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정도 시간이 흐른 뒤였다. 현신 할머니의 소문은 점점 시장에 퍼져갔고 좋은 평판 일색으로 치장되었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영험함을 베푸는 신비한 할머니. 리아 역시 그런 이야기에 자신이 너무 편협하게 생각했나, 고민하는 듯 했다. 토요일 오후가 되었을 때 난 따로 만든 딸기 무스 케잌을 챙겨 천 가게 골목으로 향한다. 내가 죽여야 할 사도에게 마음을 쓰는 이유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시장 아주머니들의 고단한 삶을 알기에, 의도가 무엇이든 좋은 일을 하는 것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은 걸까.
일부러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골랐다. 오전에만 이야기를 들어주고 오후가 되면 일찍 잠드는 패턴도 알려져 있다. 사도가 지내는 방에 가까이 갔을 때,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아주머니들은 없을 시간인데.
“할머니 연기 아주 잘하는데, 나랑 손잡으면 큰 돈 벌게 해 줄 수 있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 근방에서 세력을 키우는 여자 국회의원 목소리. 단물만 빨아먹고 쓸모가 없어지면 가차 없이 버리는 걸로 유명했다. 여러 사이비 종교와 유착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신 할머니는 대답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지금 방문 열고 들어가기엔 모양새가 안 좋지만 귀찮은 일은 싫었다. 난 문고리를 열었고, 기모노를 곱게 차려 입은 사도 앞에 오만원 짜리가 가득 쌓인 돈뭉치가 있는 걸 보았다.
“지금 중요한 이야기하고 계시니까 나가.”
의원 옆에 서 있던 두 사내가 나를 가로 막았다. 킥, 하고 웃음이 나오고..난 일본 인술의 회전 치기로 동시에 턱을 후려쳤다. 턱이 깨지지 않을 수준으로 힘을 조절해서 턱을 붙잡고 쓰러지는 정도. 비서들이 일순간에 당해 쓰러지자 의원은 당황한 게 역력했다.
“그냥 나가세요. 화내기 전에.”
“으, 으흠. 흠! 할머니. 내가 한 얘기 잘 생각해 봐요.”
비칠거리는 비서들과 함께 의원이 나가자 사도는 나를 올려다봤다. 난 케이크를 내려 놓으며 자리에 앉는다.
“인간들은 여러 가지 성격이 있거든. 같은 대상을 가지고도 선하게 대할지, 악하게 대할지 알 수가 없어.”
“아리마가 그랬어.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면 인간들은 그런 일에서 아주 멀어져 행복하게 될 거라고. 그땐 우리도 마음껏 놀 수 있다고. 그 날을 위해 당신과 먼저 놀아야 한다고 수백, 수천 번씩 말했어.”
“그렇구나. 그렇다면..어쩔 수 없겠군. 놀자.”
난 손을 내밀었다. 현신 할머니는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일 뿐. “잡아. 나가서 돌아다니다 오자고.” 사도의 눈동자가 나와 마주쳤을 때, 그 안에 비친 나는 온화하게 웃음 짓고 있었다. 주름진 손이 조금 내밀어져 주저하는 걸 보고만 있지 않는다. 난 손을 잡고 부드러운 동작으로 일으켜 세웠다.
잘 정돈된 기모노 차림의 할머니와 청바지에 흰 남방를 걸친 청년이 함께 시장을 거닌다. 마침 저녁이 다 되어 활기의 끝자락에 고양되는 것도 무리가 아닌 노릇. 현신 할머니는 시장에 자리 잡은 이후로 방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다. 손을 잡고 걷는 우리의 모습에 사람들은 말을 걸기도 하고 멍하니 바라보거나 수군거렸다. 나와 사도는 그런 관심에서 한발짝 벗어나 있었다. 난 손으로 짚어가며 시장에 가득한 여러 좌판에 대해 설명했다.
