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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Oct 17. 2023

잿빛 유리 글라스

8

할머니는 일흔 나이치곤 무척이나 건강했다. 매사에 긍정적이고 감사할 줄 아는 성품은 주름살마저 아름답게 보여질 만큼 매력적이었다. 넉넉한 집안에서 태어나 젊었을 때부터 요리를 전문으로 배웠고, 은퇴하기 전까지 호텔 레스토랑에서 인정받는 요리사였다. 희연이 체조를 했을 때부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아 희연에겐 무척이나 친근했다. 그리고 돈버느라 바쁜 자식들을 조금이나마 돕고자 손주들을 잘 챙겨온 바 있었다.

"애플 파이 해 놨으니 씻고 와서 먹거라."

"정말요? 고마워요, 할머니!"

희연은 앉아있는 할머니를 옆에서 끌어안으며 발랄하게 웃었다. "그렇게나 좋으냐?" 전 내내 파이 생지를 밀었던 고단함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럼요. 할머니가 만든 애플 파이는 세계최고니까요!" "얼른 씻기나 하렴." 노래를 부르며 화장실에 들어가는 손녀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는 읽고 있던 책에 다시금 의식을 기울인다. 독서가인 할머니는 커피의 역사에 대한 책을 읽고 있었다. 아랍 권의 와인이라 불리며 물과 차 다음으로 활발히 거래되는 마술같은 음료, 식품에 대한 지식은 노년에 들어서도 그녀를 매혹시키고 있었다. 교복 타이를 편하게 푼 희연은 식탁에 앉았다. 나뭇잎 모습으로 완벽하게 구워낸 애플 파이. 아직 살짝 남아있는 온기에 행복마저 맴돈다. "잘 먹겠습니다." 붉은 소녀의 입술이 한입 베어 무는 순간, 이상적인 질감에 진한 사과 필링이 입 안을 채운다. 흔하게 사용되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럽다는 표현이 이렇게나 완벽하게 쓰일 수 있을까. 희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단숨에 반 이상을 먹었다.

"너무 맛있어요!"

"우유랑 같이 천천히 먹으렴."

"정말 완벽해요. 할머니. 몇 개만 냉동실에 넣어 두었다가 부활동에 가져가도 될까요? 친구들한테도 맛 보여 주고 싶어요. 할머니 자랑도 하구요."

"그 때 새로 만들어 줄 테니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먹어라."

"고마워요. 우리 할머니 최고!"

희연은 생글생글 웃으며 파이를 마저 먹었고, 할머니의 시선은 책에서 벗어나 손녀를 향해 있었다. 전화기라는 존재를 확실히 알게 된 다섯살 무렵부터, 희연은 할머니에게 매일 전화를 했다. 초등학생 때는 오후 여섯시. 중학교에 들어간 후에는 할머니가 잠자리에 드는 매일 밤 열시에. 별 내용이 있는 건 아니었다. 잘 지내세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렇게 통화가 끝날 때가 많았다. 때로 이야기가 이어질 때도 있었지만 몇분 안되는 시간. 십년 넘게 이어지는 동안 숨을 쉬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런 일상이 된 전화 통화였다. '고맙다고 말해야 하는 건 네가 아니고 나란다.'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기에 더욱 애틋한 마음. 현실을 인식한 건 희연이 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였다.

"방에서 민서가 자고 있을 거다."

막 문을 열려는 사이 희연은 멈칫했다. 그리고 조용한 동작으로 손잡이를 돌린다. 커다란 곰 인형과 중간 크기 토끼 인형이 놓여있는 침대. 일곱살 남자 아이가 곰 인형을 끌어안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단발 머리 길이 정도의 머리카락과 곱고 귀여운 인상인 탓에 하늘색 체크 무늬 남방과 짧은 청바지가 아니면 여자아이처럼 보이는 모습. 희연은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고 옷을 갈아 입었다. 곤한 잠에 빠져있는 사촌 동생, 민서를 깨우지 않고자 배려해준 것이었다. 문을 다시 닫고 거실로 나온 희연은 자신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발치에 앉았다.

"민서도 방학 했나 보네요."

"그래. 일주일 정도 되었단다. 혼자 할 수 있는 방학 숙제는 벌써 다 했어."

