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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현 Oct 17. 2023

잿빛 유리 글라스

10

서현은 가지고 다니는 손수건으로 민서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끅끅거리며 딸꾹질을 하는 민서를 안심시키려는 듯 한 손을 어깨에 올린 채로. 희연이 다가오자 헝클어져 있던 의식이 조금 진정이 되는지 토악질이 수그러든다.

"민서야. 괜찮아? 누나 여기 있어. 걱정하지 마."

"아, 아무렇지도 않아. 정말이야. 나 괜찮아."

민서의 목소리엔 두려움이 짙게 베어 있었다. 수지도 걱정스러운 눈을 하며 다가오고 지도 교사는 냄비를 올려 놓은 가스렌지의 벨브를 잠갔다. 자신을 걱정하는 이들이 많아지자 어느새 안심이 되는 듯했다. 구토를 했지만 옷에 약간 묻은 정도로 손수건으로 잘 닦아 내니 옷을 갈아 입을 필요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민서는 애니메이션을 본 게 옛 기억을 불러 일으켰다고는 끝까지 말하지 않았다.

"누나 하던 거 마저 해. 나 갈비 먹고 싶어."

"괜찮겠어? 그만 집에 가도 상관없어. 민서가 하자는 대로 할게."

"아니야. 나 진짜 괜찮아. 누나가 만든 거 먹기로 했잖아. 여기 앉아 있을거야."

나름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하는 민서. 분위기가 조금 진정되자 휘선은 다시금 렌지에 불을 붙였다. 반쯤 익은 갈비 냄비에 감자, 당근을 넣고 조리는 과정 동안 민서가 또 이상 행동을 보이지 않는지 살피면서. 수지와 서현도 양파와 홍고추를 넣어 익히는 사이 조금은 희연의 눈치를 보게 된다. 희연은 내색하지 않고 한번 끊어진 분위기를 잇고자 질문을 하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말을 걸곤 했다.

"다 되었구나."

먹음직스럽게 완성된 갈비찜. 세 명이 각자 따로 했지만 교사의 지도에 따라 움직였기에 다들 비슷한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합격점은 될거야."휘선은 가벼이 박수를 치며 아이들에게 말한다. 민서에게 와도 된다고 손짓하는 희연. 누나의 부름에 쪼르르 다가오는 민서는 누가 봐도 귀여운 아이였다. 젓가락을 들어 갈비 고기를 한입에 쏙 넣는 모습에 아까의 흔적 따윈 없다. 그제야 수지와 서현의 긴장이 누그러 들었고, 휘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우리 할머니가 만든 애플 파이인데..맛보여 주고 싶어서 가져왔어."

희연이 꺼낸 애플 파이는 빛깔과 모양 만으로도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수지는 "할머니께서 빵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계신 거야?"하고 놀랄 정도. 오랫동안 호텔 레스토랑에서 근무했다는 설명이 서현도 납득시킨다. "진짜 맛있어 보인다. 서희랑 같이 먹어볼게." 하나를 받아든 휘선 역시 고맙다 말했는데, 아주 약간이지만 민서의 존재를 신경쓰는 듯했다.

집에 돌아가는 동안 민서는 희연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아까 왜 토악질을 했는지 물어보지 않는 누나가 고맙게 느껴지는 걸까. 자리에 앉아서도 손을 잡은 채 희연을 줄곧 올려다 본다. 집에 와서는 조금 지친 듯 방에 들어가 잠이 들었는데, 확실히 잠들 건 확인한 후 희연은 할머니에게 물었다.

"오늘 민서가 갑자기 구토를 했어요.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아세요..?"

