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을 바라볼 땐 자신의 그림자에서 뒤돌아 서야 한다.
시현은 소금을 한 꼬집 집어 혀에 대었다. 지뢰의 기능을 상실시키는 공병을 연상시키는 진지한 자세. 맛에 영향은 없다. 이어 설탕과 몇몇 가루 재료의 맛을 살피는 시현의 감각은 야생 동물과도 같았다. 모든 직업이 그렇듯 제빵에도 기준을 정할 순 있지만 절대적인 독단은 존재치 않는다. 항시 재료의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따라 수정과 변경을 해줘야 했다. 아무리 감각을 갈고 닦아도 진리를 얻을 확률은 반도 안 된다는 걸 인정하고 부단히 노력해야 할 뿐.
작업장 한 구석엔 발효종 병이 많이 놓여 있었다. 큼직한 유리병안엔 각종 과일을 기반으로 한 것과 밀, 요구르트 등이 들어 있다. 숙성 정도에 따라 상태엔 조금 차이가 있었다. 그 위에 날짜를 적고 상태에 따라 관리해 주어야 빛나는 나무의 빵을 만드는 데 필수인 발효종이 된다. 시현의 11년 경력에서 다른 제과장 밑에서 일한 건 고작 2년이었다. 예전처럼 기술을 숨기는 풍조는 없었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핵심 기술을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든 건 굉장한 재능. 무술의 과학적 원리를 몸으로 체득해온 유년기를 겪어서 일까, 제빵 기술에 있어서도 시현은 누구보다 정확하고 합리적인 지혜를 익힌 것이었다.
빛나는 나무는 인근 시장과 상점가에서 일찍 문을 여는 편이었다. 일곱 시에 가게 문을 열면 새벽일을 하는 몇몇 사람들이 빵을 사가곤 했다. 처음 나온 빵을 매대에 진열하는 사이 한 달 전부터 아침 식사 배달을 시작한 반찬 집이 분주한 것을 보았다. 업무 량이 만만치 않아 보이지만 사장 부부의 부지런함을 생각하면 소화할 수 있는 수준인 것 같다.
간간이 유리 너머로 아가씨도 한명 보인다. 전문대학을 다니는 첫째 딸로, 학교에 가기 전 장사를 돕고 있었다. 순박한 성격에 조금 둔한 듯한 언행이 똑똑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꾸준한 노력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 생활을 하고 있어 부부의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재료상을 하는 이도련 아저씨도 빛나는 나무의 새벽 손님 중 한명이었다. 단 것을 좋아한다는 아저씨는 밤식빵 혹은 건포도 식빵을 사곤 했다. 빛나는 나무에 음료 쇼케이스가 생긴 뒤부턴 꼭 녹차 두유를 한 팩 마셨는데, 바쁜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시현에게 얘기하는 것이었다. 시현은 도련 아저씨가 사업 실패로 빚어진 난투극에 연관된 폭행죄로 감옥에 갖다 온 것을 알고 있었다. 1년 형을 살고 나와 가족과 떨어져 이를 악물고 살아온 게 벌써 5년 째. 하루 종일 재료를 나르며 버는 돈으로 겨우겨우 가족의 생계를 이어가는 고단한 가장이었다.
"다들 수고 많으세요. 재료상 아저씨, 주먹밥 좀 드실래요?"
상가에 재료를 죽 돌린 도련 아저씨와 일곱시가 되어 장사를 시작한 시현. 두 사람이 진한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얘기를 나눌 때 반찬 가게 첫째 딸 시류가 락앤락 통에 담은 주먹밥을 가지고 다가왔다. 몇몇 식품만 먹고 사는 시현을 안다는 듯 도련 아저씨에 권하는 모습. 아저씨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환히 웃었다. 멸치 볶음과 볶은 김치가 들어간 주먹밥을 한입 베어 무니 몸이 다 따뜻해 지는 느낌이었다. 시현은 작은 하트가 그려진 달콤한 바닐라 라떼를 내려 시류에게 주었다. 스물 한살의 시류는 천진한 인상에 더없이 어울리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답례한다.
"식품영양학과 다닌다고 했지? 공부는 잘 되니?"
"그냥 삽질하는 거죠, 뭐. 장학금 받으면서 다니기가 쉽지 않네요."
"정말 반찬가게 부부 사장님들은 걱정이 없으시겠어. 이렇게 야무진 딸이 있어서."
"제가 뭘요. 공부 못해서 전문대도 겨우 들어갔는데.."
"무슨 소리. 요즘 4년제가 별 거야? 공부 한답시고 부모 등골 빼먹는 철없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시류처럼 열심히 사는 학생이 진짜 학생이지."
도련 아저씨는 힘주어 다짐하듯 말했다. 시류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다 등교해야 한다며 먼저 일어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도련 아저씨의 눈이 어느새 축축히 접어든 것에 대해 시현은 굳이 파헤쳐 묻지 않았다.
"우리 딸아이가 시류보다 두 살 많은데..잘 지내나 모르겠어. 얼굴 본 게 몇년 전인지.."