“채소와 과일을 파는 곳이야. 저기는 생선 같은 해산물을 취급하고..여기는 정육점. 만두집. 빵집. 여러 가지가 있는 슈퍼..”
내 설명에 현신 할머니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저 환하게 밝혀진 시장의 이곳저곳을 바라볼 뿐. 버려진 게임 센터에서 널브러져 있을 때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활기. 어느새 사도는 나보다 앞서 걸으며 모두가 분주하게 살아가는 현장을 눈에 담고 있었다.
약 사십분 정도 한껏 걸은 후, 난 다시 방까지 현신 할머니를 인도했다. 짜 맞힌 육체에 담겨 있는 버림받은 영혼. 늦은 산책을 거친 사도는 이전의 두 사도와 달리,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허락받지 못했던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눈빛을 하고 있었다.
“나 너무 기분이 좋아.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
“그래. 내가 너에게 놀아주는 방법은 이거야. 즐거웠던 것 같구나.”
“아리마는 용납하지 않겠지. 하지만 무척 따뜻하고 환한 마음이 들어. 인간들은 좋겠다. 늘 이렇게 살아갈 수 있어서.”
“모든 인간들이 일상의 행복을 누리고 살지는 못해. 살아가는 게 힘들어서 우는 사람도 많고, 아까 네게 온 것처럼 욕심이 넘쳐 다른 사람을 이용하기만 하는 경우도 있어. 네가 가진 능력은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지. 그렇게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게 인간이야.”
“그래도 난 인간이 부러워. 세상에 태어났잖아. 아리마가 그랬어. 우리는 삶을 시작할 자격도 없다고. 여왕의 십자가를 위해 노는 것을 행복하게 여겨야 한다고.”
사도는 양 무릎을 꿇고 그 위에 두 손을 포갠 체 단정히 앉아 있었다. 벨제붑의 시선이 따끔거리는 가 싶더니, 아리마의 마력이 두꺼운 양 손의 형상으로 현신 할머니의 목을 조르는 게 보였다. 인간의 한계에 갇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오히려 내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걸 기쁘게 생각해야 하는데. 평온한 사도의 얼굴을 보니 때 아닌 무력함마저 느꼈다.
“고마워. 내게 행복이 뭔지 알려줘서.”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그리고..미안하다.”
“아주머니들이 보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이번엔 손을 잡고,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고 싶어.”
사도의 얼굴엔 웃음이 지어져 있었다. 곧 목뼈가 부러져 피부는 창백하게 질리고 쓰러지기까지의 짧은 시간, 현신 할머니는 평온한 얼굴로 죽음을 맞아 들였다. 난 숨이 끊어진 사도 앞에 가만히 앉아 기다렸다. 이번에도 죽음의 악마가 찾아와 모든 흔적을 없애 줄 것인가.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지만 사람들에게 현신 할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나를 상상하게 된다. 아주머니들이 슬퍼할까. 정말로 정이 깊게 든 이들을 달래줘야 할 텐데. 그러는 사이 내 오랜 친구가 다가왔다. 그의 검은 옷자락과 새파란 낫이 슬프게 느껴지는 건 무얼 의미 하는가.
평온히 죽음을 맞이한 할머니의 시신이 사라졌을 때 난 상 위에 있던 성경과 불경. 코란을 펼쳐보았다. 마음에 안드는 구절이 많지만 그 이상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들. 그 문자에 침을 뱉어주고 싶다는 생각은 각각 한 장씩 끼워진 편지에 쓸려가 버렸다.
고마웠다느니. 행복하게 살라느니. 그런 문장은 없었다. 그저 지금까지 찾아온 이들의 이름이 가지런히 적혀 있었을 뿐. 아리마가 사도들에게 글을 가르친 건지, 성서들을 보고 파악했는가는 모르지만 난 짙은 슬픔이 마음을 쓸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현신 할머니는 고향으로 돌아가셨어요. 아주 먼 곳이라 찾아올 수도 없고, 혹여 만나고 싶어도 찾지 말라고 하셨고요.”