조심스러운 희연의 태도에 할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가 그 사실을 알게 된건 오늘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컴퓨터로 만화를 틀어주고 주방일을 하고 있었는데, 한창 바쁘게 움직이다 돌아다 본 민서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토악질을 하고 있었다. 잔뜩 겁먹은 얼굴로 손끝을 떨면서 "엄마..아빠..엄마..아빠.."계속 해서 되뇌이는 민서를 할머니는 꼭 안아 주었다. 그 후에도 몇번 비슷한 일이 생겼음을 되뇌이며 말한다 "혼자 있을 때 불안감이 심해지는 모습을 보이는 것 같더구나." 그 말을 들은 희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문다. 선의의 뜻을 담아 교사가 만화를 틀어준 걸 탓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민서의 상태에 대해서 할머니에게 자세히 물어보지 않은 자신에게 화가 날 뿐. 생활 습관이 된 고강도 유연운동을 할 때, 할머니의 손녀의 눈에 분명한 분노가 어려 있는 걸 보았다. 철없이 아이를 가진 막내 딸은 이혼한 후 가족들과 연을 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현 남편과 함께 거리낄 것 없이 즐기며 산다고 들었을 때, 쓸쓸함이 몸에 베어 버린 민서가 가엾게 느껴질 뿐이었다. 민서 엄마가 희연의 반만큼 만이라도 아이를 사랑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진 않았을 텐데. 눈 밑이 아득하게 젖어드는 사이 그저 손자를 위해 기도할 뿐이었다.

여름의 태양을 닮은 고등학생들의 시간이 푸른 빛으로 흘러간다. 숙제를 모두 마치고 여유있게 하루 하루를 즐기거나, 막바지에 몰아서 하느라 시간을 재는 경우든 싱그러운 바람과 맑게 내리쬐는 햇살과 함께 한다. 개학을 일주일 앞둔 시점. 서현 서희 남매는 학교 방향으로 가는 시민 공원에 있었다. 요리 연구부의 세 사람은 방학 기간에 치러진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따는 것에 두 성공했고, 교사 휘선은 임용고시에 합격했을 때보다 더 기뻐했다. 이미 숙제를 다 끝낸 남매는 여유를 가지고 희연의 부름에 답했다. 둘 다 운동하기에 편한 차림. 햇살이 심하지 않고 바람이 은근히 불어 와 이상적일 만큼 시원한 날씨였다. 곧 민서와 함께 공원에 도착한 희연은 친구에게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나와줘서 고마워. 얘들아."

"안녕하세요. 예쁜 누나. 잘 생긴 형."

얇은 여름용 츄리닝을 입은 민서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서현은 "그래, 고마워."유쾌하게 웃었고 "잘 지냈니..?"왠지 어색하게 인사하는 서희였다. 희연이 남매를 부른 건 민서의 여름 방학 숙제인 줄넘기와 제기 차기를 함께 해달라는 부탁에 의해서. 지루할 만큼 심심한 시간을 보내던 서현으로선 환영이었고 서희는 민서를 볼 수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오전 권투부 훈련을 마친 후 시간을 내었다. 흔쾌히 허락해준 친구들을 위해 할머니와 함께 만든 과일 스무디를 가져온 희연. 백팩에서 새로 산 줄넘기와 제기를 꺼낼 때 민서는 깡총깡총 뛰며 좋아했다.

"내가 같이 해주는 걸로도 괜찮겠지만..두 사람 다 운동을 아주 잘 하니까. 스포츠에는 다양성이 있어야 좋거든."

어렸을 때부터 체조를 한 희연의 신체 능력은 보통 고교생의체력은 훌쩍 뛰어넘을 만큼 선수 급이었다. 학교에서 유명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가끔 체육 시간에 보이는 운동 실력은 익히 알려진 바 있다. 권투 트레이닝에 필수적인 줄넘기는 서희에겐 익숙했다. 의식적으로 스탭을 밟으며 오늘 훈련을 마친 피로감을 털어낸다. 그사이 짧은 어린이용 줄넘기를 든 민서는 초롱초롱 기대감에 가득 차 예쁜 누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럼..나 먼저 해 볼게."

가볍게 줄넘기를 시작하는 서희. 세번 정도 넘은 후, 바로 이단 뛰기로 전향. 줄 돌아가는 소리가 살짝 무섭게 느껴질 만큼 빠르게 뛰어넘는다. 뛰는 높이를 정확히 맞추며 하체를 살짝 들어올리는 동작은 이단 뛰기의 정석 그 자체였다. 근육 운동으로 단련된 팔은 피로감을 모르는 것일까. 50회가 넘어가도록 서희의 자세는 전혀 흐트러 지지 않았다. 본인은 평소보다 약간 느리게 했지만.

"예쁜 누나 되게 잘한다."

