이고 왼쪽 손을 앞으로 뻗었다. 권투라기 보단 공수도에 가까운 자세. 철저하게 학교에서 배운대로만 하던 평소와는 살짝 다른 느낌이었다. 얼핏 가드가 내려져 틈이 보인다. 2학년은 특기인 인파이트로 나가면 승산이 있다고 스스로 되뇌이며 대담하게 스탭을 내딛었다. 공격이 닿는 거리가 되는 순간 서희는 왼손을 힘껏 당기며 오른쪽 주먹을 내 뻗었다.

'이게 통하네.'

조금 지루하기도 했고, 반은 장난으로 링 위에서 정권지르기를 해본 거였다. 턱에 정확히 명중해 그대로 실신한 2학년을 내려다 보며 의외로 재미있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와 같았지만 권투부 교실을 가득 채운 학생들에겐 도전욕구를 불러일으킨 걸까. 서희는 줄넘기를 하듯 가볍게 뛰며 입을 열었다.

"오늘은 다섯 명까지 연속 스파링을 뛰고 싶어요."

"..그래. 알았다."

교사가 지시하기도 전 학생들은 손을 들거나 크게 "제가 하겠습니다!"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느껴지는 열기에 의욕이 박차를 가한다. 글러브에 싸여진 주먹을 느낌좋게 꽉 쥐어 보며, 서희는 단순한 논리로 지배되는 링 위에서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다. 다섯 명을 넘어 일곱명을 넉 다운 시킬 때까지 여력이 남아있을 만큼.

수지와 희연을 먼저 보내고 서희를 기다리는 서현. 괜히 시비 걸까봐 권투부 교실에 가지 않은 건 한참 되었다. 요리 연구부의 세 사람은 계란 지단을 한 팩씩 가지고 있었다. 다들 먹는 걸 귀하게 생각할 줄 알아 버려도 된다는 선생님의 말을 듣지 않고 싸왔던 것. 서희에게 해줄 볶음밥에 같이 넣으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앉아있던 서현이었다. 약간 더운 날씨였지만 바람이 불고 햇살이 좋아 마음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부활동 끝난 학생들이 산뜻한 기분으로 학교를 빠져나간다. 방송부에서 마무리 작업을 했던 희연의 오랜 친구, 소아도 그중 하나였다. 계산과 실리에 빨라 약간 영악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머리가 좋고 체조로 단련된 수준급의 체력. 교우 관계도 아주 넒어서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에는 친구들과 함께 있느라 심심할 여유도 없었다. 오늘은 모처럼 혼자 하교할 생각이었는데 서현을 보게 된 것.

"안녕."

소아는 가볍게 손을 들며 먼저 인사했다. 맑은 날씨에 취해있던 서현은 낯선 목소리에 의식을 두었고, 학교에서 유명한 소아가 자신에게 아는 체 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안녕."

"동생 기다려?"

"응. 맞아."

서현은 소아가 서희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 아무런 의문도 품지 않았다. 희연과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서희가 권투부의 유망주라는 건 잘 알려진 일이었으니까. 서현과 소아는 거의 교류가 없었지만 희연의 친구라는 사실은 지나친 거리감을 없애는 요인이었다. "실례."소아는 대뜸 서현의 옆자리에 앉았다. 당황해하는 기색이 없다는 게 마음에 드는 걸까. 소아는 서현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같은 중학교 나왔지?"

"응."

"난 네 이름도 고등학교 올라와서 알았지만."

"너 학교에서 유명했잖아. 난 너와 같은 반은 적이 없었어도 네 이름을 알 정도 였는 걸."

"칭찬으로 들을게."

소아는 희연 만큼은 아니었지만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약간 심술궂은 인상이지만 시원시원한 성격 탓에 그런 면은 많이 묻히는 느낌.

"요리 연구부는 재밌어? 선생님이 꽤 의욕을 불태우시는 것 같은데."

"나는 아주 좋아. 원래 요리를 자주 했는데 제대로 배우는 것 같아서. 희연이랑 수지를 알게 된 것도 좋고."

"요리를 자주 한 이유라도 있어?"

"어머니가 바쁘셔서."

서현은 고분고분 물어보는 대로 답했다. 두려움이나 어색함이 없는 태도가 소아의 마음에 드는 듯. "하나 먹어." 가방에서 스트로우 젤리를 하나 꺼내 건낸다. "고마워."바로 받아 먹는 서현.

"이거 매점에서 안 파는 거 같은데."

"아, 난 먹을 걸 가방에 늘 넣고 다녀. 볼래?"