난 편지에 이름이 적힌 이들을 한명 한명 찾아가며 그렇게 말했다. 사도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내색을 했기에 아주머니들은 나를 나쁘게 보거나 거짓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눈물을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 나에게 제발, 제발 하며 전해달라고 물건이나 돈을 맡기기도 했다. 하루 종일 말을 전한 후 내 손엔 꾸러미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지폐 뭉치나 값비싼 패물. 혹은 곱게 찍은 사진 같은 것들.
방으로 돌아와 창고 깊숙한 곳에 물건들을 넣을 때였다. 가브리엘의 기운이 내 바로 옆까지 와 있었다. 내 손으로 현신 할머니를 죽이지 않는 걸 문초할 생각인가. 잠시 이어지는 침묵. 천사답지 않게 주저하는 기색이 보이는 건 나로서도 놀랄 일이었다. 아주 가느다란 이명이 들리는 순간이었다, 왼쪽 귀가 떨어져 나가는 듯한 감촉이 느껴지더니 온기가 잦아들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착한 현신 할머니가 행복하게 살게 해주세요.”
“현신 할머니. 제가 죽는 날까지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어디 계시든 건강하세요.”
“우리 어머니를 만난 다음이라도 꼭 할머니께 인사드릴 겁니다. 다시 만나요. 현신 할머니는 좋은 곳에 가실 테니 저도 가도록 노력할게요. 꼭 다시 만나요.”
유치하게 구는 군. 난 가브리엘의 기운이 사라지는 사이 침을 뱉듯 입술을 씰룩였다. 벨제붑이 나를 돕기 위해 한쪽 눈을 주었다면 가브리엘은 내가 감정적으로 동요하게끔 왼쪽 귀의 청력을 틔워준 것이니까. 여러 가지로 편리하게 쓰일 테니 나쁠 건 없겠지. 가브리엘을 처음으로 이겼다는 기분이 들어 조금 우쭐해지기도 했다. 아주머니들의 마음이 담겨있지만 영원히 전할 수 없는 선물들을 보자 다시금 우울해졌지만.
아리마의 사도들은 습격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올 수도 있다. 현실을 인식하며 카페 운영을 계속했다. 가게 영업을 마치기 전에 내 임무가 끝나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하루가 다르게 커피 내리는 실력이 향상되는 리아를 즐겁게 바라본다. 토요일마다 빛나는 나무에서 바리스타 아르바이트도 시작했다. 리아가 바쁘게 지내는 만큼 선호도 조교 일도 열심히 하며 나와의 대련에 열을 올린다. 꽃송이를 연상케 하는 두 사람의 성장. 그에 못지않게 내게도 기쁨이 찾아왔다.
“이렇게 나와 줘서 고마워.”
정육 식당 여사장인 백안이 약속장소인 영화관에서 만났을 때 나에게 웃어 보였다. 늘 청바지에 파란 앞치마를 입고 일하던 모습이 거짓말처럼, 연둣빛 원피스 차림에 옅은 화장을 한 백안은 날씬한 몸매와 더불어 정말 매력적이었다.
“나도 보고 싶은 영화였는데 먼저 얘기해 줬으니 내가 더 고맙지.”
“견회 씨가 김현희의 팬이라고 들어서..이번 영화가 무척 잘 만들어졌다는 평이 많아 한번 보고 싶기도 했고. 이렇게 같이 있으니 너무 좋다. 꼭 교복 입던 학생 때로 돌아간 기분이야.”