민서는 우와, 하고 입을 벌리며 감탄했다. 너무 대충 했나 싶은 서희였지만 귀여운 남자애의 탄성에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는 기분.

"허리는 곧게 펴고. 줄을 돌리는 손을 조금 빠르게 해봐. 무릎이 높이 올라가면 효과가 없으니 조심하고."

"이렇게요?"

보통의 줄넘기를 무난하게 해내는 민서는 방금 보았던 서희의 이단 뛰기를 적극적으로 시도했다. 처음엔 발등에 줄이 걸렸지만, 그래도 두번 정도 이단 뛰기가 되었다. "손에 좀 더 힘을 줘서 돌려. 줄이 두 번 돌아갈 동안 발이 떠 있어야 해." 서희는 팔과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설명했다. 명 선수는 타인을 가르치기 힘들어 하는 성향이 있지만 서희에겐 예외인 듯. 몇번 지적과 조언을 받은 민서는 본인도 신기할 만큼 이단 뛰기를 열번 정도 반복했다.

"운동에 소질이 있구나. 아주 잘 하네."

서희는 평소답지 않게 정말로 감탄했다.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민서는 몇 번씩 줄넘기를 반복하고, 희연과 서현은 각자의 동생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이십분 정도 줄넘기 연습을 하고 제기 차기를 할 땐 서현이 먼저 나섰다. 서희가 타고난 기초체력을 이용해 운동을 한다면 서현은 오랜 연습으로 운동의 원리를 습득한 타입. 제기를 살짝 던진 후 가볍게 차기 시작한다. 경쾌한 소리와 더불어 양발을 교대로 스무번 정도 차 올리는 동안 전혀 어려워 하는 기색이 없었다. 

"다리에 힘을 빼는 게 중요해. 신발 밑면으로 때린다는 느낌으로, 되도록 중앙을 향해 차 올린다고 생각해봐."

보기엔 쉬워 보이지만 막상 해 보면 의외로 어려운 제기차기. 민서 역시 줄넘기만큼 잘 해내진 못했다. 그래도 싫증 내지 않고 서현의 지시에 따라 꾸준하게 시도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처음으로 리듬 체조를 배울 때가 생각나는 희연. 잘 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몸 관리에 자신감을 가지고 가벼이 손끝 발끝을 움직인다.

"민서야. 누나가 하는 거 한번 봐봐." 

희연은 제기를 머리 위로 높이 띄웠다. 지면에 손을 대면서 그대로 앞 돌기를 하고, 자세를 바로잡기 전 제기는 등 쪽으로 내려앉았다. 뒤로 차올린 다리가 완전히 휘어져 허리에 붙을 것 같은 모습은 체조 선수 특유의 유연성을 증명한다. 이어 제기를 자연스레 다루며 유려한 움직임을 이어간다. 볼 연기를 떠올리는 사이 온 몸으로 제기를 던지고 받는 동작에 어색함이나 뻣뻣함 따위 발을 디딜 수 없다. 민서는 자기도 모르게 박수를 치며 누나의 움직임에서 눈을 때지 못했고, 서현과 서희 역시 올림픽 경기 중계에서나 볼 법한 고난이도 동작에 의식을 빼았긴다. 희연이 어렸을 때부터 체조를 했다는 말만 들은 서현은 막연한 상상이 백지화 됨을 느꼈다. 약 이분 정도 시간이 흐른 뒤, 희연은 하늘 높이 던진 제기를 물구나무 서며 받아내는 것으로 연기를 마쳤다.

"정말 대단하다. 희연아."

"체조 그만 둔지 일년 넘은 거 맞아? 프로 선수 못지 않은 것 같아."

남매의 질문에 희연은 웃음으로 답했다. "제기 차기와는 아무 관계없는 동작이었잖아. 보여줄 만한게 있을까 하다가 해 봤어," 농담처럼 들리지만 사실 진심이었다. 체조 선수의 꿈은 멀어졌지만 생활 습관은 과연 정직했다. 다리를 완전히 찢은 상태로 배를 지면에 붙인 채로 집에서 공부를 하며, 물구나무 선 채로 책을 읽는 등 희연에게 운동은 곧 삶이었다. 감탄조차 못하고 웃고 있는 민서, "자, 이제 형이랑 제기차기 다시 연습해. 누나들은 스무디랑 같이 먹으면 좋은 걸 좀 사올게." 희연과 서희는 자리를 뒤로 했고, 다시금 제기를 연습하는 민서와 서현이 남았다. 오늘 약속을 잡으면서 서현에게 문자를 하나 보낸 희연. 친구로서 신뢰감이 없다면 말하기 힘든 내용을 확인한 서현은 승낙한다고 답했고, 이제 그 부탁을 들어 줄 차례였다. 십분 정도 민서가 살짝 지칠 때까지 연습을 시키고 "조금만 쉬자."공원 의자에 나란히 앉는다.

