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하면 되려나.”
난 빨간 실타래 입구에 코팅된 a4 용지를 시선에 닿을 위치에 붙여 놓았다. 토, 일. 앞으로 주말 이틀 동안 가게를 열지 않는다는 문구. 토요일 문 여는 건 오늘이 마지막으로 종훈 할아버지와 손녀 가연은 줄곧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거의 2년 동안 매주 토요일마다 찾아와 주었던 두 사람,
“앞으로 금요일 저녁에 와서 케이크 사갈 거예요.”
가연은 수줍게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지금 스물 여섯 살이지만 지적 능력은 초등학교 2학년 수준. 복지관 식당에서 일할 땐 제법 손끝이 야물었지만 세상의 풍파에서 한 걸음 벗어나 있었다. 종훈 할아버지가 출퇴근길을 살피며 혹여 안 좋은 일이 있을까 걱정하는 건 알고 있다. 부모와 사별한 손녀가 혼자 남겨질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도. 잠깐 의자에 앉아 쉬고 있던 리아는 상냥한 눈빛을 보내며 입을 열었다.
“제가 금요일 날 오실 때 에스프레소 원액을 텀블러에 따로 담아드릴게요. 바로 내린 것만은 못하지만 저희 가게 원두는 향이 좋으니..주말에 집에서 뜨거운 물이나 우유에 섞으시면 충분히 드실 만 할거예요.”
“고마워요. 리아.”
리아 보다 연상이지만 마냥 어린아이 같은 가연에게 메이드 복을 입은 차림새가 정말 예뻐 보이는 것 같았다. 금요일 저녁에 온다지만 앞으로 리아를 만날 기회가 없으려나. 난 빨간 실타래의 모습을 온전히 담으려는 듯 말없이 가게를 보는 종훈 할아버지에게 말하듯 제안했다.
“가연 씨. 메이드복 한번 입어보겠어?”
“입어도 돼요?”
가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섯 벌이나 더 있으니 선물하는 것도 괜찮겠네. 종훈 할아버지가 환한 얼굴로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리아도 정말 좋은 생각이라 생각한 듯 눈에 총기가 돌고, 기쁨을 참지 못해 폴짝 폴짝 뛰는 가연은 무척이나 귀여웠다.
리아가 안쪽으로 가연을 데려간 후 몇 분 후. 빅토리아 풍 메이드복을 입은 가연이 걸어 나왔다. 내가 영국에서 사온 옷으로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묘사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간결한 디자인이지만 수직 레이스로 장신된 앞치마와 헤어 캡은 품격이 느껴진다. 난 가게 안의 거울을 가리키고, 가연은 걸음을 내딛는 것도 두근거리는 듯 천천히 자신을 비춰 보았다.
“정말 예뻐요. 가연 언니.”
리아는 한 걸음 뒤에 서며 환히 웃었다. 믿을 수 없는 듯 자신을 바라보던 가연은 한바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하늘거리는 스커트와 앞치마의 움직임에 감동 받은 듯 얼굴엔 홍조마저 드리워 졌다. 메이드 복 차림을 한 두 아가씨를 바라보니 나조차도 설레는 기분. 종훈 할아버지는 숨을 내쉬듯 입을 벌리더니, 감격한 듯한 눈에 물기가 어렸다.
“며늘 아가 젊었을 때랑 어찌 저리 똑같누..”
작은 목소리였다. 기쁨에 가득 찬 손녀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치마를 살짝 들어 올리거나 다를 옆으로 뻗는 듯 메이드복의 매력에 흠뻑 빠진 가연과 종훈 할아버지의 말을 들은 리아.
“언니. 가져가셔도 돼요. 사이즈도 딱 맞네요.”
“정말? 정말로 그래도 돼요? 진짜로?”
“그럼요. 가게에 몇벌 더 있는 걸요. 옷감이 좋아서 관리는 다림질만 잘 하셔도 충분해요.”
“할아버지. 받아도 되죠? 그렇죠?”
“그래. 견회 씨한테 감사합니다. 해야지?”
가연은 내 손을 덥석 잡더니 마구 흔들었다. 아아, 시대를 막론하고 예쁜 것을 선물 받은 아이들이 이런 표정을 하곤 했지. “고마워요! 견회 오빠! 정말 고마워요!” 환한 기쁨에 나는 죄책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고작 옷 한벌로 이렇게 내게 좋은 감정을 주는 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너무나 작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게 좋아? 지금 입고 있는 건 일하러 갈 때 입지 말고..내가 더 간략하고 실용적인 메이드 복으로 하나 주문해 둘게. 그 동안 우리 가게를 찾아준 보답이야.”
“우와..우와아! 진짜 좋아! 너무너무 좋아! 금요일 마다 케이크 사러 올게요. 많이 살게요!”