민서는 희연의 작은 고모의 외아들이었다. 엄마 아빠는 민서가 네 살때 이혼했고, 몇년 간 엄마와 단 둘이 살았지만 엄마가 재혼한 후 할머니에게 맡겨져 있는 아이. 일곱살 나이에도 외로움의 서슬에 깊게 베어져 있었다. 할머니는 책을 덮고 무릎에 올려진 손녀의 손 위로 주름진 손을 포갰다. 성숙하고 의지가 되는 희연과 눈을 맞추어 조용히 이야기한다.

"민서가 학교에 정을 잘 못 붙이고 있단다. 이전엔 친구들과 싸우고 선생님한테 연락 받은 적도 있어. 할미 혼자서 돌봐주기엔 무리가 있는 것 같아."

"아직 부모님이 생각날 테니까요. 방학 동안 우리집에 계실 거죠? 제가 같이 잘 지낼게요. 부모님이랑 같이 하는 숙제는 제가 같이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고맙다. 희연아."

열 살 차이는 사람의 성숙함을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는 세월. 하지만 일곱살과 열 일곱살은 생각이 다를 나이였다. 한껏 낮잠을 즐긴 민서는 의식에 묻어있는 졸음을 털어내며 방 밖으로 나왔다. 거실 바닥에서 다리를 백팔십도 찣은 자세로 턱과 복부를 지면에 댄 희연은 전혀 고통을 느끼지 않은 눈치. 민서가 환한 얼굴로 다가오자 희연 역시 밝게 웃어 보였다.

"안녕. 누나."

"반가워. 민서야. 그 동안 잘 지냈어?"

"누나 몸 오징어 같아. 하나도 안 아파?"

"그럼, 안 아프지."

민서의 순수한 태도 너머로 잘 지냈냐는 말에 대해선 대답하지 않음을 알아채는 희연. 아까 할머니에게 들은 대로 학교에 적응을 못하는 가 보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 희연은 분명 현명한 소녀였다.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을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설프게나마 다리 찢기를 따라하는 민서의 등을 살짝 눌러준다. 

"아, 아퍼. 누나."

"그래도 유연하네. 운동하면 잘 하겠다."

"나 운동 싫어. 애들하고 싸우게만 되니까."

민서의 목소리엔 불만과 짜증이 베어 있었다. 희연은 사촌 동생의 앞에 앉아 똑바로 눈을 맞추며, 그리고 웃는 얼굴로 질문했다.

"우리 착한 민서가 왜 친구들하고 싸울까?"

"나보고 내 멋대로만 하려고 한데. 난 공을 잡으면 다른 애들한테 안 주거든."

"친구한테 패스를 해야 팀이 이길 수 있잖아."

"난 그런 거 싫어. 내가 가진 건 내거야. 골을 내가 넣고 싶어. 다른 친구들 필요 없어."

희연은 책망하거나 꾸짖지 않고 민서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책에 시선을 두고 있지만 손자 손녀가 하는 말에 주의를 기울이는 할머니. 부모님과 멀어진 현실 때문에 자기 중심적이고 내 것에 집착하는 성향을 보이는 걸까. 할머니가 아직 건강하고 애정을 듬뿍 주고 있었지만, 일곱살 어린 아이의 마음에 새겨진 균열은 결코 얕지 않았다. 할머니의 애플 파이 하나를 다 먹은 민서는 심심함이 드는지 희연에게 매달렸다.

"누나. 우리 놀자."

"밖에 나가서 놀까? 놀이터 가는 건 어때?"

"학교 애들 만나기 싫어."

"싫은 게 있다고 해서 즐거움을 찾지 않을 순 없잖아."

"그런 거 몰라."

민서는 도리질을 치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억지로 끌고 가봤자 역효과 일테고. 집에서 놀아줄까 하다가 희연은 걸어서 이십분 거리인 수지네 제과점을 떠올렸다. 조금 먼 거리지만 지루해 하는 남자 아이의 에너지를 쓰게 하는데 괜찮을 것 같다. 가는 도중에 있는 마트를 구경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고, 할머니께 수지네 빵을 맛보여 드리고 싶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 누나랑 산책하고 올까?"