시현은 작업장에 들어가 반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소문은 좋아하지만 다른 사람의 감정에 영향이 될 말은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시현의 성격이었다. 아저씨의 드문드문 보이는 눈빛과 언행에서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가족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시현으로서는 그저 조용히 바라보는 것, 이따금 커피를 타 주는 것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보름 전쯤 서부터 점심에 사각식빵을 하나씩 사가는 손님이 있었다.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다며 잘라 달라 부탁하곤 했는데 근방 시장에 자리잡은지 얼마 안 되는 건어물상 아주머니였다. 듣기로는 물건이 너무 좋아서 흥정이 안돼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다곤 했다. 아직 시장이라고 하면 값을 깎으려는 손님이 있으니까. 식빵을 받아들고 잠시 가게를 둘러보는 아주머니에게 카페라테를 건낸다. 아주머니는 약간 피로한 인상임에도 "고마워요."인사를 했다.
"마요네즈 샐러드 해서 이 집 식빵으로 샌드위치 많이 해 먹었는데..사장님은 그런 걸 안 먹는다면서요. 다들 가져가지 말라고 해서 대접도 못했네요."
"신경쓰지 마세요."
"저희 건어물상은 일주일 있다가 문을 닫아요. 정말 좋은 것만 들여 놓았는데 잘 안 되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 집 빵도 좋은 것만 쓰고 있죠? 소문은 들었어요. 아무리 먹어도 속이 편한 빵이라고."
"저는 생산직이니 조금만 신경쓰면 질이 나오니까요."
"정말 무뚝뚝한 사람이네. 그러면서 친절하고...시현 씨를 좋아했던 아가씨가 많았겠어요."
"감사합니다."
아주머니는 후후 웃더니 가게를 나섰다. 아가씨라. 나를 좋아했던 여자가 얼마나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증오하는 여자는 꽤 많을 텐데. 가벼이 한숨을 쉬고 몸을 풀며 작업장으로 들어간다.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빵 반죽을 향해서.
건어물상 아주머니와의 인연은 한 매듭 더 이어졌다. 가게를 정리하는 중에도 떨이 판매를 하지 않아 정말로 오는 사람이 없다는 소문이었다. 빵이 잘 팔린 날 일찍 정리를 마친 시현은 건어물상을 찾아갔다. 텅 빈 가게를 지키고 있던 아주머니가 시현을 알아보고 시원한 보리차를 건낸다. 보리차로 입을 헹구며 건어물을 하나하나 살피는 시현. 질감과 내음 만으로도 기성품과는 격이 다른 느낌으로, 떨이 판매나 흥정을 하기엔 너무나 훌륭한 품질의 제품이었다. 이렇게 좋은 식재료를 취급하는 곳이 없어진다니. 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찻다. 그런 시현을 보고 고맙다는 듯 웃어보이는 아주머니.
"내가 엄한 자존심 때문에 싸게 팔지는 못하겠는데..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줘야 하려나 봐..."
"양로원에 보내는 건 어떨까요? 고아원 아이들 입맛엔 좀 안 맞을 테고. 이 정도면 어르신들에게 좋은 밥상을 제공할 수 있을 거예요."
"오호라..그런 것도 괜찮겠네. 시현 씨가 남는 빵을 고아원이랑 양로원에 보낸다며?"
"예.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보람있게 사용하실 수 있지 않을 까요?"
"그래. 시현 씨가 다리 좀 놔줘. 우리 부모님한테 못한 효도, 노인 분들께 좀 하게 생겼네."
시현은 바로 자신이 후원하는 양로원으로 연락을 넣었다. 그날 오후 바로 인계 차량이 도착했고, 직접 찾아온 양로원 원장은 아주머니에게 몇번이고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어림짐작으로 3,4백만원 가치는 될 질 좋은 건어물들. 힘들게 구해온 식재료를 무상으로 제공하면서 아주머니는 시원 섭섭한 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고마워, 시현 씨. 좋은 일을 하게 해줘서."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다시 이 시장에서 장사할지는 모르지만..시현 씨 빵 사먹으러 자주 올게. 번창해."
"커피 타 드릴테니 가끔 들러주십시오."
그 주 일요일. 매주 일요일마다 가게 문을 닫는 빛나는 나무엔 분주한 기운이 감돌았다. 일요일의 여섯 시간 동안 시현은 빵을 만드는 데 투자했다. 늘 만드는 식빵이 아닌 단과자빵을 종류별로 만든다. 단팥 빵. 슈크림 빵. 소보루 빵. 버터 크림 빵. 소시지 빵. 평소 식빵만 만드는 모습에 비교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술을 잊지 않기 위함도 있었지만 양로원이나 고아원의 사람들에게 달콤한 일요일을 만들어 주고자 하는 것이 가장 큰 이유. 매주의 봉사 활동을 계속 하면서도 시현은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얼굴 표정으로 모든 평판을 흘려 보낼 뿐.
건어물 가게를 완전히 비우는 날 시현은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비록 찾아가 볼 수는 없었지만 시현은 가슴 깊이 생각했다.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을 감사드린다고. 이틀에 한번 전화하는 것 말고는 효심을 표현할 길이 없는 시현에겐 그런 작은 일조차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