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내려온지 한 해가 지났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심박수가 120까지 뛰고,
걷기 시작하면 어지러워 비틀거리던 몸은 제법 안정을 찾았다.
그러나 마음의 병은 쉬이 낫지 않았다.
몇 년 동안 정신과 약을 먹다가
지난 12월 즈음, 드디어 일상 생활에 지장을 줄 만큼의 불안이나 우울이
관찰되지 않는다는 의사의 소견을 받았으나
나는 여전히 생각이 많았고 때때로 죽고 싶었다.
병들지 않은 사람은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던데,
나는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기분이었다.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하고 건강을 찾아
나 스스로를 지옥으로 몰아가는 생활은 멈추었지만
직업 특성 상 누군가 나를 찾아주고, 필요로 해주지 않으면
나 자신이 쓸모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생각의 악순환은 여전히 작동하는 듯 했다.
요 며칠 동안도 마찬가지.
분명히 계약서 쓰고 일 시작하면 되는데,
무슨 사정인지 일이 빠르게 진행되지 않는 회사 측의 연락을 기다리다
불안해하고 자책하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더군다나 날씨 또한 마찬가지. 누가 남부가 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나.
작년 여름에는 한 달 넘게 구름 낀 날씨만 계속되었고
오늘 아침에도 호우주의보와 강풍주의보가 동시에 왔으며
일주일 내내 비 예보가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영국 사람들이 그렇게 우울하다고 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그리고 오늘. 집 안에 계속 있다가 며칠만에 집을 나왔다.
간단히 분리수거를 하기 위해서였는데,
사람의 기억은 냄새 정보로도 저장된다는 말이 사실이었던 모양이다.
누런 잔디 밭에서 봄 특유의 따스한 냄새가 났고
하늘은 푸르고 구름 또한 희었으며 바람은 몸을 밀어내지 않을 만큼만 강하게 불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나와 날씨의 상태가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지독하게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서도 이렇게 좋은 게 남아 있다니, 이렇게 아름답다니,
싶은 마음에 문득.
아름다움이라는 단어의 '아름'은 본래 나 자신을 뜻하는 말이라지.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을 들여다보면
그 풍경이나 대상은 우리와 닮아 있을 거라고, 주변 사람에게 말해보고는 했는데.
요즘 들어 그런 아름다운 순간들이 그립다. 그 순간들로 인해 행복했던 순간도.
여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때 후덥지근한 거실 창가에 앉아 맡았던 젖은 흙 냄새.
아무도 밟지 않은 눈 덮인 언덕과 그 위로 햇살이 알알이 반짝이던 모습.
아침에 일을 시작하기 전 어제 마신 커피 잔에서 나는 은은한 커피 냄새 같은.
내가 쓸모 없어도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지.
예를 들어 내가 직장을 그만두어도 여전히 아침마다 포옹으로 인사하는 부모님이 있고
신경안정제와 항불안제를 과다 복용하는 바람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엉망인 상태이더라도
내 무릎 위로 올라와 몸을 동그랗게 말던 우리 집 강아지라던지.
그러나 요즈음은 누군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는가, 보다는
나는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했는가, 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런 생각을 시작하게 된 것도
진정으로 누군가를 그렇게 사랑할 수 있게 되고 나서의 일이다.
나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사랑을 쓸모없다고 치부했었던가.
신해욱이었나, 성동혁이었나. 어느 시인의 시구였는데.
정확한 시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얼음이 녹는 것처럼 진정으로 사람이 되는 일 또한 무서운 일이라고 누군가 적었다.
누군가의 꿈속에서 나는 매일 죽는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있는
얼음의 공포
물고기 알처럼 섬세하게
움직이는 이야기
나는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하나하나 열거하지 못한다
몇 번씩 얼굴을 바꾸며
내가 속한 시간과
나를 벗어난 시간을
생각한다
누군가의 꿈을 대신 꾸며
누군가의 웃음을
대신 웃으며
나는 낯선 공기이거나
때로는 실물에 대한 기억
나는 피를 흘리고
나는 인간이 되어가는 슬픔
(신해욱,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제목은 끝나지 않는 것에 대한 생각.
끝나지 않는 것이라 함은 인생이겠지.
그리고 나는 그것에 동감한다.
진짜 사람이 되어간다는 건 얼마나 슬프고 무서운가.
날씨가 좋아서 눈물이 난다는, 평소라면 어처구니 없는 표정으로 바라보았을 사람이 되어가는 공포와
그러한 변화가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는 기쁨이 오늘도 뒤섞인다. 고요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