소아는 가방을 열어 보았다. 칼로리 바와 방금 먹은 스트로우 젤리. 판 초콜릿과 감자칩까지 있었다. 교과서 무게도 있는데 간식도 한 가득이니 꽤나 무거울 것 같다. 군살 없이 날씬한 소아의 체격을 생각하면 의외로 여겨지는 듯.

"많이 먹나 봐?"

"내가 살이 잘 안 붙는 체질이거든. 희연이랑 체조할 땐 체력 관리 때문에 엄청 먹으면서 운동했어."

"내 동생이랑 비슷하네. 서희도 대식가라서."

주변에 친구가 끊이지 않는 소아와 요리 연구부를 제외하면 친구가 거의 없는 서현이지만 대화에 어색함이 없었다. 흡사 극과 극은 통한다는 격언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

"오늘은 왠일로 혼자 집에 가? 늘 친구들이랑 같이 있는 걸로 기억하는데."

"가끔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대신 너랑 이렇게 얘기하고 있잖아. 아참, 너도 운동했어? 이전에 권투부에서 유망주를 던져 버렸다면서."

"어렸을 때부터 배운 거야. 원리만 알면 쉬워."

"나도 운동해서 알아. 그 정도로 하려면 죽을 만큼 연습해야 한다는 거. 왜 운동부에 안 들었어? 유도부에 들면 서희처럼 잘 할 것 같은데 말야." 

"스포츠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 무술이나 체력 단련은 그냥 배운 거고..다른 사람하고 경쟁하는 건 별로야."

"하긴, 네가 남자애들이랑 농구하거나 축구하는 걸 본 적이 없는 것 같네."

소아는 다른 사람을 관찰하고 파악하는데 흥미가 있었다. 다른 아이들과 교우관계를 쌓지 않는 서현이 희연과 수지와 잘 지내는 것에 대해 알고 싶었고, 오늘 기회가 생긴 김에 말을 걸어본 것. 숨기는 기색이 없는 서현에게 좀 더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건낸다.

"희연이랑 수지를 좋아해?"

"응. 둘 다 좋은 친구야."

"친구라고만 생각하고 있구나."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친구가 없었거든. 요리 연구부에서 희연이랑 수지랑 함께 하는 게 즐거워."

서현에게 쑥쓰러워 하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아직까진 그냥 친구로만 생각하고 있군.' 자신의 감을 믿은 소아. 받는 만큼 주고, 주는 만큼 받아야 한다 생각하는 소아는 솔직하게 말해준 서현에게 그에 상응하는 이야기를 해 줘야 겠다고 판단했다.

"희연이는 어렸을 때부터 매사에 열심이었어. 체조 훈련하는 동안 아무리 힘들어도 못하겠다는 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거든. 다리 찢기 할 때 우는 건 통과 의례같은 건데, 난 희연이가 우는 거 못 봤어."

"말만 들어도 살벌하네. 티브이에서 보니 체조도 완전히 애들을 잡던데. 그런데 희연이라면 그랬을 거 같아."

"희연이네 부모님이랑 할머니가 친구들을 잘 챙겨주셔서 애들 사이에서 인기가 좋았는데 희연이도 마찬가지였지. 실력이 안 늘어서 힘들어 하는 애들한테 잘 할 수 있다고 말해주던게 기억 나. 선생님보다 희연이에게 의지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아..이젠 옛날 일이지만 괜히 그리워지네."

서현은 소아의 말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희연의 어린 시절을 상상했다. '희연이는 어렸을 때부터 주변 친구들과 잘 지내는 아이였구나.'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희연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의 친구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수지를 대할 때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두 사람과 함께 요리하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운가를 떠올리는 와중 어쩐지 가슴의 두근거림을 느낀다. 그런 마음에 생경함을 느끼는 사이 소아의 이야기를 잘 듣고 때로 맞장구를 쳐 주었다. 감정을 숨길 때 느껴지는 은근한 촉감을 진정시키면서.

그런 감정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희연은 집에 도착했을 때 현관에 할머니의 신발이 나와 있는 걸 보았다. "할머니!" 기쁨에 차 집안으로 뛰어드는 희연.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계시던 할머니는 와락 안겨드는 손녀를 안아 주었다.

"우리 손녀. 학교에서 공부 열심히 하고 왔니? 몇달 사이에 완전히 아가씨가 되었구나."

"오랜만이에요. 할머니. 잘 지내셨어요?"

"희연이 덕분에 아주 잘 지냈단다."

할머니는 손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고, 희연은 할머니의 볼에 입술을 대었다. 아주 옛날 부터 희연의 부모님이 바빠질 때마다 할머니는 한달 정도 집에 와 손녀를 봐주곤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방학이 끝날 때까지 함께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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