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새로 나온 레몬 맛 제로 콜라 캔을 따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제로 칼로리 음료는 음식에 탐하지 않는 나에게 몇 안 되는 기호품. 오히려 일반 탄산보다 안 좋을 수 있다는 의견은 집어 던지고 목 줄기를 자극하는 시원한 감촉에 취한다.
“티브이 좀 틀어 봐. 이번에 아주 큰 음악 콘서트가 잠실에서 열린다고 하던 것 같은데.”
“아, 평화 찬양 회 말씀하시는 군요. 케이 팝 아이돌에서부터 정통 음악가들. 게스트도 다양한 사람들이 온다고 유명하죠. 그러고 보니 김현희의 팬이셨죠. 이번에 사회자로 참여 한다고 하던데.”
현희가 내 동생이란 걸 알고 있는 건 리아 뿐. 내가 그랏죠임을 알고 있는 사환에게도 비밀로 하고 있다. 진실을 공유하는 것인지, 서로에게 비밀만 만드는 듯도 하지만 나에게도 입장이 있으니까.
“평화에 대한 기도와 실천이 함께 하는 음악의 장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지상파 방송국 3사에서 실황 중계를 확정할 만큼 큰 이벤트였다. 해외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는 중요한 무대에 내 동생이 사회자를 맡다니. 인간으로 태어나 이 정도 되는 기쁨과 자부심도 드물겠지. 천주교와 개신교에서 함께 기반을 마련한 것도 평화라는 주제와 잘 어울린다. 난 때마침 시작되는 소개 영상을 바라보며 잠시나마 기분을 안정시켰다.
“가엾은 영혼들이 죽어 가는데 여흥에만 취하고 계시는 군요.”
난 왼쪽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에 킥, 하고 웃는다. 아직 해가 지기 전 성당을 뒤로 하고 걷는 동안 온 몸의 근육이 흥분과 두려움으로 가느다랗게 떨렸다. 늑대 시절에 이런 감정이라도 느꼈으면 좋겠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즐거움과 괴로움에서 외면당했던 내 운명이 이렇게 행복한 페이지를 새기고 있는데, 대담하게도 내 앞길을 막아선 아리마를 굳이 상대해야 하는 걸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키우던 개가 4마리나 죽으니 걱정이 된 모양이구나. 날 두려워하고 있으면서 이렇게 먼저 찾아온 걸 보면.”
아리마는 이전처럼 소복을 연상시키는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 주위에 서 있는 건 푸른빛 코트를 걸치고 있는 세 명의 사도. 이전 일곱 명이 전부 있을 때에 비해 위압감은 많이 약해져 있었지만 지금 날 바라보는 여섯 개의 눈동자엔 명확한 분노가 새겨져 있다. 동료들을 죽인 것에 대한 원망과 증오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옛 동화에서 삼형제. 세 자매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처럼 지금 세 사도는 아리마의 뜻에 따라 나를 죽인다는 목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리마는 나와 똑바로 눈을 맞춘 채 말이 없었다. 타락천사 하나와 짜깁기한 생명 셋. 처음 봤을 때 나름 공손했던 걸 생각한다면 지금의 태도는 제법 흥미롭다.
“여기서 해도 상관은 없는데. 먼젓번 사도들처럼 놀아 달라고 할 기분은 아닌 것 같군. 어쨌든 좋아. 성공하든 실패하든 난 서둘러 너희와의 인연을 끝내고 싶으니까.”
벨제붑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미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고. 천사와 악마에 대해 고찰한 만화에서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천사는 신의 도구일 뿐이라는 의견이 섬세한 그림체에 힘입어 꽤나 멋지게 표현된 장면이 있었다. 타락천사 입장에선 천사들의 타락과 인간의 굴레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어쨌든 재미있게 읽었지.
“그랏 죠께서 이곳에서 하시는 일을 그만 두시는 날. 제가 여기 있는 삼전사와 함께 이곳을 직접 습격하겠습니다.”
삼전사라고 따로 부르는 걸로 보아 아주 중요한 전력인 듯싶다. 난 단단히 토라진 소녀를 연상케하는 아리마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는다. 이기적이고 자기 멋대로인 명령을 한 두 번 받아 보는 게 아니라서, 그리고 감정을 드러내고 있는 게 유쾌했다. 너도 결국은 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는 존재일 뿐이구나.
“좋아. 배려해 줘서 고맙다.”
“오해하시는 것 아닌가요? 이전 사도들을 보냈을 때처럼 예의를 차리지 않을 겁니다. 우리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이곳을 철저히 파괴할 각오로 올 것입니다.”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주가 허락할 리가 없으니까. 이전 두 번째 사도의 정보를 조작한 게 그 증거지. 너흰 인간을 죽일 수 없어. 너를 죽일 수 있는 게 나뿐인 것처럼 너희가 죽일 수 있는 것도 나 하나 뿐이니까.”