인간 나이로 치면 나보다 두 살 연상인 백안. 힘든 일을 해서인지 약간 싸늘한 인상을 가지고 있지만 오늘 화장이 아주 잘 된 건 분명했다. 무엇보다 밝은 미소야 말로 여인에겐 최고의 화장이지만. 영화는 리아와 선호가 먼저 보고 와서 내게 추천했고, 현희의 신작인 만큼 나도 꼭 보고자 했다. 백안은 현신 할머니가 사라진 이후 아주머니들이 내게 찾아오지 않도록 애를 써주었다. 그에 대한 보답일까, 나 역시 28세 청년의 감정으로 이번 만남에 응했다.
“팝콘 어떤 맛으로 먹어?”
“캬라멜이 맛있다고 다들 그러니까 그걸로 해 줘. 나도 극장에 오랜만에 와서 잘 모르겠네.”
“조조영화 보려고 일찍 왔으니 조금 출출한데 핫도그도 하나씩 시킬까?”
“난 좋아! 이러니까 정말 데이트하는 거 같고 너무 기쁘다.”
백안은 내 팔을 안으며 소녀처럼 발랄한 웃음을 지었다. 남자들도 버거워 하는 발골 일을 수년째 계속해온 여장부. 시장 양아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고 조직 폭력배들도 무서워하는 백안의 민낯은 소박한 일상에 감동할 만큼 순수한 여인이었다.
우리는 캬라멜 팝콘에 핫도그 두 개. 버터구이 오징어와 콜라 두 잔을 들고 극장 좌석에 앉았다. 이번 영화 평가가 아주 좋아서인지 토요일 조조영화 임에도 자리는 거의 만석이었다. 옆자리에 앉은 백안은 조금 주저하는 듯 손을 꼼지락거린다. 아직 조명이 꺼지지 않았지만 곧 어두워지겠지. 오늘만큼은 맞춰 주자. 난 부드러운 동작으로 의자 받침대에 올려 진 백안의 왼 손등을 오른 손으로 감쌌다.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백안이 얼마나 부끄러운지, 그리고 기뻐하는 지가 생생히 느껴진다.
“오늘 견회 씨랑 영화보러 가는데. 어떤 옷이 좋을지 모르겠어요.”
“무슨 맞선 보러 가냐? 화장이나 하고 깨끗한 걸로 입으면 돼지.”
“단 둘이서 만나는 건 진짜 오랜만이란 말이에요. 엄마도 강 건너 불구경 하지 말고 잘 좀 골라 주세요. 이번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요.”
“아주 네 살을 베어다 먹여라. 사내들을 휘하로 부리면서 밥먹고 칼질만 하는 여자가 뭐가 그리 무섭고 두근거린다고. 앉아. 화장해줄 테니까.”
“너무 진하게 하지 마세요. 견회 씨 화장 짙은 여자 안 좋아한다고 리아한테 들었어.”
“그 치가 좋아하는 여자도 있어? 케이크 만들고 성당이나 다니는 남정네잖아. 거기다가 주먹도 잘 써서 무모한 일도 많이 하고. 평판은 좋지만 난 별로야. 너같이 기세고 잘난 여자한텐 순진하고 착한 남자가 어울려.”
“견회 씨가 얼마나 착한데 무슨 소리예요? 그 현신 할머니가 사라진 후에 시장 아주머니들 다 찾아 뵈면서 말을 전해줬잖아요. 그런 거 아무 남자나 하는 거 아니에요. 부담도 되고 불편할 텐데도..”
“어이구. 할 말 없다. 할 말 없어. 토요일 아침에 어미까지 불러다 앉혀 놓고 아주 지극정성이네. 자, 화장 끝났다. 네 동생이 사놓은 원피스 빌려. 딱 어울릴 거야.”
