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는 하늘을 날기에 특별하다 말한다.
칼로 도마 두드리는 소리가 악기 연주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양파. 피망. 당근. 완두콩. 단호박. 햄. 빛나는 나무 매출의 일등공신 야채식빵을 만들기 위해 칼질을 하는 시현. 정권이 돌맹이처럼 툭 튀어 나와있는 손은 중식용 사각 식도를 경쾌하게 놀린다. 까딱 잘못했다간 손가락 하나 날려버리는 건 일도 아닐 것 같은 속도로. 큼직한 플라스틱 상자 두개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야채를 모두 잘게 썬 후, 1차 발효가 끝난 반죽을 끊듯이 하여 재료를 섞었다. 야채 스톡으로 물을 대신한 반죽엔 야채 향이 은은히 감돌고 있었다. 재료와 잘 어우러진 반죽 성형은 칼질하는 속도보다 더 빨랐다.
"사장님, 있어요?"
모양낸 반죽을 발효실에 넣은 후 가게로 나간다. 일전에 금니를 씹은 시우의 엄마. 남편과 함께 반찬 가게를 운영하는 시영 아주머니였다. 동글동글한 체격이 곰인형을 연상시키는 시영 아주머니는 계란 바구니와 우유가 든 병을 들고 있었다.
"시골에서 토종닭이 낳은 무항생제 계란이야. 이건 풀 먹은 젖소에서 짠 우유고. 치과 의사 선생님한테 시우 금니 값을 덜어줬다고 들어서..정말 고마워. 시현 씨 계란이랑 우유는 먹잖아?"
인근 시장 사람들은 시현이 닭가슴살과 채소, 과일. 일부 견과류만 먹고 사는 걸 알고 있었다. 몇번 식사를 대접하려 해도 시현은 무표정하게 먹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뿐. 처음엔 특유의 차가운 태도에 오해가 생겨 다툼이 일어날 뻔 한 적도 있다. 시영 아주머니에게서 계란과 우유를 받아든 시현은 그 자리에서 우유를 잔에 따른 후, 계란을 하나 깨 넣었다. 스틱으로 휘휘 저은 후 우유 계란을 들이킨다. 산뜻하면서 우유의 풍미가 진하다. 진한 단맛. 풀어진 계란 노른자의 고소함이 어우러지자 더할 나위없는 최고의 음료였다. 시현 역시 좋은 우유와 계란으로 빵을 만들었지만 방금 마신 우유와 계란은 대량 구매하기엔 고가임에 틀림없었다. 시현은 잔을 싹 비우고 시영 아주머니에게 건포도 식빵과 밤식빵을 하나씩 포장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아주 맛있군요. 잘 먹을 게요."
"아이고, 이러지 마. 여기 돈 받아. 우리 시우 생각해 준게 고마워서 준거야."
"저도 감사해서 드리는 겁니다. 받으십시오."
"하여간..시현 씨 고집은 정말이지 고래 심줄이야. 닭가슴살 떨어지면 말해. 친척네 양계장에서 좋은 걸로 보내줄게."
"수고하세요."
이제 곧 밀려올 손님들을 맞이하고자 잰 걸음으로 반찬가게로 향하는 아주머니. 맛나게 영양을 보충한 시현은 가게로 돌아왔다. 모든 식빵이 가득 진열되어 있는 매대. 조용한 공기를 뒤로 하려는 순간, 걸음을 내딛다가 무의식적으로 복싱의 원 투를 구사한다. 가장 기본적인 연타지만 타이밍이 잘 맞아 떨어지면 단번에 상대를 침몰시킬 수 있는 심오한 기술. 처음엔 복싱의 간결하고 짧은 몸동작이었다. 조용히 숨을 몰아쉬는 가운데 바뀌는 자세. 왼 주먹을 앞에 두고 오른 주먹을 살짝 떨어뜨린다. 뒷발에 칠 할의 무게를 두고 앞발에 삼할의 무게를 배분한다. 그리고 주먹과 발바닥, 시선이 동일선상에 놓여 있었다. 가장 실전적인 중국 무술의 하나인 형의권의 자세. 발을 내딛으며 두 주먹이 교차되는 순간, 바람이 분 것으로 착각할 정도의 엄청난 풍압이 가게에 퍼진다. 공격법을 구사했던 시현은 곧 편한 자세로 서면서 짧게 혀를 찻다.
"그저 그렇군."