"걷는 건 좋아. 나 많이 걸어도 다리 안 아파."

"누나 친구네 빵집에 같이 가자. 민서 빙수 좋아해?"

"팥빙수 맛있어?"

"그럼. 과일 빙수도 있어. 누나가 사줄게."

"나 갈래."

민서는 곧 외출복으로 갈아 입고 양말을 신었다. 희연이 일어나기 전에 벌써 현관에서 발끝을 콩콩 찍으며 "빨리 가자."재촉하는 모습. 곧 사촌 남매는 손을 잡고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창 밖으로 작게 보이는 손주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할머니는 아려오는 가슴을 조용히 다독 거렸다. 수지네 빵집에 가는 동안 민서는 사촌 누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조금 빨리 걷거나 난간으로 뛰어오를 때조차 손을 놓지 않아, 희연은 중간중간 균형을 잡아야 했다. 체조로 균형감각이 단련되어 있는 게 다행이었지 보통 사람이라면 크게 넘어질 수도 있는 상황. 민서가 자꾸 위험하게 걷자 희연은 조용하게, 그리고 확고하게 말했다.

"민서야. 누나 옆에서 보통 속도로 걸어. 안 그러면 다시 집으로 갈 거야."

상가 건물 계단으로 뛰어오르려던 민서는 입을 꼭 다물고 얌전히 희연 옆으로 왔다. 희연이 상냥하지만 한번 말한 건 확실하게 행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잡은 손을 조금 세게 흔들어 대는 게 소심한 반항이었다. 빵집에 도착한 후 쟁반에 빵을 담을 때는 희연의 옷자락을 잡은 채로 "이거, 이거."하며 손으로 가리키곤 했다. 희연은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조절하려는 생각에 빵 세개만 담고 "빵은 이것만 먹자."확실하게 끊었다. 빵이 커다란 만큼 민서도 불만을 표하지 않는 눈치. 빵 포장을 돕고 있던 수지는 누나로서의 희연을 신선한 기분으로 바라봤다. 사촌 동생이라는 아이가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테이블에 앉을 때 마주보고 앉는 게 아니라 옆에 앉는다. 오기 전에 애플 파이를 먹었지만 민서는 와구와구 빵을 밀어 넣었다. 그러면서도 누나가 어디 가지나 않나 쳐다보곤 하는 건 불안한 심리의 작용.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희연은 수지에겐 인사만 하고는 자리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런 민서가 성가시게 여겨지지 않고 오히려 애틋한 마음을 가지는 희연.

"갈 때는 버스타고 갈까?"

"아니, 걸어가."

"알았어. 우유랑 같이 먹어. 목 막히겠다. 맛있어?"

"빵이 전부 되게 커. 그리고 맛있어. 빙수 언제 나와?"

"조금만 기다려."

수지는 집안 사정까진 알 수 없었지만 희연이 동생을 아주 잘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곧 나온 빙수를 직접 갖다 주고, 딸기 퓌레가 듬뿍 올라간 과일 빙수를 우와, 하고 바라보는 민서에게 살짝 웃어 보였다. 테이블을 채운 몇몇 손님들 중 아이를 데리고 온 엄마 손님들도 조금 보인다. 엄마끼리 이야기를 나눌 때 빵을 먹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살짝 훔쳐보는 민서. 옆에 앉아 있는 희연이 어떤 의지가 되는 가운데 '난 외톨이가 아냐.' 일곱살 아이가 하기엔 조금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다 먹고 계산을 할 때, 수지는 막대 초콜렛 하나를 서비스로 건냈다.

"괜찮아. 수지야. 우리 많이 먹었어."

"일부러 와준게 고마워서 주는 거야. 가는 길에 동생 먹으라고 해."

"그럼 고맙게 받을게. 민서야. 누나 친구한테 인사해야지?"

"감사합니다."

민서는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한 손으론 누나의 손을 꼭 잡고, 남은 손으로 막대 초콜렛을 받아 들면서. 수지가 점점 바빠지는 포장일에 주의를 기울이고 희연이 민서와 함께 집으로 돌아갈 때 서현은 어머니 가게에서 과일 준비를 돕고 있었다. 원래 주방일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요즘 들어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칼질에 열심이었다. 많은 요리에 쓰이는 양파를 자르는 속도는 은선이 놀랄만큼 빨라졌다. 무거운 맥주 상자를 척척 옮긴 서희는 술병을 닦고 있는 어머니에게 조용히 말했다.

