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말했듯 난 인간이 습득할 수 있는 기술은 전부 가지고 있었다. 부부의 시선과 말투, 몸짓만으로도 거짓말을 한다는 걸 안다. 곧 손님들이 들어오고 가게는 분주해졌다. 겉으로 보기엔 열심히 호프집을 경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활을 위한 돈은 충분히 벌 수 있을 터. 석범은 술만 마시는 듯하면서도 가게를 치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본래 선행과 고행을 하는 이들은 가슴이 뜨거운 사람들이다. 일견 겸손하고 선량해 보이는 이면에 악과 독이 소름끼치도록 고여 있는 영혼들. 난 주변 말소리에 묻히는 어투로 짧게 말했다.
“그만 일어나자.”
나는 현금으로 계산을 했다. 돈을 받을 때의 표정에서 단서를 유출한다. 아까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에서 사이코 패스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현금을 내자 카드 계산에 비해 확연히 기뻐하는 게 보인다. 악행의 쾌감과 금전적인 보상에 젖어 있군.
시장 안쪽의 좁은 골목에 이르렀다. 주로 곱창전골을 파는 식당이 몰려 있는 곳인데 외진 곳이기도 하고 술 취한 사내들이 주로 보여 인적이 드물었다. 인간의 본성에 대해 논쟁할 생각은 없다. 그저 인간들이 있는 곳에서 악이 사라지는 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떠올릴 뿐.
“뭐야. 술 마시러 온 거야?”
골목 입구에 사내 둘이 서 있다가 우리를 보자 무례하게 내뱉었다. 위협이라도 하려는지 버터플라이 나이프를 휙휙 돌려대지만 내 눈엔 저러다 손가락 잘리겠네, 비웃음만 들게 할 뿐. 처음 보는 얼굴인데 비겁하고 잔인한 성격이 얇은 눈가에 치덕치덕 발라져 있었다.
“안에 좀 들어가 보려고 하는데.”
“여기 별로 맛없어. 다른 데 가.”
“들어가야 겠으니 비켜.”
석범이 내 앞을 막으며 나섰다. 품이 넉넉한 츄리닝에 근육질 육체가 가려져서 일까. “꺼지라고 했잖아. 피보고 싶어?” 사내는 똑바로 쥔 나이프를 내밀었다. 그 순간 석범은 바로 손목과 옷깃을 붙잡았다. 그 동작이 너무 빨라 복싱의 왼손 잽에 비견될 정도. 허리를 틀면서 완벽한 각도와 비할 데 없는 힘으로 던져 버린다. 업어치기가 제대로 들어가 사내놈은 그대로 실신했다.
“이 자식이!”
덩치가 상당한 다른 놈이 벽돌을 집어 들며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나도 좀 움직여 볼까. 난 오른손을 허리에 댄 후, 곧게 뻗은 왼손을 회수하며 정권 찌르기를 날렸다. 굳은살이 못처럼 불거진 주먹이 벽돌을 부수며 험악한 얼굴의 콧대로 파고든다. 비틀어진 코에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가운데 큼직한 거구가 수직으로 무너져 버렸다.
“그러게 말로 할 때 들여보내 주면 되잖아. 우리가 술 마실 때 민증 보여줄 나이냐.”
주먹을 쓸 때 재미없는 농담을 하는 게 내 버릇이다. 석범의 눈은 호랑이처럼 빛이 난다. 흥분으로 인해 감각이 다 깨어난 상태. 좁은 골목엔 곱창 특유의 냄새와 싸구려 술의 절은 내. 독한 담배 연기로 채워진 타락으로 가득했다. 이 골목에 연결된 가게는 대략 7군데. 사환이 알아낸 곳 외의 곳에서도 미성년자들에게 술 담배를 파는 곳이 있으리라.
우리는 일단 목표로 삼은 가게로 들어갔다. 몸에 기름기라곤 없이 삐쩍 마른, 여우 상을 한 아주머니가 고개를 내민다.
“뭐야. 술 마시러 왔수? 나이 좀 들어 보이는데. 입구에서 안 막고 뭐했대.”
이번엔 내가 석범보다 먼저 움직였다. 난 손을 뻗어 여자의 목을 콱 움켜쥐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버둥대느라 들고 있기 불편해서 반대 손으로 배를 한번 갈긴다. 그제야 좀 팔 다리가 얌전해졌다. 석범은 미리 출력해 놓은, 아까 호프집 부부의 사진을 보인다.
“이 사람들. 알지?”
“모, 몰라요..왜 이래요..”
난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힘을 빼고 있던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엄지를 여자의 앞니에 대고 기운을 쓰자 생 이빨 하나가 뽑힐 듯 했다. 진짜로 마음먹으면 잇몸을 적시고 입 밖으로 나오는 핏물이 옷까지 흘러내리리라.