"목 마르지? 가지고 온 스무디 먼저 마실래?"

"아뇨. 누나들 오면 같이 먹을래요."

"그래. 그러자."

서현은 사교성이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파악하고 행동의 원인을 분석하는 훈련을 받았다. 이복 형 은선에게서 배운 기술로 조용한 중학생 시절엔 같은 반 아이들 전부를 꿰뚫어 볼 만큼 은밀한 특기였다. 서현이 그 정도로 심리학에 익숙한 줄은 모르고 있던 희연에겐 다행스런 일일까. 이전 요리 실습 때 민서가 구토를 하며 공포에 질렸던 모습만 보고서도 심각한 트라우마를 거진 파악했던 서현. 날씨 얘기를 하듯 꺼낸 건 무척이나 민감한 질문이었다.

"민서는 엄마하고 친했어, 아빠하고 사이가 좋았어?" 

"아빠가 더 많이 놀아줬어요."

민서는 엄마 아빠가 이혼했다는 사실을 서현이 형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만났던 손윗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듯이. 얼버무리지 않고 바로 답한 건 서현의 목소리에 아무런 악의가 없어서 였다. 오히려 자기 얘기를 더 해도 다 들어줄 것만 같은 기분까지 든다.

"아빠가 바쁘진 않으셨니?"

"늦게 돌아올 때가 많았지만 그래도 책도 읽어 주고 잘 자라고 해주고..엄마한테 저랑 놀아주라고 하곤 했어요. 일요일엔 축구를 같이 할 때도 있었고요. 엄마는 항상 전화기 앞에 있거나 컴퓨터만 했지만.."

"엄마한테 속상했겠네."

"엄마는 아빠랑 같이 있기 싫은 것 같았어요. 방에서 만화를 틀어준 다음 엄마 아빠가 말다툼한 적이 많아요. 이혼한 다음엔 엄마랑 살았는데..맨날 티브이만 틀어놓고 나가곤 했어요,"

묻지 않은 부분까지 다 털어 놓는 민서. 잠자리에서 혼자 우는 와중 떠오르곤 하는 아픈 기억을 말하는 건 서현의 태도가 정말로 편안했기 때문이었다. "먹는 건 어떻게 했어?" "마트에서 파는 밥이랑 3분 요리요." 재정적으로 힘들기 보단 무관심에서 비롯된 식사. 아프게 남아 있는 한때를 되새기는 사이 어쩐지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희연에게도 가르쳐 준 적 없는 말까지 하는 민서는 가슴 한켠이 개운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서현은 티브이만 틀어놨다는 말을 듣고 지난 번 민서가 스트레스 상태에 빠졌던 이유를 알았다. 그냥 묻으려는 생각도 들었지만 희연에게 부탁받은 대로 그 상처를 정확히 알아야 겠다고 판단한다.

"전에 학교에서 요리할 때 만화를 보다 기분이 나빠졌었지? 엄마가 티브이를 틀어줬을 때 생각이 난 거였구나."

"네..내가 만화를 보고 있는 동안 엄마 아빠는 항상 싸웠거든요. 그때도 희연 누나가 날 두고 가버릴 것 같아서 너무 무서웠어요.."

"희연 누나는 민서를 아끼고 있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도 돼."

"형. 그때는 말하지 못했지만 제 옷을 닦아 줘서 고마웠어요."

"그런 건 아무 것도 아니야."

민서를 상처주지 않고 오히려 그 마음을 달래주는데 성공한 것 같다. 잘 들어주는 것. 상담의 기본이자 가장 중요한 덕목을 서현은 이미 갖추고 있었다. 타인이 속마음을 털어 놓았을 때 대화를 이어가는 데 효과가 있는 건 공감,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없어."