"오빠가 한식 조리사 자격증 시험을 보기로 했대요." 

어머니는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술병을 내려놓고 손을 뻗어 서희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약간 토라진 듯한 딸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너희 나이 때에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건 의미있는 일이야. 엄마는 응원하고 싶어."

"오빠가 너무 요리에 빠지는 것 같아 불편해요."

"오빠가 만들어준 볶음밥을 제일 좋아하는 서희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 걸."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깊은 한숨을 내뱉는 서희. 사실 서희가 불편하게 생각하는 건 서현의 친구들이었다. 희연과 수지에게 미움을 품는 것보단 두 사람을 가까이 하는 서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걸 어머니는 알고 있다. 자식들이 수지와 희연에 대해 말한 것 만으로 서희를 비롯한 네 사람의 심리적 거리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폭력 조직이 관리하는 술집을 맡고 있는 건 그만큼 애달픈 과거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 마마는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는 고아원 출신이었다. 시설에서 고단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열 세살 때 뛰쳐나온 다음 부터 온갖 일자리를 전전하다 레스토랑의 막내로 수년을 고생했다. 그런 시간 동안 쌓이고 쌓인 지혜는 딸 서희의 마음을 투명히 들여다 보기에 충분한 것.

"오빠를 손에 쥐려고 하면 안돼. 누구나 자신의 방식 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거야. 엄마는 서현이가 친구를 사귀었다는 것 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니까."

"중학생 때처럼 조용히 있다가 졸업하길 바랬어요."

"서희는 권투를 시작했잖아. 방학 때도 매일 나가야 한다면서. 오빠를 이해하도록 노력해 보렴. 누구도 다른 사람의 결정을 무시할 권리는 없는 거야."

뭔가 말을 뱉으려던 서희는 어머니의 깊은 눈빛에 입을 다물었다. 말로 해서 어머니를 이긴 적은 한번도 없다. 안쪽에 쌓아놓은 맥주 상자를 공연히 한번 더 건드리며 기분을 숨기는 서희. 오늘 사용할 식재료 준비가 끝난 후에야 서현은 "서희야, 볶음밥 먹을거지?" 언제나처럼 물어 보았다. 서희는 약간 입술을 비죽거리며 퉁명스레 답했다.

"오늘은 떡볶이 먹고 싶어."

"떡..볶이? 주방에 흰떡은 없는데."

"내가 사올게."

"볶음밥 먹지 왜. 오늘 고급 생햄이 남아서 밥에 먹고 볶으면 맛있을 거야."

"싫어. 떡볶이 해줘. 시간 걸려도 좋으니까. 가서 떡만 사올 테니까 있는 재료로 해 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의 무거운 문을 열고 나가버리는 서희. 어머니와 은선. 서현 세사람은 문 쪽에 시선을 둔 채 잠시 조용히 있었다. 서희가 자기 멋대로 하는 건 기분이 안 좋을 때 뿐이었다. 최근 들어 보인 적 없는 모습에 가족들은 조금 걱정되는 눈치. 앞서 설명한 대로 쌍둥이 남매는 서로의 생각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서현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어린 아이처럼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제가 요리 동아리에서 새로 친구들을 사귄 게 서희는 마음에 들지 않나 봐요."

"같이 시험 공부도 하고 서희하고도 잘 지낸다고 하지 않았어?"

마마의 눈치를 보는 와중에도 은선이 조심스레 물어 보았다. 서현은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서희는 친구들을 싫어 하는 게 아니에요. 친구들과 함께 하는 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죠. 제가 고등학교 들어갈 때 생각한 것처럼 조용히 있다 졸업하기만을 바랬을 거예요."