“똑바로 말 안하면 혀만 남을 때까지 이빨을 죄다 작살내겠어.”
“아이고메..사..살려 주세요..”
“이 사람들 알아, 몰라?”
“아..알아요..이 가게 주인들이에요..”
난 손을 놓았다. 종이가 구겨지듯 쓰러지는 여자. 뒤가 구린 일을 하고 있으니 경찰을 부르겠다니 하는 말도 못하는 거겠지. 폭이 좁은 내부에는 방이 여섯 개 보인다. 들려오는 말소리를 들으니 십대 특유의 가벼움이 취기에 절어 뒹굴고 있었다. 그중 하나의 문을 열어젖혔을 때, 안면 있는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다.
좌식 식탁에서 끓고 있는 기름기 가득한 곱창전골. 맥주병과 소주병은 한 무더기로 쌓여 있다. 담배연기는 말할 것도 없는 너구리 사냥이었고, 어린 티가 줄줄 나는 얼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중 가장 겁먹은 얼굴은 이전 내가 손봐준 덕재라는 녀석.
“다시 보지 말자는 말은 안했지만 이렇게 만나기는 싫었는데 말이다.”
나를 두려워하는 이는 용서하지 않는다. 그 원칙을 어길 때는 생각보다 많다. 특히 이런 어린애들을 대할 때는. 우두머리인 덕재가 겁을 먹자 평소 학교에서 거들먹거릴 녀석들이 슬금슬금 눈치만 보고 있었다.
“벌써 경찰서에서 나온 거냐.”
석범의 목소리엔 분노가 느껴졌다. 절도죄를 저질렀어도 몸 멀쩡히 빠져나온 게 이해가 되지 않는 듯이. 나 역시 마음 같아선 피를 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석범의 어깨에 손을 얹는 건 나름 최선을 다해 욕구를 억제한 결과물.
“그만 두자. 오늘 생각보다 주먹을 썼으니까. 아까 호프집 부부가 이 가게 주인이란 걸 안 정도로 참아주자고.”
“그래야겠죠..”
깊은 한숨 소리가 긴장된 공기를 와해시킨다. 어린 녀석들이 뭐라 수군대는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난 반 끌고 가다시피 해서 석범과 함께 골목을 나선다. 아까 손봐준 것들이 여태 땅에 까라져 있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은데. 밟고 지나가고픈 욕구를 참는 게 영 힘들었다.
아까 내가 여자를 손봐 줄 때 석범은 스마트폰으로 모든 걸 기록하고 있었다. 경찰서에 가서 증거물로 쓰기에 충분한 수준. 며칠 후 급습한 경찰에 의해 호프집 부부가 끌려가는 와중 우리는 멀리서 그 모습을 보았고, 서로에게 고개를 끄덕해 보였다.
우리가 폭력 행위를 한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고소를 걸면 응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쪽에서 겁을 먹고 쉬쉬했으니까. 내 얼굴을 모르는 이들이 그렇게 둥지를 틀고 있다는 게 더 의아한 사실이었다. 이후 소문을 들으니 호프집 부부는 생각보다 더 은밀하게 일을 꾸미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십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술집에서부터 식당 아줌마. 보초를 서는 이들까지 낯선 이들로 고용한 것. 어쨌든 일이 마무리된 게 다행이었다.
그 사건이 있은 지 며칠 후. 아침에 출근한 리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떤 기분인지 짐작이 가는 게 미안한 기분이 든다. 케이크 데코를 하는 동안에도 계속 신경을 쓰는 게 눈에 보였다. 난 먼저 말했다.
“미안해. 위험한 짓은 안하겠다고 말 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나에게 더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질책으로 다가온다. 이전 덕재란 녀석을 혼내준 걸 천득이 여기저기 떠들고 다녔고, 리아는 나에게 그런 일은 하지 말라 간절히 부탁했다. 우리가 연인 사이가 아니라는 게 더 가혹할 때가 있었다. 나를 친오빠처럼 여기고 있는 리아에게 실망을 안겨주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 어쩌면 평소 멀리 떨어져 있는 현희보다 나를 더 걱정하는 게 리아일지 모른다. 나와 석범이 대담한 행동을 한 것이 리아에겐 큰 고통이 된 듯했다. 머리로는 인정해 줄만한 일을 했다 생각하지만 사람의 감정이 마음처럼 쉽게 움직이면 인간에게 근심이란 없었겠지.
“제가 아무리 말려도 견회 오빠는 그런 일을 계속 하겠죠.”
침묵의 방향이 나에게로 깃대를 세웠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타락천사로 늑대가 되어 세상을 유랑할 때가 더 좋았을지 모른다. 적어도 그때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맺지 않았으니까. 리아는 리본 모양의 멋진 크림 장식을 만들었고, 짤주머니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계시단건 알아요. 제발 다치지만 말아주세요.”
