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현 Oct 17. 2023

잿빛 유리 글라스

9

남매가 자신들의 상황을 비관하게 하는, 두 사람에겐 아직 알려지지 않은 근본 적인 이유가 있었다. 아버지 은현이 타 조직을 습격하는 상황. 은현은 피로 곤죽이 된 타 조직 보스의 목덜미를 발로 짓누르고 있었다. 주변에 널려 있는 조직원들 역시 케찹이라도 끼얹은 듯 피투성이였다. 습격에 쓰인 인원은 은현 외에는 고작 부하 다섯명으로, 수십명에 달하는 이 곳 사무소를 박살내 놓았다고는 믿을 수 없는 상황. 은현은 차가운 눈빛을 내쏘며 내딛은 발에 은근한 힘을 주었다.

"이제부터 네놈들 구역은 우리가 접수한다."

"개소리 집어 치워.."

타 조직 보스는 굴욕감과 분노에 뒤얽힌 채 짓씹듯 내뱉었다. 은현의 부하 중 한명이 욕설을 징걸이며 한 발짝 나서려 하자 은현이 손을 들어 저지 시킨다.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발을 치우고, 몸을 숙여 눈을 맞추는 동작엔 잔인함 섞인 여유가 드리워져 있었다.

"아직 지껄일 여력은 남아 있는 것 같군."

"닥쳐..네 놈들의 보스에게 전해...얼마 안 가 목을 따일 준비나 하라고.."

은현은 실로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다들, 웃어라." 은현의 명령이 떨어지자 부하들은 소리 높여 웃는다. 단지 추임새라도 되는 것일까. 그들의 웃음은 진심이었다. 감히 자신들의 조직 보스에게 목이 따이느니 어쩌고 한 것이 정말 우스운 일인 것처럼. 은현은 상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힘을 주어 지면에 내리 꽂았다. 기절하지 않고 고통에 몸부림칠 정도로 힘을 계산해서. 신음소리 마저 내지 못하는 그를 산채로 으깨듯 하며 짧게 말한다.

"보스께서 네 녀석을 죽이지 말라고 하신 걸 감사한 줄 알아." 

"가자."은현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그중 유난히 잔인한 한 명이 꿈틀대는 이 중 하나를 발로 걷어차 버린다. 벽에 촤악하고 뿌려지는 핏물과 나가 떨어지는 몸뚱아리는 기괴함에 가까웠다. 흡사 유희를 즐기듯 패자들을 유린하는 그 모습을 강자의 추한 모습이라 칭하는게 옳은 말일까. "그 정도로 해둬."은현이 살짝 기분 나쁜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야 그의 폭력은 잦아 들었다. 나이가 있음에도 무투파의 최전선에 나서는 은현은 조직에서도 중요한 간부. 거느린 부하들 역시 은선에게 뒤지지 않는 강자들이었다. 은선이 평상시엔 바텐더로서 상냥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처럼, 밤 거리를 걷는 은현 무리는 직장 상사와 사이가 좋은 부하 직원 정도로 보인다.

"형님. 목 마르지 않으십니까. 한잔 하고 가시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난 별 생각없다. 너희들이나 나이트나 클럽에 가서 즐기고 와라."

"일을 한 다음엔 놀 생각도 없어집니다. 그러시지 말고 괜찮은 바라도 가서 목을 축이는게 어떻습니까."

"은선 형님 가게라도 가시는 게 어떨까요."

은현이 은선의 아버지라는 것과 서현 남매의 어머니를 정부로 두고 있다는 건 조직 내에서도 알려진 사실이었다. 은현이 가정사를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다는 걸 증명하듯 어쩔 수 없다는 것처럼 웃음짓는다. 시간은 오후 아홉시. '가게에 애들이 있는 건 아니겠지.'있어도 별 상관은 없었지만 굳이 그런 생각을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남매의 어머니와 만난 게 보름 전이었다. 싸움을 치뤄낸 부하들의 비위도 맞춰줄 겸해서 가게로 발길을 향한다.