“평소처럼 두 조각만 사가면 돼. 가연이 사 갈 케이크는 따로 빼놓을 테니 일 끝나면 천천히 오렴.”
“이 옷 너무 좋아요! 예쁘고..정말..정말로 예뻐요..”
종훈 할아버지는 잠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기뻐하는 손녀의 모습을 깊은 눈빛으로 바라볼 뿐. 아픈 손가락이라는 말도 사치일 만큼 소중하고 염려되는 가연이, 예쁜 모습을 하고 이렇게나 좋아하는 현실을 믿을 수 없어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 정도면 그 동안 토요일마다 와준 것에 대한 예의는 되겠지.’
이단과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니 자유로이 움직일 시간이 필요했다. 리아에겐 가게를 정리하는 준비를 하면서 이직에 필요한 공부를 한다고 말해 두었다. 하루가 비게 된 리아를 위해 뭘 해야 할지에 대한 생각도 했기에, 난 언질해 두었던 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인 세시 반에 정확하게 가게 문이 열렸다. 단정한 치마 정장 차림이 아주 잘 어울리는 이상적인 몸매. 어색하거나 과한 느낌이 들지 않는 큰 키와 곱게 땋아올린 아름다운 흑발까지. 일본화를 연상케 하는 차분하고 섬세한 이목구비는 어떤 찬사로도 표현할 수 없었다.
“아이고. 걸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아씨.”
난 두 손을 모으며 눈을 반짝였다. 내 적 시현의 아내이자 장애인들을 돌봐주는 생활형 학원을 운영하는 심은아. 근방에서 은아씨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가연과 신현을 비롯해 자립이 버거운 이들을 맡아서 보호하기도 하고 사회화 적응도 돕는, 장애를 가진 아이들이 있는 부모들에겐 구원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학원 원장이었다.
“반가워요. 견회씨. 오랜만이네요. 윤마리아 양.”
“안녕하세요. 선생님.”
오랜만에 이름 전부를 불렸기 때문일까. 혹은 약간의 긴장 때문이었는지 리아는 은아씨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시현은 빛나는 나무 운영으로 바쁘기에 일부러 은아씨가 시간을 내서 와준 상황. 그녀는 학원 일에 비중을 두면서도 가끔 빛나는 나무에서 커피를 만들 때가 있었다.
“일단 윤마리아 양이 만든 커피를 좀 확인해 보고 싶어요.”
“네. 에스프레소와 카페 라테를 해 보겠습니다.”
은아 씨는 테이블에 앉아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일견 조용한 태도 같지만 눈동자엔 총기와 열의가 감돌았다. 리아 역시 무슨 의미인지 알기에 몸놀림이 다소 뻣뻣해진 느낌. 하지만 두려움이나 실수는 없었다. 현실을 정확하게 보고 최선의 답을 찾아내는 게 은아씨의 일상이었다. 시현은 내가 다리를 놓았을 때부터 리아라면 얼마든지 환영한다 했지만 은아씨는 이런 자리를 한번 가져 보고 싶다 말했다. 앞으로 빨간 실타래가 토요일도 쉬기로 했으니 리아를 토요일마다 빛나는 나무에서 아르바이트를 시키게끔. 내가 가게를 완전히 정리하면 주 5일 정규직 바리스타로 고용하고 싶다는 뜻도 전했다.
에스프레소를 자동 버튼으로 해결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지금 리아는 당연하다는 듯 직접 시간을 조절했다. 우리 가게의 에스프레소는 유명 커피 로스팅 업체에서 가성비 제품으로 쓰고 있다. 내가 추구했던 고급스런 산미와 거리가 멀지만 손님들 반응은 훨씬 좋았고, 리아는 틈틈이 에스프레소 머신을 다루고 시음도 하며 가장 이상적인 고소한 쓴맛을 찾아냈다.
에스프레소엔 신선함도 중요한 요소. 리아는 작은 잔에 담겨 얼룩 무늬 크레마가 돋보이는 에스프레소를 반듯한 동작으로 테이블에 놓았다. 잔을 든 손의 새끼 손가락을 대었다가 부드럽게 내리는 몸짓이 새삼 아름답다. 견과를 연상케 하는 향기가 머무는 가운데 은아씨는 잔을 조금 기울여도 보고, 주의 깊게 향을 들이 마시는 등 명검을 점검하는 장인을 연상케 하는 태도였다.