리아로선 최대한 마음을 억제하며 한 말이었다. 그 내면에 깔린 걱정을 알기에 나 역시 기분이 가라앉는다. 나도 모르게 공기 담배를 피우려다 이내 손을 떨구었다. 한번 더 미안하다는 말을 꺼내지 못한 걸 후회하면서.
어색한 분위기가 오래 가지 못하는 게 다행이었다. 곧 손님들이 오기 시작하고, 우리는 평소처럼 분주히 움직여야 했으니까. 일을 하는 사이 시간은 흘러갔다. 어둑해질 때가 되자 나는 되도록 밝은 목소리로 제안한다.
“같이 초콜릿이라도 먹으러 갈까?”
리아는 알면서도 속아준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 둘 사이에 좋지 않은 기류가 흐를 때마다 내가 하는 말이니까. 가게 문을 닫은 후 가까운 백화점으로 가는 동안, 우리는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늘 가까이 있어 이야기가 단조로울 법도 했지만 그런 시간까지 소중하게 여겨진다. 남자 손님들 쫓아내는 말까지 나왔을 때 나는 생각난 듯 말했다.
“선호하고는 요즘 연락하고 있어?”
바로 대답하지 않는 리아. 뭔가를 생각하듯 하다가 조금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가까운 이웃이니까 자주 얼굴을 보긴 해요.”
아무래도 내가 불편한 질문을 한 모양이다. 리아의 태도에서 난감함이 묻어나는 걸 보면. 하지만 선호와 잘 되기를 바라는 내 마음도 진심이었다. 대답을 흐리는 리아의 손을 잡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내 모습.
“난 리아와 선호가 잘 되었으면 좋겠어. 둘 다 서로를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앞으로 행복하길 바래.”
진심을 느낀 탓일까. 리아는 살짝 입을 벌리며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곧 의기소침하게 가라앉는다.
“사실..선호 오빠가 요즘 저를 피하는 것 같아서요. 보름 정도 되었는데..같이 있을 기회가 있어도 자리를 비우곤 하고..저를 싫어하는 건 아니겠지만 조금..거리감이 생긴 것 같아요.”
의외의 말이었다. 선호는 사환 신부와 연습도 열심히 하고 언제나처럼 필사 작업이나 글짓기에 열중하고 있었으니까. 나와 만날 때도 특이한 사항은 없었다. 혹시 리아를 떠보는 건가 싶기도 하고 아무튼 내 예상 밖이었다. 다음에 만나면 심리를 파악하게끔 말을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목적지인 백화점 1층의 초콜릿 전문점에 왔을 때였다. 방금 우리가 나눈 말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선호 녀석이 있었다. 난 여어..하고 말을 걸려다가 리아가 있음을 알고 거두었다.
리아는 선호를 자세히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이 화이트 데이다. 발렌타인 데이와 달리 종교적인 색채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성의 마음에 답례하는 의미를 가진 날. 나에겐 성 발렌티누스의 죽음을 생각나게 한다. 황제의 허락없이 사랑하는 이들을 맺어준 죄로 순교한 이가.
선호는 화이트 데이 기획 상품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는 눈치였다. 작은 상자는 금방 하나 고른 것 같은 데, 그거과 같은 작은 사이즈와 중간 사이즈 사이에서 꽤나 고민을 한다. 선호라면 어머니 것을 먼저 골랐으리라. 아마 다른 하나가 리아 것이겠지. 직원이 신경 쓰이듯 바라볼 때가 되어서야 주저하던 손에 확신을 주고 중간 사이즈를 손에 쥐었다. 그 모습을 줄곧 바라보던 리아의 눈에 행복감이 어린다. “초콜릿은 나중에 먹자.”나는 가볍게 리아의 손을 잡고 선호의 모습을 뒤로 했다. 우리는 백화점 지하 1층으로 가서 세일 소리를 높이는 제과점의 빵을 조금 사서 나왔다. 리아가 좋아하는 뺑 오 쇼콜라가 남아 있어 다행이었고 나 역시 식빵을 하나 골랐다. 시현이 만드는 식빵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어쨌든 먹을 만은 하니까. 우리는 지하 1층과 연결된 무대 앞 테이블에서 빵을 먹었다. 선호는 지금쯤 집에 돌아갔을지. 혹시 만나는 건 아닐까. 아까부터 줄곧 행복감에 취해있는 리아의 모습에 나 역시 기분이 좋아진다. 백화점의 불이 꺼지기 시작할 때쯤 우리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갔다.
리아를 집까지 배웅해준 후 밤거리를 걸을 때였다. 차가운 공기에 긴장되는 감촉을 느끼며 나도 모르게 공기 담배를 뱉는다. 아까 성 발렌티누스를 생각한 탓일까. 이상하리만치 감이 예민해지면서 팔 다리에 힘이 뻗치는 게 느껴졌다.