아리마의 순수한 얼굴에 균열이 패였다. 수치심과 분노.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이다. 이미 여왕의 십자가는 인터넷을 장악했고 추종자도 꽤나 있었다. 그런 걸 경험하면서 잊고 있었겠지. 자신 역시 주가 주관하는 거대한 보드 게임의 일부일 뿐이라는 사실을. 전력을 다해 나에게 덤벼들기로 결정되었을 때 겨우 실감이 난 모양이었다.
“자, 난 좀 쉬고 싶어서 그러는 데. 할 말 다 했으니 그만 가보지 그래. 가게 정리하기까지 아직 몇 달 남기도 했잖아. 그때까지 마음껏 너희들끼리 놀아보라고.”
난 불량한 태도로 아리마의 어깨를 툭 치곤 걸어가 버렸다. 과연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 그날 난 모처럼 꿈도 안 꾸고 편히 잘 수 있었다.
“리허설에 참여할 수 없는 게 조금 불안해.”
현희가 영화 홍보와 싱글 앨범 녹음을 마치고 한국으로 입국한 날. 늦은 시각 약속장소인 공원에서 만났을 때 난 동생의 심기가 편치 않음을 알았다. 큰 무대인만큼 리허설도 철저하게 준비될 텐데. 어째서 인지 현희에게 콘서트 전날까지 일정이 있음을 알면서도 사회자를 맡아 달라고 요청한 게 의외였다.
“콘서트 까지 일정을 취소할 순 없는 거야?”
“다 중요한 일이고 계약기간이 정해져 있어서..위약금을 물고 억지로 취소할 수도 있겠지만 기부를 하느라 재정적으로 부담이 되거든. 내 개인 자산을 더 모아 두었다면 이런 상황까지 오진 않았을 텐데, 내가 그동안 너무 무모하게 살았나 봐.”
현희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앞날을 걱정하기보단 자신이 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성향임을 알기에 정말로 고민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그래도 내가 가져온 케이크를 조금씩 먹는 모습이 위안이 되었다. 내 동생은 잘 해낼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제자 아이들도 함께 출연한다면서?”
“아, 마지막 순서에서 모든 참가자들이 힐 더 월드를 함께 부르기로 했어. 내 제자들은 그때 코러스로 참여할 예정이야. 다들 노래도 기본부터 배웠으니 무리도 없고, 지금도 연습하고 있을 거야. 나도 불러야 해.”
“언제나 내가 응원한다는 걸 기억해 주렴. 마음 같아선 밤새 이야기하고 싶지만 현희가 그럴 리가 없지. 그만 가봐. 시간날 때 식사라도 같이 하자.”
내 동생은 오빠의 소탈한 태도에 새삼 감동받은 것 같았다. 부드럽게 내 목을 감싸 안으며 가볍게 뺨에 입을 맞춘다. 현희는 모르겠지. 주에게 날개를 허락받은 날 우주를 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왔던 순간을. 이제 우리는 함께 날 수 있어. 주의 말씀을 전할 수 있어. 언제까지나 같이 있을 거야. 그렇게 말했었다. 난 현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 보인다.
“늘 고마워. 매일 현희를 위해 기도한다는 걸 잊지 말아 줘.”
“사랑해. 오빠. 꼭 좋은 무대를 만들게.”
콘서트가 시작되는 기간까지. 나는 부동산과 세무서를 오가며 빨간 실타래를 정리할 절차를 확인했다. 리아가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지만 최대한 일정을 조절해 되도록 힘든 상황은 만들지 않았다. 케이크 예약 주문을 받지 않고 쿠키도 가짓수를 줄이는 사이, 정말로 가게가 문을닫는 구나. 인간이기에 느끼는 시원섭섭함이 생경하게 다가왔다.
정확히 두 달하고 보름의 시간이 확정된 날. 토요일 오후 여덟시에 난 선호와 리아. 사환 신부와 함께 성당 창고의 대형 티브이 앞에 편히 앉아있었다. 음료수와 과자도 넉넉했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좋은 시간.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이번 콘서트로 시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거의 대부분의 술집과 식당에서 사람들이 가득 모여 시청할 만큼. 검은색 바지 정장과 흰 와이셔츠가 잘 어울리는 현희는 단정하고 격식에 맞으면서 정말로 아름다웠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평화와 사랑을 바라는 음악의 제전. 지금 시작합니다.”