은아씨가 에스프레소를 머금고 가만히 있을 때 리아에겐 자신감이 엿보인다. 커피를 담당하는 건 주로 나였지만 그간 틈틈이 기울인 노력과 관심을 알기에 오히려 내가 긴장이 되었다. 은아씨가 아직 말하지 않았지만 리아는 바로 설탕을 듬뿍 탄 에스프레소를 한잔 더 가져왔다. 은아씨의 피부는 우윳빛이란 표현이 초라할 만큼 완벽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목으로 단맛이 어우러진 에스프레소가 넘어가는 게 보이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내가 천사라는 사실보다 더 현실성이 없었다.
“맛있네요. 제 신랑이 내린 것보다 맛있는 것 같아요.”
보통의 일상 회화 같은 목소리. 은아씨가 시현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고 커피 내리는 실력을 높이 평가하는지는 알고 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극찬. 리아는 거칠게 느껴질 만큼의 감동을 실감하고 있는 듯하다. 이어지는 라테 아트는 가장 기본인 하트와 로제타. 두 잔을 그렸다. 두 패턴을 자유로이 구사할 수 있다면 활용도는 무궁무진. 어머님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시현의 솜씨 정도는 아니었지만 리아 역시 카페에서 일하기엔 충분한 실력이었다.
“고마워요. 이렇게 응해 줘서.”
은아씨는 가벼이 숨을 내쉬며 마음을 정돈했다. 그녀라면 분명 정확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 리아 만큼이나 긴장했으리라.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은 리아는 어깨에 앞치마가 조금 내려간 걸 의식하지 못한 상태.
“내일이라도 우리 신랑이랑 얘기해 보도록 해요. 전 앞으로 윤마리아 양이 토요일 마다 빛나는 나무에서 일하는 것에 찬성하니까요. 실례 많았어요. 견회 씨. 그만 일어나 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일부러 이렇게 와 주시고.”
“저도 감사드립니다. 미숙한 실력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은아씨는 가벼운 손짓 제스처를 취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걸어 나가는 뒷모습으로도 알 수 있는 완벽한 균형 감각. 사환 신부 이상의 무술 실력을 가진 시현 못지않게 그 아내 역시 평범한 인간이 아니었다. 리아의 에스프레소를 정확하게 평가한 사실. 어렵고 까다로운 장애아들을 잘 다루는 것만으로도, 휘하 교사들을 조율하며 쉬는 날 없이 학원을 운영하는 걸로 알 수 있듯 인내심과 지능은 극점 이상이었다.
“수고 많았어. 긴장했을 텐데.”
난 리아의 어깨 밑으로 내려간 앞치마를 정돈해 주며 말했다. 자신감은 있었지만 심적인 부담이 만만치 않았으리라. 리아는 피곤한 기색의 웃음으로 답한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은아 선생님이 인정해 주신 거니까..뭔가 제 손으로 이룬 느낌이 들어요. 부부가 함께 하는 빛나는 나무에 참견하고 싶지 않았다는 제 생각은 정말 어리석었던 것 같아요. 저도 이 부근에서 명물인 가게의 한 부분이 되고 싶어요.”
“그렇게 말해 주니, 나도 미련없이 빨간 실타래를 정리할 수 있겠어.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잖아. 같이 힘내보자고. 윤마리아 양.”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에요. 견회 오빠.”
우리가 함께 해온 세월은 서로에 대해 잘 알게 해 주었다. 다음 날 사환 신부와 선호가 함께 하는 봉사활동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서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움직이기 편한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리아는 건강하고 사랑스러웠다. 독거노인들과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에게 맛있는 저녁 식사를 대접하는 한 때. 십대 시절 중국요리 집에서 일했던 사환은 무술의 고수는 요리의 고수라는 말에 딱 어울렸다. 어린 아이들이 좋아하는 짜장면과 노인들이 편하게 먹을 수 있는 하얀 짬뽕을 조리하는 손놀림은 경쾌하면서 놀라울 만큼 빠르고 정확하다.
양파를 써는 일을 맡은 리아 역시 아주 빠르게 칼질을 하고, 다른 야채를 다듬는 선호의 손길은 멈출 줄 몰랐다. 서로에게 등을 돌린 상태로 일하지만 두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연결된 것이 느껴진다. 난 손이 많이 가는 만두를 담당한 가운데 불 앞에서 정신없이 땀을 빼는 사환을 보조하곤 했다. 복지관 식당을 사용한 이번 행사는 첫 번째 식사에서부터 감탄사로 가득했다. 입에 짜장을 묻혀 가면서 열심히 먹는 아이들. 하얀 국물을 입에 떠 넣자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는 노인들. 즐거움으로 가득한 식당 분위기는 주방에서도 충분히 느껴진다.
“너무 맛있었어요. 정말 고마워요.”
“짜장면 최고예요!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더 맛있어요!”
“만두까지 손으로 다 빚느라 얼마나 힘들었어요. 백화점에서 파는 것 같았어요.”