시현은 앞치마를 두르고 카운터에 섰다. 타인이 본다면 놀랄 수 밖에 없는 신체 능력, 그것의 마무리는 늘 고양이의 발걸음처럼 들을 수도 없고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침묵이었다. 잠들기 전 하루 한 시간의 수련 시간. 그 외에 사이사이 일어나는 운동 동작이 은밀하기 그지 없는 건 어째서일까. 시장에 오가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모습을 조용히 주시하는 시현의 무표정은 아무런 단서를 주지 않았다.
"야채 식빵 하나 줘요. 우유도 한 팩만.."
한달 전부터 찾아오는 아주머니 손님이었다. 야채 식빵을 통째로 입 안에 넣으며 우유를 들이붓는 모습이 영 여유가 없어 보인다. 대충 식사를 때우고 전화를 주고받으며 바쁘게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 무뚝뚝한 성격과 대조적으로 인근 시장 및 상가의 소문을 섭렵하고 있는 시현은 그 아주머니가 부동산 사업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간이 테이블에 앉아서 드시면 카페 라테라도 한잔 드릴 텐데.
밀려드는 오후 손님들을 상대로 바쁘게 일한 시현은 대부분의 빵이 팔리고 나자 잠시 숨을 가다듬었다. 야채 식빵은 완전히 다 팔렸고, 내일 고아원으로 보낼 요량으로 분량을 더 만들었는데도 남아있는 빵이 별로 없었다. 매대를 정리하려던 차,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시는 할머니 한분이 들어왔다.
"사장님. 나 밤식빵 하나만 줘."
조금 구부러진 허리, 얼굴에 가득한 주름살. 그리고 활짝 핀 꽃같은 웃음을 짓는 할머니. 시현은 먹기 좋게 밤식빵을 자른 후 설탕 한 스푼 넣은 아메리카노를 함께 건냈다.
"고마워. 사장님. 아주 고마워."
할머니는 간이 테이블에 앉아 천천히 식사를 했다. 모시는 자식들도 없는 독거 노인이었지만 할머니에겐 왠지 모를 기품이 느껴졌다. 세상의 어려움을 겪었지만 희망을 간직해온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 시현은 일찍 가게를 정리하면서 몇번이나 할머니의 작은 등을 바라 보았다. 재개발 계획으로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에서 나와야 하는 할머니의 사정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며칠 후 였다. 오후 빵 반죽을 만들고 있던 시현은 치과를 하는 친구가 간호사 세 명을 데리고 온 것을 보았다. 시현이 테이크 아웃용 컵을 구비하지 않은 것을 알고 개인 텀블러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바쁘네. 사장님."
"오늘은 로브스타 밖에 원두가 없는데. 많이 쓴 맛이 날거야."
"상관 없어. 아이스로 줘. 빵은 건포도 식빵이랑 완두콩 식빵이면 돼."
"그래."
간호사들이 커피와 빵을 앞에 두고 여유를 즐길 때, 치과 의사 친구는 일에 여념이 없는 시현을 보고 있었다. 단순히 숙련공이라 말하기 미안할 만큼 빠르고 정확한 몸놀림. 시현의 움직임엔 쓸데없는 동작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획일화되지 않고 유연한, 흐르는 물과 같은 느낌이 든다. 둘은 서른 세살 동갑내기 친구였다. 28년 전부터 알고 지낸 오랜 인연이기도 했고. 치과 의사 친구가 조용히 한 마디를 꺼냈을 때, 시현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집에는 연락하는 거야?"
"이틀에 한번은 전화 하고 있어."
순간의 머뭇거림을 감추려는 듯 시현은 다시금 움직였다. 평가 좋은 치과 의사면서 중간 규모의 주말 무술 수련 동아리의 회장이기도 한 그는 네살 때 시현과 처음 만났었다. 그 때의 시현은 잘 웃는 아이였다. 어린 나이에 고되고 지루한 무술 수련을 견뎌내면서도 항시 환한 얼굴을 했던 시현. 일곱살 나이에 스승의 수제자로 발탁되어서도 시현은 늘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함께 훈련을 받던 아이들 모두 그런 시현에게 호감과 두려움을 느낀 것은 당연한 일. 이제 과거가 되어버린 그 때의 모습을 다시 볼 날이 올지, 치과 의사 친구는 곧 간호사들과 병원으로 돌아갔다. 홀로 가게에 남아 약간 급한 듯이 움직이던 시현은 스크래퍼로 반죽을 자른 뒤 잠깐 멈춰섰다.
'다 끝났어. 다..다 끝났다구...내 어린 시절을 온전히 바쳤는데...너 때문이야. 너 때문이야!'
'이게 네가 선택한 길이란 말이냐. 네 알량한 자존심이 동료들을 버린 거다.'