마마가 운영하는 가게는 조직의 다른 가게들과는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가족과 함께 온 손님이나 취할 생각없이 가볍게 한잔 하고 들어가려는 손님. 퇴폐적이나 음침한 면모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은선의 칵테일 솜씨와 마마가 요리를 아주 잘하는 것에 이끌린 단골들. 남매 어머니에게 가게를 운영하게 해준지 16년 째지만 이번이 고작 세번째 방문인 은현이었다.

"어서 오십시..."

가게 문이 열리자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던 은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인 은현 형님. 그 뒤에 있는 익숙한 부하 동료들. 그들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습관이 된 침착함마저 흔들린 걸까. 쇼트 칵테일을 즐기는 한 여사 손님과 이야기를 나누던 마마는 무슨 일인가 해서 시선을 옮기고, 자신이 열 일곱살 때 첫 몸을 내어준 은현과 눈이 마주쳤다.

"어서 오세요."

은선과는 달리 오히려 평소보다 더 잔잔한 태도로 인사하는 마마. "너희들은 테이블에 가서 앉아라." 은현은 부하들에게 말한 후 마마와 마주보는 위치로 바에 앉았다. "직접 담근 술이 있다면 조금 주시오." 격식을 차린 정중한 목소리로 청하는 은현. "알겠습니다." 마마의 침착한 목소리가 조율 피리처럼 다가온다. 아버지의 방문에 당황했지만 은선은 침착하게 부하들이 앉은 테이블로 갔다. 가게 안에는 혼자 온 손님 몇몇과 3개의 테이블에 손님들이 앉아 있다. 가게 분위기를 봐서 은현의 부하들은 폭력배 특유의 말투를 감추는 듯 했다. 은선은 늘 하듯 예의 바르게 주문표를 펼쳤다.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달달한 맛이 나는 칵테일로 해 주세요. 조금 독해도 상관없어요."

"이 친구와 저는 무알콜로 할게요."

"전 조금 과하다 싶은 맛이 좋겠습니다."

"뭐든 추천하시는 걸로 부탁드려요."

십대 후반 나이에 경쟁 조직의 보스를 재기불능 상태로 만들었던 은선. 그런 본 모습 따위 재미없는 농담처럼 느껴진다. "감사합니다. 바로 준비해 드리죠." 바 안쪽으로 돌아와 빈 글라스에 얼음을 담아 온도를 떨어뜨린다. 무알콜 칵테일 신데렐라를 두잔 동시에 만들고, 민트 초콜렛 같은 풍미가 있는 그래스호퍼는 특히 셰이크에 신경을 썼다. 파인애플 쥬스와 계란 흰자가 들어간 호화로운 맛의 밀리언 달러. 칵테일의 정석 중 하나인 스푸모니를 만드는 손길은 실로 빠르고 유연했다. 완전히 생활이 된 아름다운 몸동작은 다른 손님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큼 완성되어 있었다. 어느새 은선을 바라보고 있던 은현 역시 그 움직임에 감탄할 정도. 

"주문하신 칵테일 나왔습니다."

은선은 다섯 잔의 칵테일을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깡패로서의 은선만을 알고 있는 조직원들에게 이 바텐더는 유쾌할 만큼 놀라운 모습. "위하여." 시원시원한 성격의 사내가 건배하는 몸짓을 했고, 다들 기분 좋게 잔을 부딪혔다. 칵테일을 맛보는 순간, 피자를 처음 먹어본 아이같은 표정을 짓는 다섯 명의 사내들. 단지 알록달록 색을 낸 술이겠지 하던 생각이 정면으로 반박당하는 느낌이었다. 한 명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글라스를 두손으로 받쳐 들었는데 흡사 기도라도 하는 것 같다. 그 침묵의 감탄사가 촉매가 되어 다른 손님들 사이에서도 추가로 칵테일을 청하는 주문이 들어왔다.

"은선씨. 여기 마티니로 두 잔."

"마일드한 블렌드로 미즈와리 부탁해요."

"블러드 메리."

"마지막으로 블랙 벨벳으로 해볼까."

"아메리칸 뷰티..될까요?"