“이름 있는 식당도 이렇게 맛있진 않을 거예요. 모처럼 호강을 했네요.”
주방 일을 끝내고 피곤한 기색으로 모인 우리들에게 전해진 말. 거의 다섯 시간을 쉼 없이 일한 것에 대한 보답치곤 후한 편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돌아갔을 땐 저녁 일곱 시였다. 난 공기 담배를 빨았고 사환 신부는 막대 사탕을 입에 넣고 피로한 여운을 달랜다. 리아와 선호는 같은 방향으로 앉아 아까까지만 해도 노인들과 아이들로 가득했던 식당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의 적막함마저 아름답게 여겨지는 듯이.
두 사람은 거의 십분 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린 아이였을 땐 자주 어울려 놀았고 학생 시절에도 불편하지 않게 지낸 사이. 23, 25살인 지금에 와서는 서로에 대한 마음이 깊어진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어르신들하고 아이들이 맛있게 먹은 모습이 참 좋았어. 난 그런 걸 보기 위해 봉사활동을 하는 걸지도 몰라.”
먼저 입을 연건 선호였다. 십대 아이들에게서도 보기 힘든 맑은 눈빛과 온화한 목소리. 유럽 역사에 남은 전설적 화가들의 모델이 되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 같다. 그리스 신상 중에서도 저토록 아름다운 청년은 드물겠지.
“선호 오빠는 참 착한 사람이에요.”
리아의 대답에 깃든 진심과 기쁨. 눈에 비치는 미모 이상으로 선량한 마음씨가 빚어낸 형상은 오랜 시간 구전 되어온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섬세함을 연결해 장엄하게 표현한 성인들이 살아있는 걸작 그림책을.
난 공기 담배를 털어내고 사환은 사탕을 으적, 하고 씹었다. 선호와 리아는 자신들의 대화가 우리에게 들리는 걸 신경 쓰지 않았다. 혹은 잘 알고 지내는 어른들이 들어 줬으면 하는 눈치이기도 하고..우리야 두 사람이 잘 될 거라 믿고 있으니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무척이나 기쁘다.
“난 착하다는 말..별로 좋아하지 않아. 대하기 쉬운 사람처럼 생각하는 것 같아서..내가 겁쟁이니까 그렇겠지만 자신감 있는 사람들이 부러운 걸. 착한 사람이 바보라는 말도 조금은 수긍이 가기도 하고..”
“바보는 자기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생각해요. 선호 오빠는 늘 노력하면서도 힘든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 왔잖아요. 그런 자신에게 도취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텐데..오히려 자신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선호 오빠는 정말 현명해요.”
“그런 말..처음 들어. 늘 답답하고 재미없게 산다는 말만 들어서..리아야 말로 열심히 생활하잖아. 빨간 실타래가 인정받는 건 견회 형의 훌륭한 운영도 있지만..리아의 노력이 큰 영향을 끼친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부끄럽지만..그렇게 말해줘서 기뻐요. 고마워요.”
이야기를 하면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 모습이 더욱 애틋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것. 안겨드는 아이들 때문에 돈 보스코 신부님의 옷자락이 늘 헤어져 있던 기억이 난다. 작은 관심과 따뜻한 눈빛에 너무나 감격하고 기뻐하던 모습이.
진정한 사랑의 시련이란 이런 게 아닐까. 리아의 하얀 손등이 조금씩 떨려왔다. 말없이 앞을 바라보고만 있는 선호에게 닿으려는 듯. 사환과 내 시선을 선호가 의식한 것 같았다. 선호 역시 주저하고 있던 듯하다. 가늘고 긴 여성적인 손가락. 하지만 오랜 세월 봉사를 해온 사내다움도 엿보인다. 선호는 비싼 초콜릿 앞에서 고민하던 그때처럼 주저하다가, 용기를 내어 리아의 손등에 손가락 끝을 대었다.
“건전하군.”
“건전하지요.”
사환과 나는 동시에 말했다. 이미 우리의 대화 따위 선호와 리아에겐 들리지도 않겠지. 이십대 한창 남녀가 보이는 애정표현 치곤 지나치게 소박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보기엔 참 좋았다. 손깍지를 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손을 대고 있을 뿐. 그럼에도 두 사람의 얼굴엔 진한 홍조가 번져 있다.
“구세주 예수님. 저희를 위하여 아무런 죄도 없이 극심한 모욕과 사형 선고를 받으셨으니 죄인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영원한 벌에서 저희를 구원하소서.”
얕은 자살 행위에 가까운 고통을 느끼면서도 난 기도문을 입 밖으로 내었다. 사환은 즉시 대답했다.
“예수님께서 희생하심으로서 세상 사람들이 얻은 평화는 저런 모습일지도 모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