정성이 느껴지는 태도와 목소리로 진행을 이어나가는 나의 동생. 세계적인 인기를 끄는 케이팝 아이돌과 연륜 있는 거장들의 무대가 조금도 어색하거나 엇갈리는 느낌 없이 이어지는 건 놀랄 만 했다. 선호와 리아는 과자에는 손도 대지 않고 영상에 집중하고, 사환 역시 중간 중간 탄성을 내곤 한다. 난 콜라를 한 모금 마시며 터질 것만 같은 기쁨을 진정시켰다. 내 동생이 저렇게 좋은 무대와 함께 하고 있다니.
시간이란 이렇게 빨리 지나가는 것이었나. 화려함과 우아함. 생동감과 장엄함이 함께 하는 음악의 장이 어느새 마지막 무대를 남겨두고 있었다.
“무대 마지막에 일본에서 온 가수가 등장할 겁니다. 거의 까메오 출연이죠. 긴장하지 마시고 진행해 주십시오.”
현희가 공연 전날 들었던 내용이 내 귀에 울렸다. 이렇게 중요한 무대를 그렇게 성의없이 해서 되는 일인가. 현희는 반박 하지 않은 것 같다. 제자들이 항의하려는 걸 조용히 저지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으로 봐서. 난 서둘러 오른쪽 눈꺼풀을 깜박였다. 마지막까지 무대를 보고 싶었으니까.
“예. 이제 마지막 무대만 남았는데요. 모든 출연진들과 함께 하는, 평화와 사랑에 더 없이 어울리는 곡을 인류의 미래를 믿는 모든 분들께 바치고자 합니다.”
예상 외의 출연자가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전동 휠체어에 탄 어린 여인이 등장했을 때, 내 동생의 얼굴에 침착함을 드리울 새도 없이 놀라움과 기쁨이 함께 하는 걸 보았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다소 어색한 발음이지만 분명한 한국어로 인사한 이는 팔 다리가 없는 일본의 여가수였다. 사지무형성 장애를 감내하며 노래와 연기에 대한 애정으로 꿈을 잃지 않은 이. 가창력은 더 공부할 필요가 있지만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마음을 언급하자면 두말 할 필요가 없었다. 한국의 다큐멘터리에 등장한 적이 있어 국내에도 약간의 인기를 얻은 걸로 알고 있다.
현희는 마이크를 거두고 일본어로 일본 여가수에게 인사를 했다. 선하고 용기있는, 노력하는 이들을 사랑하는 현희에게 이렇게 기쁜 만남이 또 있을까. 다른 가수들이 무대에 모이기까지의 짧은 순간 현희는 귓속말로 여가수에게 자서전을 읽고 다큐멘터리를 봤다고, 무대에도 가본 적 있음을 말하며 살갑게 대했다. 일본의 여인 역시 현희의 팬이라 말하며 환하게 웃어 보인다.
곡의 전주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던 중 현희는 전동 휠체어의 높이가 낮아 자신이 옆에 서 있으니 여가수가 초라해 보인다는 걸 느낀 듯했다. 리허설을 하지 못했음에도 더할 나위 없이 무대를 진행한 현희. 자신이 동경하는 이 옆에 무릎을 꿇고, 여가수가 불편한 몸을 의탁하고 있는 휠체어에 손을 올려놓으며 함께 노래할 때. 그토록 환희와 열광으로 차 있었던 관객석이 조용해졌음은 티브이에서도 알 수 있었다.
리아가 아..하고 소리를 내었다. 배려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것. 그런 진부한 표현이 더 없이 어울리는 순간. 난 침묵을 지키는 사이 한 가닥 눈물이 왼쪽 눈에서 시작되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날 콘서트는 당연하다는 듯 인터넷 뉴스 첫 면에 실렸다. 현희를 비난하는 기사 역시.
‘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일본인 옆에 무릎을 꿇다니. 나라 망신이다.’
소심한 이들이라면 이런 반응을 보일 수 있겠지. 문제는 납득이 안 될 정도로 현희에 대해 모진 소리를 하는 게시물과 뉴스 페이지가 넘쳐난다는 것이었다. 거의 모든 종류의 sns에서 현희에게 비난을 퍼붓는다. 악의적으로 사진을 훼손해 인격모독과 성추행 수준의 공격이 도미노 놀이처럼 순차적으로 늘어나는 건 아무도 통제할 수가 없었다.
“조금 이상한데..”
일주일 후. 난 유튜브 덧글을 보며 왼쪽 눈꺼풀을 찡그렸다. 비방하는 덧글들은 나름 머리를 굴린 것 같지만 무릎을 꿇었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여러 각도에서 공격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희를 옹호하는 덧글들이 무척 적은 것도 그렇지만, 흡사 생각 없이 변명하는 식의 견해만 나와 있는 것도 인위적인 느낌이 든다.