은선은 전혀 피곤하거나 싫증나는 기색 없이 손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상냥하게 주문을 받았다. 그 모습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조직원들. 그들은 알지 못했지만 흑맥주와 샴페인을 동시에 부어 만드는 블랙 벨벳과 칵테일 표면에 포트 와인을 살짝 띄운 아메리칸 뷰티는 칵테일 중 최고 난이도. 어느 바텐더라 해도 주문을 받으면 약간 긴장할 정도였지만 은선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마마와 대화를 나누던 여사 손님은 "은선 씨같은 사위가 있으면 정말 좋을 텐데. 우리 딸이 아직 대학생인게 너무 아깝네." 살짝 진심이 첨가된 농담을 했다. 바에 앉아 있던 손님이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은선에게 물었다.

"은선 씨. 지금 서른 다섯 살인가? 그 정도 나이지 아마?"

"서른 네살입니다."

글라스에 위스키와 물. 얼음을 정확한 비율로 담으면서도 은선은 또렷하게 답했다.

"은선 씨가 철벽만 치지 않으면 스물 일곱 먹은 우리 조카 소개해 줄텐데 말이야."

"아니, 내 허락없이 다들 은선 씨에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에요."

가게에 감도는 즐거운 분위기. 이 곳에 오는 손님들의 유대감은 이탈리아에서 가게 특유의 분위기를 말하는, 아리아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독한 술이라도 마시며 싸움의 잔재를 털어낼 생각이었던 은현에게, 아들 은선이 얼핏 조직의 그늘 아래서 벗어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저 녀석도 훌륭한 어른이 되었군."

은현이 속한 조직은 가족 간의 결속을 중요하게 여겨 조직원들의 혼사까지 결정했다. 은현의 전처가 달아난 것도, 아들이 십대 때 악명 높은 깡패가 된 사실 역시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조직의 명령이라 생각하고 눈 앞의 일을 해 왔을 뿐. 그런 은현의 정부는 열 일곱살 아들 딸이 있고 손님들에게 마마라 불리고 있지만 이제 서른 네살 밖에 안된 여인이었다. 은현을 마주할 때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다. 조직의 입김이 닿는 가게에서 우연히 만나 고되게 일하는 어린 모습이 안쓰러워 정부로 삼은 기억. 육체적 관계를 맺은 것은 통과의례 같은 개념이었을 뿐, 은현에겐 쾌락이나 이기심 따위 없었다. 

'만약..내가 조직에 속해 있지 않고, 은선과 쌍둥이 아이들이 날 아버지로 생각해 준다면..이 가게에서 함께 일하며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을까.'

중년에 접어든 나이가 무색할 만큼 외모가 빼어난 은현의 얼굴에 싸늘한 미소가 어린다. 천둥 벌거숭이로 냉혹한 세상에 던져진 그에게 조직은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었던 존재. '맛있는 술을 마셔서 분위기에 취한 것 같군.' 마마가 직접 담근 벌꿀주를 한 모금 더 들이킨다. 은현이 속마음이 서린 은밀한 미소를 보였음에도 마마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가혹한 인생을 겪어왔음을 증명하는 것일까. 한 시간 정도 후 은현이 부하들을 데리고 가게를 나설 때, 마마의 인사는 여느 손님을 대하는 것과 똑같이 친절하고 다정했다. 몇 시간 후, 그녀는 영업을 마친 후 은선이 퇴근하고 나서 잠시 가게에 혼자 있었다. 손님들에겐 스물 다섯이라 나이를 속이고 열 여덟살 때부터 맡아온 삶의 터전. 그녀에게 있어 은현은 남편이라는 단어 따위 허황된 꿈과 다를 바 없게 하는 존재였다. 언제나 그랬듯 스스로를 다독이며 집으로 돌아왔을 때 시계는 새벽 다섯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각자의 방에서 곤한 잠에 빠져 있는 서현과 서희. 조직의 명령에 따라 결국엔 다른 이들을 상처입히며 살아가야 할 미래가 자신의 과거와 얽혀 어지러운 나선을 그린다. '고맙다. 그리고..미안하다.' 거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서른 네살 나이의 어머니는 한참이나 소리없이 흐느꼈다.