가브리엘의 귀는 내 감정을 건드리기 위해 준 것이었다. 모녀의 대화가 길게 이어진데다 시선은 변화가 없었기에 몰입도가 더 크다. 백안의 손등에 인두가 달궈지듯 열기가 땀이 베이는 것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사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현희의 신작은 셰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오셀로를 재해석한 영화였다. 요즘 유행하는 로맨스 판타지 풍의 분위기를 주고 검무 장면을 화려하게 연출해 비주얼 적인 볼거리가 확실하다. 흑인 소년 만델라를 오셀로로, 역사에 남는 악역인 이아고는 성별을 반전시켜 현희가 맡았다. 반듯하고 성실한 오셀로가 이아고의 이간질에 숨어 편집증 적으로 무너져가는 가운데 아내에 대한 의심으로 괴로워하는 과정. 만델라가 열일곱 소년이란 걸 감안하면 디테일한 감정 연기가 놀랄 만 했다. 판타지 적인 양손 검을 사용한 액션 장면은 오락성이 충분하고, 아내에게 손수건이 어디 있냐고 묻는 장면에선 내 목이 갈라지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재밌네. 견회 씨랑 봐서 더 좋았던 것 같아.”
극장을 나섰을 때 백안이 아주 밝은 얼굴로 말했다. 원작 소설을 읽은 이에게는 신선하고 새롭다는 느낌을. 줄거리를 잘 몰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다. 시간은 아직 오전 열한시. 점심을 들기엔 이르고 영화를 보며 충분히 먹어 식당가에 갈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천천히 백화점 구경이라도 하자. 우리 둘 다 오랜만에 왔으니까.”
“그래! 그러자! 옷 구경도 하고..백화점엔 주방용품이 뭐가 있는지도 보고..그러면 좋겠어!”
백안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두 손으로 내 손을 잡았다. 거부하지 않아도 되겠지. 우리는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서로에게 익숙한 시장과는 다른 매장을 구경하는 건 충분히 즐겁다. 깔끔하기도 하고 대부분 고가지만 안정된 느낌이 든다. 난 다양용 가정용 에스프레소 머신과 믹싱기. 오븐 등을 보았다. 번쩍번쩍하는 여러 식칼들을 보는 사이 백안은 눈을 반짝이고, 주방 용품을 구경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한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갔다.
“배고프지 않아? 점심 때가 다 되었는데.”
“아까 영화 보면서 많이 먹은 것 같아서..”
“사실 나도 그래. 새로 생긴 중고 서점이라도 갈까?”
“사실 난 책은 잘 몰라서..”
부끄러운 듯 말을 흐리는 백안. 평소 일을 많이 해서 마땅한 취미 생활도 없다는 건 알고 있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 모습이 오히려 사랑스러웠고, 난 앞장서며 웃음짓는다.
“만화책이나 재미있는 책들도 많으니 한번 가보자. 음반이나 영화 타이틀도 많이 있는 매장이야. 가격도 싸고.”
“그럼 좋아!”
“자아. 갈까.”
우리는 그때까지 손을 잡고 있었다. 지금 순간이 백안에겐 정말 행복한 순간인 모양이다. 사랑을 하는 여자는 누구나 소녀라고 했던가. 환히 웃는 서른 살 여인은 십대 학생보다도 순수하고 맑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내가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과거와의 괴리감으로 고통스러워하길 원하는 가브리엘에겐 더할 나위 없이 즐겁겠지. 명령과 상관없이 나로선 인간으로서 기뻐해야 하는 가. 염증과 우울함이 어울리는 타락 천사여야 할까, 고민하게 된다.
그날 만남을 끝내고, 백안을 정육식당까지 바래다 준 후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영화 홍보로 바쁠까. 목소리를 듣고 싶은데. 현희에게 전화를 걸자 신호음은 조금 오랜 간격을 두었다. 국제 전화로 연결될 때도 난 가만히 있는다. 리아가 커피를 잘 내리고 있나 싶어 빛나는 나무로 발걸음을 돌릴 즈음 전화가 연결되었다. 내가 현희와 친남매라는 건 일단 비밀이고, 시현이라면 말소리만으로 사정을 알아챌 노릇. 결국 난 인적 드문 골목으로 향하며 천천히 통화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