어쨌든 내 여동생에 대해 악평이 쏟아지고 있는 건 현실이었다. 하지만 현희는 흔들림 없이 활동을 계속한다. 비난 의견이 쏟아지는 와중 관심이 없던 이들에게도 악평이 퍼지고, 일본에 적대감을 가진 중장년 층 사이에서도 타겟이 된 듯 잇달아 공격이 계속 되었다.
“견회 오빠..괜찮으세요?”
내가 전혀 신경쓰지 않은 듯 생활해서인지, 리아가 걱정스럽게 물었을 때 난 피식 웃으며 답했다.
“약한 개들이 모여서 짖는 걸 겁내야 할 필요가 있을까? 내 동생은 늑대야. 스스로를 믿지 않고, 믿음을 줄 생각도 없는 개들을 상대할 여유는 없을 걸. 지금쯤 제자들과 연습이라도 하고 있을 거야. 굳이 해명을 하지 않는 것도 그런 맥락일 거고.”
“그래도..”
“사실 내가 걱정하는 건 따로 있어. 그 일본 여가수. 지금도 인격 모독하는 글들이 올라오는 것 같은데. 현희가 그런 걸 참지 못해 반응을 보일지 모른다는 게 염려 돼.”
“정말 사람들이 왜 그럴까요. 다른 사람 비난하고 모독하는 게 그렇게 재미있다는 것인지..익명에 기대어 욕하는 게 버릇이 된 것 같아요. 그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바꿀 용기도 없을 거예요.”
리아는 정확한 말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은 이들이 뭘 할 수 있고, 뭘 한다 해도 그게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여하튼 현희와 일본 여가수에 대한 비난은 선을 넘으려 하고 있다. 하나의 밈이 되는 듯한 여론 사이로.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한 영상이 게시되었다.
팔 다리가 없는 이들 중에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한 선례를 남긴 이들이 있다. 현희와 함께 노래한 여가수 역시 한국에서 다큐멘터리에 나올 정도였고. 그녀가 휠체어에서 내린 상태로 영상에 비추었다. 현희는 자신이 출연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고,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몸이 불편한 이를 배려해준 것 이상의 의미는 없을 거라고 간절하게 말했다. 제발 현희에 대한 공격을 멈춰달라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말했다. 받침 발음이 어눌한 한국어로. 몇 번이고 연습하며 외웠는지 의미 전달이 되었다. 콘서트 후 현희에게 비난이 쏟아질 때도 아무렇지 않았던 나는, 이제서야 수치심을 느꼈다. 여가수는 갓 스물 한 살의 어린 여인이었다. 케이팝을 좋아하고 한국 드라마도 열심히 본다고 소녀처럼 웃었던 다큐멘터리에서의 모습이 어째서 이렇게 슬프게 일그러져야 하는 가. 왜 죄 없는 이가 눈물을 흘려야 하는 건지. 마지막 한 마디가 나올 때, 타락천사의 영혼은 육신의 신음으로 내비쳤다.
“저는 성의를 보일 무릎도 없습니다.”
영상이 올라온 후 당장 여론이 바뀐 건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 여가수의 영상에도 저급한 덧글도 달리고 공격은 계속 되었다. 몇 번 전화 통화로 현희 역시 분노하고 있음을, 법적인 대응을 생각하고 있다고 내게 말할 즈음이었다. 인터넷에 공개된 한 장의 사진이 사태의 전환점이 된 것은.
8,90년대 아시아권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고 지금도 굳건한 팬 층이 있는 일본의 비주얼 락 밴드의 리더. 작곡과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는 이가 무릎을 꿇고 있는 사진이었다. 별다른 설명도 없이 “제가 대신 무릎을 꿇겠습니다.” 그런 손 글씨와 함께 고개를 숙이고 사죄하는 모습. 무언의 항의라 하기에 충분한, 어쩌면 그 이상의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사진이었다.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두 영혼이 서로를 배려했을 뿐인데 그걸 빌미로 이유도 없는 공격을 가했으니까요.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습니까? 이러고도 어른 행세를 한단 말인가요?”
전 세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펼치는 영적 지도자가 자신의 sns 계정에 직접 올린 글은 곧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로 퍼져나갔다. ‘무릎 꿇기 첼린지’라고 이름 지어진 행위는 헐리우드의 배우들에게까지 전해졌다. 대중 문화의 아이콘들이 무릎 꿇은 사진과 더불어 대신 무릎을 꿇는다는 손글씨. 그 여파는 한달 남짓한 현희에 대한 공격들을 날려 버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이번 일에 큰 관심이 없던 이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쳐 분위기는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일주일 되는 시간이 흐른 뒤. 현희와 일본 여가수에 대한 비난 덧글은 거짓말처럼 자취를 감추었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