희연 가족의 애완동물인 고양이 네로. 일주일 이상을 함께 지내고 있는 노부인의 무릎에 앉아 편안하게 고르륵 거리는 건 이제 일상이었다. 할머니의 발치에 앉아 그림책을 소리내어 읽고 있는 민서와 희연의 존재 역시 기분을 좋게 한다. 민서는 네로에게 짖궂은 장난을 거는 일 없이 가끔 턱을 간지럽히거나 품에 안곤 했고, 고양이는 부드럽게 부비적거리며 답례를 해주었다. 한 페이지씩 교대해 가며 그림책을 읽던 희연은 시간을 확인했다. 교복을 입고 가방에 할머니의 애플파이를 넣는 누나를 바라보는 민서. 부활동을 하러 간다고 미리 듣긴 했지만 조금 서운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희연 역시 마찬가지로 걱정이 되는 눈치. 점점 시간이 가는 와중 민서는 나름 용기를 내어 할머니에게 말했다.

"할머니. 나 희연 누나랑 같이 갔다 오면 안되요?"

"누나는 놀러 가는 게 아니야. 오늘은 할머니랑 같이 집을 보자."

"그래도..."

그동안 희연은 민서와 늘 함께 했다. 박물관에 가거나 공작 숙제를 만드는 등의 숙제를 자상하게 도와준 사촌 누나. 할머니가 싫은 건 아니지만 떨어져 있음에 불안감을 느끼는 듯하다. 바로 거절하지 못하는 희연. 잠깐 생각하는 듯 하다 담당 교사 핸드폰 번호를 알고 있음이 생각났다. 처음 전화를 거는 어색함은 민서의 간절한 눈빛에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저 희연이에요. 사촌 동생이 같이 있는데..수업에 방해되지 않게 할테니 함께 가도 될까요?"

걱정하는 기색이었던 희연의 얼굴에 놀랄 만큼 빠르게 웃음이 깃들었다. "예. 감사합니다. 그럼 있다가 뵈어요."그 변화를 눈치챈 민서 역시 눈에 띄게 밝아지는 눈치.

"함께 가도 된대. 같이 가자. 민서야. 얼른 옷 갈아 입어."

"응!"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는 민서의 모습에 웃음 짓는 희연과 할머니. 느긋하게 하품을 하는 네로의 등을 어루만지며 할머니는 손녀에게 말을 걸었다.

"선생님이 괜찮다고 하셨나 보구나. 민서가 얌전히 있어야 할텐데."

"괜찮아요. 민서 정도면 심하게 노는 성격도 아니니까요. 그림책 몇권 가져 가서 보게 할 생각이에요."

"그러면 되겠구나. 알았다. 잘 다녀오렴."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는 동안 희연은 살뜰히 민서를 챙겼다. "몇 정거장 가야 해?" "4 정거장만 가면 돼. 가서 얌전히 있어야 돼," "응. 알았어. 누나 친구들도 오는 거야?""응. 두 명."곧 학교 앞에 이르자 희연은 조심스레 민서와 함꼐 버스에서 내렸다. 방학이었지만 체육계열은 평일 내내 훈련에 참가해야 했기에 운동장엔 활기가 흐르고 있었다. 일곱 바퀴 째 트랙을 달리는 마라톤 부 학생들이 유독 눈에 띈다. 민서는 희연의 손을 꼭 잡고 갈색으로 그을린 고등학생들을 신기한 기분으로 바라보았다. 800미터를 전속력으로 달린 후 1분 휴식. 총 5세트를 하고 있던 권투부, "누나. 저 사람들 되게 빨리 달린다."동물원에서 희귀한 짐승을 처음 볼 때 어울릴 듯한 반응이었다. 가장 먼저 들어온 서희는 숨도 별로 가쁘지 않은 눈치. 가벼이 어깨 스트레칭을 하던 중 희연과 눈이 마주쳤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희연에게 왠지 불편한 마음이 드는 걸까. 그냥 고개만 끄덕이려는데 어린 남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일견 여자아이처럼 보이는 예쁘장한 얼굴. 지도 교사에게 말하고 천천히 희연 쪽으로 다가간다. 땀에 젖은 운동복에 청룡상을 연상시키는 단련된 근육이 비치고, 머리를 두번이나 묶어 올려 조금 무섭게 보일 수도 있는 서희는 희연에게 인사하기에 앞서 검지로 민서를 가리켰다.

