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by 김명현

“선호야. 쉬엄 쉬엄 해라.”

난 소파에 몸을 묻고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격투를 소재로 한 만화로 근육은 정석으로 잘 그렸는데 과장이 심했다. 총알을 막는 다거나 수면에 뜬 나뭇잎을 밟고 움직이는 등등..원래 만화책은 그런 맛으로 보는 것 아닌가. 나한테 이런 재미를 준 건 권사환. 시장 외곽에 있는 성당의 신부다. 방으로 쓰는 창고에는 게임기와 전자기타에서 당구대에 이르기까지 오락 설비는 별게 다 있다. 백만원 남짓한 신부 월급으로 아이들이 좋아할 법한 건 다 사들일 기세다.



내가 한마디 할만큼 열심히 뭔가를 하고 있는 건 선호다. 최근 화제를 몰고 있는 발레를 배우는 70세 노인을 다룬 드라마. 문예창작과 조교인 선호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를 그대로 노트북으로 옮겨 적고 있었다. 빼빼 마른 체격에 눈끝이 약간 처진 순한 인상으로 25살 나이지만 고등학생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우리 말은 들리지도 않을 걸. 선호 집중력은 진짜 알아 줘야 해.”



친업 바에 매달려 한손 풀업을 하고 있는 건 사환이다. 카톨릭 신부 중엔 종교적 열의 이면의 혈기를 풀고자, 흡연이나 술. 특별한 취미를 갖는 이가 드물지 않다. 사환이 선택한 건 무술로서 무술 서적과 영상 자료가 전문가 수준이다. 인간 모습의 나는 권투와 레슬링으로 단련된 사내. 동양 무술을 깊게 익힌 사환에게 경의를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저렇게 몰두하는 것도 재주는 재주야.”



난 만화책을 덮고 커다란 디지털 티브이 앞에 매달려 있는 선호에게 다가갔다. 드라마가 끝이 나는 타이밍. 노트북 키보드를 바쁘게 오가던 손이 멈추고 깜박이지도 않던 눈에 힘이 빠지는 것에 맞춰 선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수고 했어.”



“아..견회 형님.”



선호는 날 올려다 보며 옅게 웃었다. 기름기라고는 없는 얼굴이지만 추레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귀여운 느낌마저 든다.



“이번 신작이라 들었는데. 문예창작과 조교로서 평가하기에 어때?”



“제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평가 같은 건 내릴 수 없어요.”



진지해지는 청년의 얼굴. 소년 시절 고전 소설에 빠져 살았고 군대에선 부대 내 도서관의 책이란 책은 전부 읽다시피 했다. 복학 후에도 매일 영화를 한편 씩 보며 작가적 감수성을 갈고 닦아온 성실함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선호도 슬슬 자기 소설을 쓰고 싶을 때가 아닌가 싶은데 말이다.”



사환은 이제 한쪽 발로 체중을 온전히 지탱하는 피스톨 스쿼트를 시작했다. 체격이 가벼운 경우 생각보다 쉽게 할 수도 있지만 근육질의 95kg으로는 꽤 고난도. 신부님이라기 보단 어디 무술 체육관 관장이라 해도 믿을 수준이다.



선호는 쑥쓰러운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내렸다. 중고등학생 때 글짓기 대회에서 논설문이나 설명문을 주로 써온 이력이 있는데 충분히 인정할 만 했다. 학교 과제를 제외하면 변변한 자작 소설 한편 없이 문예창작과 조교를 하는 것. 선호의 문학적인 면모를 짐작하기엔 충분할 것 같다.



“아직은 때가 오지 않았다 생각합니다. 더 공부와 준비를 하고 시작하고 싶어요.”



“글을 쓰는데 가장 중요한 건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글을 쓰는 것 자체라고 들었는데.”



“무사는 항상 칼을 갈지만 명분이 있을 때만 뽑는 다는 말에 공감해요.”



“아무튼 책 많이 있는 사람하고는 논쟁을 할 수가 없다니까.”