중학교 삼년 내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희연과 수지도 모르는 사실. 서현은 두 사람에게 전해질 것까지 생각하면서 꺼낸 이야기였다. 민서는 나란히 앉은 형을 올려다 본다. 무표정으로 보이지만 잘 보면 살짝 미소를 머금은 얼굴.

"형도 부모님이 이혼하셨어요?"

"아니. 처음부터 어떤 사람인지 몰라. 형네 엄마는 아버지에 대해선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거든."

"그럼..형네 엄마는 미혼..모예요?"

"그런 말도 알고 있구나."

"상담 교실에서 알게 된 아이들 중에 엄마가 미혼모라고 하던 애들이 있었거든요."

"어떤 수업을 하는지 물어봐도 될까?"

"저도 잘 몰라요. 일주일에 한번 가서 그림을 그리거나 저랑 비슷하게 엄마 아빠랑 떨어져 있는 애들이랑 얘기를 하는 거예요. 선생님하고도요,"

"가면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많겠구나. 할머니가 보내주시는 거니?"

"할머니랑 살게 된 다음부터 나가고 있어요. 내 마음이 아프니까 주사를 놓으러 가는 거라고 하셨어요. 처음엔 하기 싫었는데 지금은 상담 교실 가는 날이 좋아요."

"할머니가 민서를 아주 아끼시는 구나. 부러운 걸."

민서는 눈을 깜박였다. 줄곧 부드러운 분위기였던 서현의 표정에 아픔이 새겨졌기 때문에. 아주 오랜만인 것 같은, 어쩌면 처음 느끼는 듯한 기분이 드는 와중 한참 큰 형을 달래듯 이야기한다. 

"나보고 부럽다고 한 사람은 형이 처음이에요."

"정말로 부러워서 그래. 난 어머니랑 여동생 밖에는 가족이 없거든. 삼촌도, 이모도. 할머니 할아버지 아무도 누군지 몰라."

"엄마한테 왜 그런지 안 물어 봤어요?"

"형네 엄마는 가족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이야기해 주시지 않아."

서현의 말은 정말 사실이었다. 은선이 배다른 형이란 사실은 모르고 있고,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나 친척에 대한 질문은 허락되지 않았다. 차라리 어머니가 화를 냈었으면 더 적극적으로 반발 했을지 모른다. 가족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돌아오는건 아주 슬픈 눈빛. 서현이 그런 것에 의문을 가질 다섯 살때 어머니는 고작 스물 두살 밖에 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현재 자신들의 나이에 남매를 낳았다는 걸 알고 있는 지금, 서현과 서희에게 가족이란 결코 푸근하거나 다정한 단어가 아니었다. 오랜만에 자기 얘기를 한 여운을 털어내듯 담담히 말을 잇는 서현.

"그래도 난 쓸쓸하거나 하지 않았어. 쌍둥이 동생이 늘 함께 있는 것도 있고..알고 지내는 형이 여러가지를 가르쳐 주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가끔은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 부럽긴 했어. 명절날이 되면 더 먹먹했던 기억이 나네. 그래서 민서가 부러워. 할머니랑 같이 살고 희연이 같은 누나도 있잖아."

민서는 조금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정확하게 뭐라 할 수 있는 감정은 아니었지만 친구들에게 퉁명스레 대하거나 놀이에 끼지 않은 것, 때로 할머니에게 메달렸던 자신이 떠오른다. 자기 혼자만 힘들다고,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고, 그렇게 쌓아올린 딱딱한 껍질에 한 줄기 균열이 새겨진다. 겉으로 보기에 마음의 상처 하나 없을 것 같이 멋있게 생긴 형이 아빠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친척도 없다니. 두 사람의 이야기는 거기서 끊어졌다. 일부러 시간을 두고 다녀온 희연과 서희가 보이자 민서는 활달하게 손을 흔들었다.

"형하고 무슨 이야기했어?"

"좋은 이야기. 서희 누나. 저 줄넘기 좀 다시 봐줘요."