"그 애는.."

"내 사촌 동생 민서라고 해."

"안녕하세요."

민서를 고개를 숙이며 배꼽 인사를 했다. 고강도 달리기로도 별 영향이 없던 서희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민서는 "예쁜 누나."하고 마저 말했다. 냉정하고 차분한 서희는 귀여운 남자애들에게 약한 의외의 면모가 있었다. 자신의 외모에 자신감이 있는 서희지만 마음에 쏙 들어오는 민서의 태도에 마음을 빼앗긴 걸까. 지도 교사가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에 몸을 돌리기 전, 사진을 찍듯 2초 정도 민서를 똑바로 바라 보았다.

"저 누나 되게 빠르고 예쁘다."

"누나 친구의 쌍둥이 동생이야. 쌍둥이 오빠랑 똑같이 생겼어. 자, 이제 교실로 가자."

"응,"

곧 교실에 들어선 희연과 민서. 먼저 와 있던 서현은 선생님이 프린트 해준 한식 조리 기능사 필기 문제를 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다. 보름 만에 만난 희연이 반가운지 팔을 머리 위로 들어 인사하던 서현은 민서를 의식했다.

"안녕. 그 애는 누구야?"

"민서라고 해. 내 사촌 동생이야. 선생님한테 허락 받고 데려왔어."

"민서야 안녕. 난 서현이야."

"안녕하세요. 잘 생긴 형."

서현은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여드름과 주근깨 때문에 외모가 묻히는 경우가 많은 데도 천진하게 잘 생겼다고 말해주는 민서가 귀여운 듯이. 곧 수지도 도착하고, 요리 연구부의 세명은 반갑게 이야기를 나눴다. 민서와 함께 이곳저곳을 많이 다닌 희연. 수지는 제과점에 커피 손님이 많아져 반은 바리스타가 되었고, 숙제와 운동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게 서현의 일상이었다.

"다들 방학은 잘 보내고 있니?"

지도 교사는 세 명의 학생에게 웃어보이며 교탁에 섰다. 오늘 준비한 재료는 마장동에서 일하는 지인에게 특별히 좋은 고기를 받은 것. "오늘은 돼지 갈비찜을 할 생각이야." 맑게 빛나는 아이들의 눈동자는 부활동을 무척 기다려 왔다는 걸 증명하고, 교사 휘선은 칠판에 재료와 조리 방법을 적을 때 소년같은 설레임을 느꼈다. 조리 방법을 설명할 때 민서는 뒤쪽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곧 휘선은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희연이 데리고 오겠다고 말했던 아이에게 다가간다. 

"안녕. 네가 희연이 사촌 동생이구나?"

"안녕하세요."

"만화영화 좋아하니? 기다리기에 지루할까 싶어서."

"좋아해요."

"자, 보고 싶은 걸로 골라 보렴."

휘선의 노트북엔 극장판 애니메이션 다섯 개가 깔려 있었다. 그중 민서가 고른 건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하는 용과 소년의 만남. 적당히 볼륨을 키우고 시작 버튼을 누른다. 동영상 파일이 재생되는 것까지 확인한 후 휘선은 조리에 들어간 세 사람에게 다가갔다. 돼지갈비를 5cm 길이로 썰어서 잔 칼집을 넣는 손놀림은 수지가 가장 빨랐다. 셋 중 속도가 늦은 건 희연이었지만 손질된 강비를 끓는 물에 데치는 작업까지 자연스럽게 이어간다. 서현은 양념장을 만들 때 버릇처럼 눈대중으로 하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계량 컵과 계량 스푼을 써 정확하게 하는 데 신경을 썼다.