은선은 양심 사이로 따끔하게 생채기가 생기는 걸 느꼈다. 남매는 별일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그건 은선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고, 서희에겐 중학 때부터 말했던 것이니까. 조직에서도 손에 꼽히는 간부 은현의 아이들. 배다른 동생들이 어두운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고 이미 심지를 굳힌 은선이었다. 친절하고 다정한 성격 밑에는 온갖 마이너스 감정이 은밀하게 깔려있다. 피바다라는 표현이 과장이 아닌 싸움터를 겪어오며 거침없이 살아온 은선. 쌍둥이 남매를 그런 아수라장으로 끌어 들이려 하는 뜻을 잘 알고 있는 어머니는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원하는 대로 해도 좋아. 서희 때문에 마음이 끌리는 곳을 외면하진 말아주렴. 엄마가 원하는 건 너희들이 학생시절을 즐겁게 보내는 것 뿐이니까."

얼핏 남매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듯한 말. 하지만 서현은 결국 성인이 되면 조직에 들어가야 함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은선이 지독스럽게 운동과 무술을 고집했던 이유. 그 사실을 거부하거나 두려워한 적은 없었다. 다만 요리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것과 수지와 희연에게 친구로 불리는 지금이 행복하게 느껴졌을 뿐. 

"서희가 떡 사올 때까지 재료를 준비해야 겠어요."

어머니와 은선에게서 달아나듯 다시 주방 안쪽으로 들어가는 서현. 양파와 양배추 남은 조각을 먹기 좋게 썰고 생햄과 닭고기를 손질한다. 주방 찬장에서 고추장과 간장, 고춧가루와 굴소스. 설탕을 꺼내 양념장을 만드는 손길이 아주 빨랐다. 얼굴 전체를 덮고 있는 의기소침함을 감추려는 듯이.

"떡 사왔어."

무뚝뚝한 얼굴로 돌아온 서희. 떡볶이 떡 한봉지를 봉투도 없이 덜렁덜렁 들고온 모양이다. "이리 줘." 서현은 떡을 한번 씻어서 미리 끓여놓은 물에 넣었다. 오늘의 첫손님이 들어올 때 즈음 떡은 말랑하게 익었고 다음까지는 간단했다. 재료를 강한 불에서 볶은 후 매콤 달콤하게 만들어온 양념장을 끼얹는다. 닭고기 조각이 다 익은 걸 기점으로 떡을 넣고, 물로 되기를 조절하자 빨간 양념이 입맛을 돋우는 떡볶이가 완성됐다. 늘 해왔든 웃는 얼굴로 서희에게 건네주는 건 조금 어려운 걸까. 사기그릇에 담은 떡볶이를 앞에 놓아줄 때 서현은 조금 지친 모습이었다. "잘 먹을게."그 이유를 알고 있는 서희. 혀에 닿는 빨간 떡은 강한 매운맛과 은은한 단맛이 아주 잘 어우러져 있었다. 대식가 답게 금방 그릇을 비우고, "아주 맛있었어." 별로 기분 좋지 않은 표정으로 말했다. 남매가 바에 오는 이유. 어머니에게 저녁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충족시킨 남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따라 이른 시간에 손님들이 곧잘 오는 것도 이유였지만 서로에게 할 말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어머니.

집까지 걸어가는 동안 서현이 앞서 걸었다. 평소와 별 차이 없는 모습이지만 실 위에 날붙이를 은근히 드리우는 듯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두 사람 중 자기 주장이 강한 서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요리 연구부 그만 하고 나랑 같이 권투하자."

"싫어."

서희의 미간에 균열이 패여졌다. 늘 수동적인 모습을 보이는 오빠가 즉시 거절을 말했다. 예상한 대로 일이 흘러가지 않으면 쉽게 반감을 가질 나이. 단정하게 틀어 올린 서희의 머리카락이 떠오르는 듯한 착각이 생긴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오랜만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 앞서 걷고 있었지만 서현은 동생의 기분을 알았다. 이전에 말했듯 둘은 마음까지 쌍둥이였으니까. 화가 나다 못해 어이가 없어 말이 안나오는 서희에게 차갑게 말했다.

"어차피 성인이 되면 지겹도록 싸워야 할텐데. 학생 때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어."

"여자애들이랑 소꿉 놀이하는게 그렇게 재미있는 거야."

"진딧물 같은 약골들하고 싸움 놀이하는 것보단 유익하다고 생각해."