“아..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금세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는 선호.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고 자신이 실수를 하지 않나 곧잘 생각하는 성향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란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짧은 머리카락 밑으로 흥건히 땀을 흘린 사환은 하하 웃으며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자, 이제 몸도 조금 움직여야지. 미트 잡아줄 테니 일어나 봐라.”



“네. 알겠습니다.”



사환의 손에 들린 격투기 훈련용 미트. 발차기도 받아 줄 만큼 큼직하고 두꺼운 재질이다. 선호는 길게 심호흡을 한 후 두 손을 들어 자세를 잡았다. 약간 가드가 높고 복부가 비어있지만 그런 걸 지적할 수준은 아니었다. 손과 발에 힘을 주어 미트를 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훈련. 사환은 일부러 느린 리듬으로 미트를 들었다. 아직 체력이 약한 선호가 충분히 호흡을 정돈하며 움직일 수 있게끔. 3분의 타격 훈련은 초보자에겐 만만치 않은 운동량이다. 1분간의 휴식 후 5세트를 거친 선호는 가빠진 숨결에도 허리를 곧게 펴고 바른 자세를 유지했다.



“오늘도 감사했습니다.”



“그래. 일요일날 보자. 이번 주는 수원 쪽에 있는 노인 회관으로 갈 거다.”



드라마 필사와 운동을 마친 선호는 몇 번씩 허리 숙여 인사하며 성당 창고를 뒤로 했다. 중학생 때부터 매주 일요일 마다 독거노인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는 봉사활동을 해온 청년이다. 우리 윤마리아와는 오랜 이웃이기도 하고.



“선호에게 운동을 추천하신 건 아주 잘하신 겁니다.”



“잘 가르치면 선수급은 아니라도 호신 정도 수준은 충분히 익힐 수 있을 거야.”



나는 반말을 하고 사환은 존댓말을 한다. 인간 기준으로 하면 나이 차이도 있고 각각의 입장을 생각하면 반대여야 하겠지만. 추방된 천사를 인간이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것도 신이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는 신부라면 더더욱 쉽지 않겠지.



“자, 그럼 나도 좀 해볼까. 시작하지.”



“오늘은 극진 공수도 식으로 연습을 하겠습니다.”



자세를 잡으며 마주선다. 간결하면서 실전적인 타격법은 날이 아주 잘 드는 단검을 연상시켰다. 신부로서의 업무에 충실한 사환은 무술 수련을 애인으로 삼은 듯, 시간 날 때마다 단련을 계속해 왔다. 그리고 내가 돈 보스코를 모셨던 그랏죠라는 걸 알고 있는 유일한 인간이기도 하고.



너는 마땅히 길 잃은 아이들을 돌보는 이에게 하느님이 존재하심을 증명해야 하리라.



지금의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른다. 눈앞에서 뵌 적은 제대로 없지만 늘 나를 주시하고 계심은 알고 있다. 절대 복종까진 아니지만 명령하신 대로 행하려 하는 편.



“요즘 애들은 말 잘 듣나?”



정권 찌르기와 앞차기를 천 번씩 한 후, 나는 가벼이 손목 발목을 돌리며 말했다. 사환은 성당 신부이면서 근방 청소년들의 대부라고도 불린다. 식사 배달에 아이들이 편안히 이용하도록 이런 오락 시설까지 만들고, 공부에 목마른 이들을 위해 본인이 야학을 운영할 정도다.



“늘 그렇죠. 요즘 뒷거리 술집에서 아이들에게 술담배를 파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일단 경찰에 제보는 해두었습니다.”



“몇 달 전에 만났던 빼빼 마르고 눈이 약간 작은 여자애..인경이랬나?”



“네. 지난주에 딸아이를 출산 했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애쓰다 보면 씁쓸하고 애달픈 사연은 넘치도록 듣는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비행 청소년들에게 의탁했다는 인경. 사환이 도움의 손길을 뻗었을 땐 이미 임신 5개월이었다.