아무 것도 모르는 눈치의 희연에게 웃어보이는 민서. 아까보다 더 밝아진 모습에 희연은 내심 안심했고 서현은 가볍게 한쪽 눈을 찡긋했다. 순수하게 줄넘기를 가르쳐 주는 것에만 집중하는 서희만이 유일하게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여러 생각이 교차했던 시간은 여름이 인도하는 활기가 와 닿아 좋은 기억으로 세공된다. 한 시간 후쯤 헤어져 집에 가는 도중 서희는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감이 뛰어난 서희가 민서의 심리적 변화를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다. 서로에 대해 비밀도 거짓말도 없는 영혼의 쌍둥이. 서현은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지난 번에 요리실습 때 같이 왔던 민서가 만화를 보다 구토를 했거든. 그 이유에 대해 잘 알고 싶다고 희연이 나에게 부탁한 거야."

"그래..? 조금 의외네. 직접 물어볼 용기가 없던 것도 아닐 텐데."

"민서를 생각해서였겠지?"

"친구를 이용해서 속내를 알고 싶어하는 게 위해 주는 거야?"

"가까운 사람 일수록 숨기고 싶은 게 있는 법이잖아. 민서가 희연에게 직접 말하진 못할 이야기였어."

오빠는 남의 마음을 알아채는 데는 귀신 그 이상. 희연을 약간 불편하게 생각하는 서희였지만 두 사람에게 나쁜 의도가 없음을 납득했다. 그보다 오늘 본 민서의 즐거운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본다. 귀여운 남자아이들을 좋아하지만 이렇게 오래 같이 시간을 보내본 건 처음 있는 일. 누나누나 하면서 자신의 줄넘기에 감탄하고, 곧잘 따라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왠지 실없이 웃게 된다. 오빠에게 더 집요하게 파고들었다면, 서현은 민서에게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이 없다는 걸 털어 놓았다고 가르쳐 주었겠지만 더 이상 질문은 없었다. 저녁을 먹기 위해 어머니의 가게로 향하는 동안 각자 다른 감촉의 여운을 느끼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두 사람이었다.

다음 날, 민서가 할머니와 함께 어린이 미술관에 간 사이 희연은 버스에 몸을 실었다. 약속 장소인 수지네 빵집에 이미 도착해 있는 서현. 일찍 가지 않으면 앉는 자리를 잡기 힘든 줄 알고 정한 시간에서 삼십분이나 일찍 와 있었다. 주변에 소문이 난 베이커리 카페 답게 수지는 친구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에스프레소 머신과 매대. 카운터를 정신없이 오갔다. 다 끝낸 방학숙제 노트를 확인하며 십분 정도 지났을가. 롱 스커트를 입은 희연이 가게에 들어섰다. 얇은 옷감이라 답답해 보이지 않고 평소보다 어른스러워 보인다. 빵집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잠시 희연을 빤히 바라 볼 만큼 매력적인 자태. 서현 역시 가벼이 입을 연 채 희연의 외견에 감탄했다. 곧 반갑게 웃긴 했지만 공들여 치장한 열 일곱 소녀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벌써 와 있었네. 더 빨리 올 걸 그랬어."

"아니야. 나도 온지 얼마 안 됐어."

서현은 인사한 후 바로 민서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 혼자 만화를 보는 것이 심리적 트라우마를 자극한다는 것을. 할머니 말만 듣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실이 명확하게 형체를 갖춘다. 희연은 잠깐 의기소침한 듯했지만 기쁨이 비치는 눈동자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불편한 부탁이었을텐데 들어줘서 고마워. 서현아."

"아니야. 반은 내 의지로 한 거였으니까. 나도 민서가 그떄 그런 행동을 보인 게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왠지..확신이 있었거든. 서현이 너라면 민서의 상처를 잘 보듬어 줄 것 같았던."

"좋게 봐줘서 고마워."

서현은 진지한 얘기는 이쯤 하고 빙수라도 같이 먹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방학숙제도 점검하고 한식 조리 기능사 시험 때 나온 오징어 볶음 얘기를 할 기대를 하고 나온 자리. 하지만 서현의 눈에 비친 건 내면으로 뭔가를 결정한 듯한 희연의 진지한 표정이었다. 혹시 내 태도가 안좋았던 걸까. 화제를 바꾸려는 서현을 향해 희연은 천천히. 그리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서현아..나..널 좋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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