빈정대는 어투가 아니라 극히 침착한 목소리. 서희는 오빠가 속내를 날것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을 알았다. 더 이상 이야기는 이어지지 않았고, 집에 갈 때까지 침묵이 계속되었다. 의외로 오빠를 주먹으로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이 안 드는 서희. 기술적으론 서현이 월등하지만 서희의 기초 체력을 생각하면 싸움이 될 법도 했다. 분노의 밑바닥에는 애정이 깔려 있다. 자신을 향한 것이든 타인에게 그어진 형태이든. 집안에 들어 와 각자의 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는 동안 공기는 고요에 젖어 있었다. 오늘 방학을 했지만 둘 다 거실 탁자에 앉아 숙제를 펼쳤다. 사각거리는 샤프 소리만이 거실을 간질이기 시작한다. 아홉시 반이 될 때까지 쌍둥이는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숙제에만 열중했고, 서현이 먼저 노트를 닫았다.

"난 그만 방에 들어 갈게."

"그래."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냉정하게 방문을 닫아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지만, 서현은 문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서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서희. 어떤 대화를 주고받던, 서로에게 상처를 주거나 위로해 주었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이 쌍둥이 남매에게 가장 소중한 건 바로 서로라는 것. 

"미안해."

먼저 사과한 건 서현이었다. 예상하고 있었는지 서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미안해. 내가 말이 너무 심했어." 둘 다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진심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서현은 노트를 방에 갖다 놓은 후 주방으로 향했다. 티 포트에 물을 올리고 믹스커피 두 봉투를 뜯어 잔에 넣었다. 서희가 먹을 율무차도 준비하고 바삭한 비스켓을 그릇에 얹는다. 서희는 숙제 노트를 한쪽으로 밀어 놓았고 서현은 다과상을 테이블에 놓았다. 대화가 필요할 때마다 늘 준비하는 상차림. 남매는 각자의 잔을 들고 가볍게 입술을 적시다. 집에 오는 길에 오간 싸늘한 대화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비스킷을 두개 입에 넣어 우물거린 후 목으로 넘기고 나서 서희가 이야기를 꺼낸다.

"오빠가 중학교 때랑 너무 달라진 것 같아서 조금 마음이 안 좋았어."

"나도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이렇게 변할 거라곤 생각 못 했는걸."

서현의 중학교 생활은 말 그대로 삭막했다. 친구를 사귀기는 커녕 서희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과는 제대로 얘기해 본 적도 없었고, 방과 후엔 공부를 하거나 은선이 원하는 대로 몸을 단련하는게 전부였으니까. 서희 역시 마찬가지. 그땐 운동부에도 속하지 않아서 학교에서 말을 한게 언젠가 싶을 만큼 조용하게 살았었다. 서희는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쥐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희연이와 수지 때문에 오빠가 변한 건 알아. 아깐 말을 심하게 했지만 나도 그 두 사람이 싫지 않아. 그건 알았으면 해."

"요리 동아리에 들게 된 건 나도 의도하지 않은 일인건. 하지만 정말 즐거워. 서희가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이해해 줬으면 싶어."

"우리는 성인이 되면 조직에 들어가야 해."

조금 무섭고, 반은 포기하는 심정으로 중요한 얘기를 꺼내 놓는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는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없었다. 다만 자신들이 어둠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은선을 통해 알고 있다. 학교에서 싸움을 하거나 불량하게 행동하는 등의 치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냉엄한 현실. 무엇보다 남매를 사랑하는 어머니조차도 그 사실에 거역할 수 없었다. 서현은 동생이 불안할 만큼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느꼈다. 더 이상 고등학교 생활에 정을 붙이면 미래가 힘들어지지 않을까. 서현은 손을 뻗어 서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을 거부하지 않는 서희. 항시 침착한 동생은 가족 외에는 아무도 본적이 없는, 울 것 같은 얼굴로 오빠를 보고 있었다. 서현은 조금 슬픈 웃음을 지으며 자상하게 서희를 달래 주었다.

"걱정하지 마.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만 지금의 생활을 누리고 싶을 뿐이니까. 그 다음엔 조직에 들어가도 상관없어. 서희는 나에 대해 알고 있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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