잊지 말지어다. 너의 결정으로 인해 피를 흘린 이들이 있다는 것을.
난 양 어깨를 감싸쥐며 크으..하고 신음을 흘렸다. 이천년 세월을 늑대로 방랑하다가 인간으로 태어나면서 여러 즐거움을 누릴 수 있었지만, 나의 형벌은 끝나지 않았다. 천사들의 목소리를 듣거나 영적인 접촉이 있을 때마다 엄청난 고통이 몰려오는 것. 조현병 환자들의 극심한 환통과 맥락을 같이 하는 아픔은 내가 혼자 있을 때를 놓치지 않고 엄습해 왔다.
‘너에게 명령한다. 현명함을 거부한 영혼이여.’
“내..영혼에서 물러나라, 가브리엘. 난 네 종이 아니야.”
난 이빨을 딱딱 부딪히며 힘겹게 중얼거렸다. 아마 근방에는 아무도 없을 터. 나에게 영적 접촉은 인간들의 고문과 닮아있다. 내가 결국은 주의 뜻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실감시키니까.
‘너의 가까이에 이단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주께선 그들의 오만을 방관하지 않기로 결정하셨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단의 세력은 늘 있어 왔고, 모든 걸 인간들의 어리석음에 맡기고 믿음을 시험하는 주제에..이번엔 어지간히 눈에 거슬리나 보군.”
‘주께서 너의 자의식을 인정해 주심에 감사해라. 네 육체는 내 관할 하에 있으며, 주는 내가 너에게 분노할 것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곧 주를 불편하게 한 이단은 표면에 들어날 것이다. 애써 그들을 찾으려 하지 마라. 그들이 네게 다가올 것이니. 무지한 영혼아. 네게 인간의 힘을 드러낼 것을 허락한다. 주의 평온을 위해 두 눈을 감고 말씀을 따르라.’
가느다란 철사로 관절을 꿰어 끌어당기는 듯한, 피 흘리는 마리오네트가 된 기분이 툭 하고 끊어졌다. 가브리엘의 기운은 사라졌고 신체의 고통도 멎는다. 난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를 드러내었다. 자기 방어를 위해 인체에 걸려 있는 일종의 한계점. 극한의 수련으로 깰 수 있는 그 선을 나는 쉽게 넘을 수 있었다.
“결국 나는 주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없는 건가..”
난 웃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함께 있다는 사실 때문일까. 인자하시며 현명하시고 생각보다 자주 분노하는 그 기운이 날 감싸는 게 느껴진다. 성 발렌티누스의 헌신으로 인해 행복하게 된 부부들을 주시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멀리서 바라보았던 그의 죽음까지도.
“괴로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 공포. 영적 연결이 끊어졌다지만 내가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아이보리 빛 코트를 입고 있는 15세 된 소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코트에 달린 두건 밑으로 늘어진 긴 머리카락은 무서울 만큼 아름다웠다. 노파의 그것처럼 연륜이 담긴 눈동자와 곱고 정숙함이 드러나는 외견은 성모 마리아. 그 외의 명칭이 어색할 정도였다.
“여자이면서 아이인가. 성장함에 따라 강함이 증가하겠군..”
“처음 인사드립니다. 그랏 죠. 저보다 먼저 불꽃으로 빚어진 분.”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산채로 팔 다리를 부러뜨려 버린다.”
“과연 대범하십니다. 연약한 인간 소녀일 뿐인 저를 그렇게나 경게하시다니. 이천 팔백년의 세월을 괴로움에서 살아오신 내력이 있으시겠죠. 이렇게 마주할 수 있음이 그저 기쁨이고 영광일 따름입니다.”
공포는 오래 가지 않는다. 허상은 결국엔 현실이 되니까. 난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모두 일곱 명. 마리아의 형상을 한 소녀와 내가 마주 선 가운데 하나같이 얼굴을 가린 이들이 주변에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체격과 나이가 모두 제각각으로 숨소리조차 참고 있음이 확실했다.
“저는 이 세계에서 ‘여왕의 십자가’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믿음의 집단. 그들의 장입니다. 그랏 죠 님처럼 주님의 말씀을 거부한 죄로 추방된 천사. 나이는 한 달 정도입니다.”
난 쿡! 하고 웃었다. 경멸과 혐오가 뒤섞인 숨결이 고요한 분위기에 무례한 흔적을 남긴다.
“빚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주제에 주의 명령을 거부하고 추방당한 게 자랑거리나 되는 줄 아는 군. 착각하지 마라. 주는 너에게 벌을 준 게 아니야. 인간들을 시험하는 도구로 써먹으려는 거지.”
“그것이야말로 제가 원하는 바. 그랏 죠 님에게 직접 듣게되다니, 기쁨을 허락하심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