난 자리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배와 턱이 지면에 닿음에 따라 허벅지 안쪽이 당기는 통증이 온다. 인경은 처음 날 마주했을 때 낯설어 하는 기색이 있었지만 곧잘 말을 걸고 살갑게 굴려고 노력하는 게 귀여웠다. 제대로 정을 준 어른이 없어 모두에게 상냥한 사환에게 부모의 마음을 느끼는 듯했고.



“검정고시를 준비하자고 말했습니다. 다행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더군요. 똑똑한 아이라서 잘 할 수 있을 거예요.”



“이제 봐주고 있는 아이들도 많을 텐데. 힘들진 않아?”



“괜찮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다른 신부님들한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제 주머니를 탈탈 털지만 늘 부족합니다. 하지만 한명의 아이라도 제가 할 수 있는데 까지는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사환의 얼굴에 패인 주름이 힘겨운 웃음에 애수를 더한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눈앞의 건장한 신부와 눈을 맞춘다. 세상의 어두운 면모를 수없이 겪어 왔음에도 희망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이. 그래. 내가 모셨던 돈 보스코 신부님의 고결한 영혼은 아직 이 세상에 남아있구나.



“난 그만 가보겠어. 나중에 보자고. 너무 무리하지만 마.”



“늘 감사합니다. 리아에게도 안부 전해 주십시오.”



가게를 쉬는 일요일. 성당에서 충분히 기분 전환이 되었다. 가벼운 걸음걸이로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 윗동네 쪽으로 향한다. 건물들이 비슷비슷 한데다 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처음 온 사람들은 길을 잃기 쉽다. 덕분인지 가난한 사람이 많은 곳이기도 하고. 길고 긴 오르막 계단을 한 걸음씩 오르기 시작했다. 착하게 사는 건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지루하지만 다 포기해 버리면 너무나 빠르고 즐겁다는 말이 있지. 하지만 내리막 막 내려가다간 무릎 관절 나가고 넘어지기 쉽다는 게 당연한 이치다.



“헉..헉..젠장, 지독한 자식들!”



계단을 다 올라왔을 때였다. 나와 안면 있는 고등학생인 천득이 두세 계단씩 막 뛰어 올라온다. 일요일인데 집에서 쉴 것이지 지치지도 않는군. 연신 뒤를 돌아보며 다급히 달음박질 하던 천득은 나를 보자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견회 형! 마침 잘 됐다. 지금 저 자식들이 나 쫓아오는데 혼 좀 내줘!”



“헛소리 하지 마. 내가 무슨 걸어 다니는 명동 성당이냐. 사고치고 나한테 들러붙는 게 아주 버릇 되겠어.”



“아 비싸게 굴지 말고..에이 진짜 쟤들 엄청 센데..그럼 나 여기 숨었다고 말하지 마!”



천득은 입술을 명란젓 마냥 내밀더니 담장 안쪽으로 몸을 바짝 기댔다. 얼마 되지 않아 뜀박질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고등학생 네 명이 씩씩 거리며 나타났다. 그깟 오르막 계단이 뭐나 된다고 다 올라왔을 땐 가쁘게 숨을 몰아쉰다. 잘 먹고 잘 자란 것들 체력이 왜 이 모양이야.



“뭐야 이천득 이 자식 어디 갔어? 분명 여기로 왔을 텐데..”



“미꾸라지 같은 놈. 오늘은 아주 끝장을 봐야 겠어.”



“어? 거기 아저씨! 혹시 키작고 앞이마 튀어나온 놈 못 봤어요? 이천득이라고 몰라요?”



개중에 목소리 좀 낮은 녀석이 내게 물었다. 내 앞에서 눈 똑바로 뜨고 말하는 투를 보니 이 동네 사는 애들이 아니군. 난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동네 맨 꼭대기를 가르켰다.



“저기 위쪽으로 막 뛰어올라가던데. 이렇게 말하면 되지? 천득아.”