'다들 몸놀림이 아주 자연스러워 졌어.'

지도 교사는 왠지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흥분된 마음으로 만들었던 요리 연구부, 아이들도 잘 따라와 주고 즐겁게 실습에 임하는 모습은 정말 큰 보람으로 다가온다. 기능사 시험 일정은 필기에 한번에 합격할 것으로 계산하면 실기까지 방학 내에서 끝낼 수 있었다. "갈비를 익힐 때 양념장은 반만 넣고, 뚜껑을 덮은 다음 중불로 하는 것에 주의 하렴." '꼭 합격할 수 있으면 좋겠군'그렇게 생각하며 휘선은 부지런히 움직이는 아이들을 잘 관찰하고, 실수하거나 미흡한 부분에 대해 조언을 하곤 했다.

민서가 만화 영화에 온전히 몰입한 건 십오분 정도 였다. 아직 주인공 소년은 용과 친해지기 전이어서 서로 경계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다가 조리를 하고 있는 형, 누나들이 시선에 들어온다. 틀어 놓은 만화영화 장면과 요리를 하는 현장이 문득 겹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고, 수년 간 묻어놯던 기억이 점차 수면 위로 떠올랐다.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난 당신을 만나지 않았을 거야.'

민서가 네 살 때 엄마가 아빠에게 하는 말은 늘 그렇게 시작했다. 양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이십대 초반에 결혼한 남녀는 분명 서로를 사랑했다. 전문직에서 일하는 남자는 가정에 많은 정성을 들이기 힘들었다. 유복한 집안의 막내딸이었던 여자에게 가사노동은 예고하지않고 날아든 시험문제와 같았다. 결혼하기 석달 전에 잉태된 아이가 태어났을 때, 민서는 부모들이 심신 양면으로 지쳐있다는 걸 알기엔 너무 어렸다. 엄마는 갓난아기를 하루 종일 달래고 품어줘야 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내내 격무에 시달리고 들어왔을 때 정돈되지 않은 집과 큰 소리로 울어대는 아이. 분노로 일그러진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심정은 어땠을까.

'넌 이기적이야. 처음부터 나를 사랑한게 아니었어. 자기 감정에만 충실했지.'

네살이 된 민서는 엄마가 틀어준 티브이 화면만을 바라보았다. 재미있고 예쁜 것이 비추는 네모난 영상. 눈만 마주치면 싸우는 부모의 모습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때때로 엄마 아빠. 싸우지 말아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살갗에 다가오는 공포에 입밖으로 낼 수 없었다. 젊은 부모의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어 간다. 결국 갈라선 남녀 사이에서 민서의 양육권이 넘어 간 쪽은 엄마였다. 아이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건 마찬가지. 아빠가 위자료 대신 민서를 떠맡긴 셈이었다. 민서가 기억하는 엄마의 웃는 얼굴은 이혼 수속이 끝나고 법원을 나섰던 때가 유일했다. 그후 좋은 조건의 남자를 만나 재혼하기까지 엄마는 민서를 품어 준적이 없었다. 단 한번도.

교실을 채우고 있는 즐겁고 분주한 분위기가 흔들린다. 민서는 더 이상 만화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만화를 보고 있으면 엄마 아빠는 싸워. 내가 할 수 있는 건 화면을 보는 것 뿐이야. 그러면 어른들이 다 알아서 해. 계속, 계속 보고 있으면..엄마 아빠는 헤어졌어. 더 이상 만나지 않아. 싸우지도 않아. 누나도 그런 걸까? 내가 계속 만화를 보면..날 두고 가버릴까?'

"우웨엑.."

심적인 긴장과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었을까. 민서의 턱밑으로 흘러나온 토사물이 바지 위로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는 와중 노트북에 묻을 것을 걱정해 양 손으로 입을 막는 민서. 다 익을 때가 되어가는 갈비찜을 의식하고 있던 서현이 가장 먼저 민서를 의식했다. 눈물을 머금은 채 필사적으로 구역질을 참는 어린아이를 보자 반사적으로 다가선다.

이전 01화 잿빛 유리 글라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