'너를 믿었는데..어째서..'
시현은 과거의 기억에서 몸서리치지 않았다. 자신에게 쏟아졌던 원망. 어린 영혼에 흠집을 낸 가시 돋힌 말들을 곱씹듯 가만히 있다가 타악, 스크래퍼로 또 한 덩어리의 반죽을 잘라냈다. 언제나처럼 예리한 시선으로 현실을 직시하듯이.
신참 부동산 아주머니와 청소하시는 할머니가 함께 빛나는 나무를 찾아온 날이었다. 건포도 빵과 우유를 사서 테이블에 앉는 두 사람. 재개발로 집을 잃게 될 할머니가 부동산 업자와 있는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대화를 들어보니 할머니가 사실 만한 저렴한 방을 찾는 중인 것 같다. 아직 부동산 사업을 한지 얼마 안 되어 실적을 올리기에 급급할 아주머니가 별로 돈이 안 될 의뢰를 맡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마침 향 좋은 원두가 들어와 있어 시현은 커피를 내릴 준비를 했다. 갑자기 전화를 받은 아주머니가 할머니의 손목을 잡고 부지런히 뛰어간 때 시현은 커피 탬핑을 마친 참이었다. 테이블에는 아직 반도 안 먹은 빵과 우유팩이 그대로 있었다. 두 시간 후쯤 아주머니가 기분 좋은 얼굴로 다시 찾아왔을 때 시현은 종이 봉투에 남은 빵을 잘 담아 건냈다. 고마워요, 하며 웃음짓는 얼굴에서 여유가 느껴진다.
"의뢰가 잘 풀리셨나 보네요."
"아아, 네. 할머니가 혼자 사실 저렴한 아파트 하나를 찾았거든요. 조건에 맞는 걸 찾느라 삼일이나 걸렸네요. 이제 안심..아, 잠깐만요. 여보세요..아, 네..네에?"
전화를 받은 아주머니의 표정이 갑자기 변했다. 방금까지의 평온함이 동전을 뒤집듯 실망으로 굴러 떨어져 버린다. 전화를 끊고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 아주머니. 시현이 묻기도 전에 허탈하게 입을 열었다.
"큰일났어요..제가 계약금 넣기 십분 전에 다른 사람이 먼저 입금을 했다네요..할머니 형편에 맞는 집이 이젠 정말 없는데.."
"한번 만나 보시고 설득해 보세요."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소용이 있을까요..?"
"어려운 할머니를 위해서 하신 일인데 이대로 끝내면 아쉽잖아요."
"..그래요. 사장님 말이 맞아요. 법도 사람이 만든 거니까."
아주머니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며칠 후, 할머니가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빛나는 나무에 찾아가 식빵을 종류별로 하나씩 구입했다. 아주머니가 잘 해결하구나, 시현은 모두 먹기 좋게 잘라 종이 봉투에 넣는 와중 스스로도 기쁨을 느끼고 있음을 알았다.
"어제 부동산 아주머니랑 먼저 계약한 사람을 만났어요. 부동산 아주머니가 얼마나 간곡히 말해주던지..먼저 계약한 사람이 요즘도 이런 사람이 있느냐며 나에게 양보해 주었어요. 덕분에 좋은 집에서 살게 됬네요. 사장님도 고마워요. 아주머니한테 용기를 준게 사장님이라면서요. 내가 돈을 많이 벌면 빵 두개씩 살텐데..미안해요."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 할머니!"
부동산 아주머니가 가게에 들어서며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할머니는 몰래 준비하던 선물을 들킨 것처럼 겸연쩍은 웃음을 짓는다.
"아이고..내가 사서 부동산에 맡기고 올 생각이었는데.."
"할머니도 참..괜찮아요. 제 돈 내고 사먹으면 되는데."
"그런 소리 말아요. 내가 고마워서 그래. 여기 빵은 속도 안 불편하고 술술 넘어가지. 가져가서 부동산 사람들이랑 먹어요."
"아휴. 거절할 수도 없고. 감사합니다."
두 사람이 간이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때 시현은 빠르게 원두를 갈았다. 부드럽게 거품을 올린 카푸치노와 연하게 탄 아메리카노를 준비해 가게 밖으로 나간다. 커피를 건내기 전 흡사 모녀를 연상케 하는 두 사람의 웃음을 바라보는 시현. 다른 사람에게 웃는 얼굴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시현의 얼굴은 무척이나 평온했다. 그윽하게 풍겨오는 커피 향에 감정을 감추듯, 얼마 안 있어 평소의 무뚝뚝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