난 담장 쪽으로 물었다. 안심했던 천득이는 으익! 하더니 달아나려 했지만 이미 다른 아이들에게 붙잡혔다. 그냥 보기엔 늘씬하게 얻어맞았지만, 싸움의 기본도 모르는 어설픈 손짓 발짓일 뿐. 그래도 4:1로 맞는 거니까 아프긴 할 것 같다.



“너 진짜 죽었어. 따라 와 이 자식아. 감히 덕재한테 시비를 걸어?”



“괜히 땀이나 빼게 하고 아주 작살을 내야 해.”



정신없이 두들겨 맞은 천득은 코피를 뚝뚝 흘리며 반쯤 끌려가기 시작했다. 좀 심해 보이지만 며칠 전에도 중학생들 괴롭히는 걸 봐서 혼을 내줘야겠다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난 가볍게 숨을 토한 후 무리들에게 말했다.



“자, 그 정도면 많이 때렸으니 이제 그만 해.”



욕을 질겅이며 천득을 끌고 가던 녀석들이 내 저지에 도끼눈을 떴다. 오랜만에 보는 표정이라 신선하군. 개중 유난히 눈이 째진 한명이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아저씨. 지금 뭐라고 했어? 뜨거운 맛 좀 보여줄까?”



“그냥 곱게 가던 길 가쇼. 혼나기 싫으면.”



이젠 내가 화를 낼 차례 같은데 그냥 웃기기만 하다. 아까 사환이랑 연습했던 거나 좀 복습해야겠네. 난 걸음을 내딛으며 무릎을 구십 도로 굽혔다. 허리에 붙였던 주먹으로 옆으로 내뻗자 눈 째진 녀석은 그대로 5미터 뒤로 나가떨어진다.



“이 녀석들. 어디 아저씨한테 겁도 없이. 아저씨 화내기 전에 얌전히 가라.”



“뭐, 뭐야? 사람이 저렇게 날아갔어?”



“어떻게 된 거야?”



일부러 겁먹으라고 좀 멀리 날렸는데 효과가 있는 것 같다. 난 밀려난 채 몸을 못 가누는 아이를 향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쟤처럼 되기 싫지? 얼른 데리고 가.”



“당신 오늘 죽었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덕재 불러올 거니까.”



“도망가지 마! 갔다 와서 없으면 천득이 자식 진짜 죽여놓을 거야!”



아아, 진짜 오랜만이네. 험한 말을 술술 하면서 반쯤 달아나는 형상으로 몰려가는 무리들. 나는 피식 웃으며 검지와 중지를 입술에 대었다. 내가 가끔 피는 공기 담배다.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잠깐 멈추고, 담배 연기 뿜듯 하늘을 향해 토해내는 것. 실제 담배는 피워본 적 없지만 어떤 기분인지는 안다. 타락천사로 살아온 세월과 맞물려 뭔가 일탈을 하는 기분도 들어 가끔 하는 행동이다.



“견회형..덕재 진짜 세..형이라도 무리야..”



발치에 찌그러져 있던 천득이 코피를 질질 흘리며 내 발목을 붙잡았다. 난 피식 웃고는 천득의 머리를 손으로 쑤석거린다. 약간 힘을 주면서.



“천득아.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할 근본이 아니란다. 방금도 두들겨 맞아놓고 누굴 걱정하니.”



“아니 걔 진짜 싸움 잘한다니까..나도 시비 걸었다가 도망쳐 오는 길이라구..이 부근 가출한 애들 죄다 휘어잡고 다니는 놈인데..”



가출한 애들. 별로 내키지도 않는데 그냥 가버릴까, 하던 마음의 동전이 뒤바뀌었다. 난 공기담배 손짓을 하던 손을 털었다. 진짜 담배를 버리듯 조금 거칠게. 천득이 녀석이 뭐라고 떠드는 건 들리지도 않았다. 잠시 후 정말로 제법 머릿수가 있는 어린애들이 몰려왔을 때, 내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저씨. 내가 덕재야. 아직 날 모르나 본데, 대가리만 땅에 대면 그냥 보내줄게. 진짜야. 안 때려, 안 때릴 테니까.”



덕재란 녀석은 제법 덩치가 있었고, 왼발을 앞으로 내민 채 몸을 약간 사선으로 하는 모습에서 싸우는 법을 아는 듯했다. 거느린 부하들의 수도 무시하기엔 제법 많다. 겁을 먹은 아저씨 하나쯤 놀려 먹고 싶어하는 듯 하지만, 그런 기대에 부응할 만큼 난 그리 착한 성격은 아니라서.



“인경이라고 아냐?”



난 눈을 똑바로 맞추며 던져 놓았다. 갑작스런 질문에 뭐야? 하는 표정이 날아온다. “덕재야. 이전에 원조교제 시켰던 그 여자애..”옆에 있는 녀석이 속삭이듯 하자 기억이 난 듯 킥킥 웃는데, 제법 뱀을 닮은 잔혹함이 묻어났다.



“아, 알지. 알아. 삐쩍 말라서 인기는 없었지만 덕분에 오토바이 사는 데 도움은 됐어.”



“사환이가 거두었을 때 임신 5개월이었는데. 너희들 손을 탔던 때인가.”



“아 그런 걸 뭘 하나하나 기억을 해. 몰라. 일년 전 쯤에 우리 크루에 온 것 같기는 한데..그런 건 왜 물어? 아, 아저씨도 원조교제 하고 싶어서? 돈만 주면 얼마든지..”



“그래..그렇군.”



난 방긋 웃었다. 그 웃음의 이미지가 지워지기 전 앞으로 나서 덕재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는 순간. 건방지고 자신만만했던 표정이 고통으로 일그러지는 게 확실하게 보인다. 지금 난 화가 난 상태였다. 스무 명쯤 되는 고등학생들을 반 죽여 놓는 건 어려운 게 아닌 노릇. 바람을 연상시킬 만큼 빠르게 움직일 때, 내 주먹이 닿은 녀석 중 한명도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일어나.”



부러진 코뼈를 부여잡고 쩔쩔매는 덕재를 차갑게 내려다본다. 몇 번 맞아본 적 없는 녀석인지 유달리 아파하는 모습이 짜증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 앞에 쭈그려 앉았다. 덕재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똑바로 눈을 바라본다.



“눈 제대로 떠라. 난 만만하게 보이는 건 참을 수 있지만 날 두려워하는 건 용서하지 않는다.”



“으..아..”



이미 금박 은박은 벗겨졌고, 내 눈 앞에 있는 건 겁에 질린 소년뿐이었다. 방금 말한 대로라면 아주 작살을 내놓아야겠지만 나만의 원칙을 지키기엔 상대가 너무 약하다. 난 쓰레기를 버리듯 머리카락을 붙잡은 손을 밑으로 내려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 여자애들 함부로 굴렸다는 소리 나오면 가만히 두지 않는다. 지금 기분 같아선 진짜로 부셔버리고 싶지만 이 정도로 참아주는 줄 알아.”



완전히 무너진 덕재를 향해 말한 후, “너희들도 제대로 알아 둬라. 한번만 더 이런 일 생기면 그땐 봐주지 않을 테니까.”다른 것들에게도 다 들릴 만한 소리로 선언했다. 신음과 두려움으로 범벅된 소년들의 모습이 이전 보스코 신부를 해치려 했던 무뢰한들의 형상과 겹친다. 아까부터 쩔쩔매고 있던 천득이 녀석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너 좋으라고 싸운 거 아니니 오해 마라. 어쨌든 가출한 애들이란 말을 한건 잘했다. 아까부터 궁금한 일이었으니.”



난 휙 하고 걸어가 버렸다. 공기 담배를 더 빨고 싶은 마음을 짓이기듯 걸음에 힘을 주면서.

월, 수, 금, 일 연재
이전 01화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