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현재가 과거를 구할 수 있는가

by 계절


한강 작가는 어느 순간,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뒤집어서 생각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현재가 과거를 구할 수 있는가.


많은 시와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때때로 작가들이 글을 통해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작가들은 언제나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작품 속에 답을 써내려갔지만 오로지 질문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때가 있었다.

죽은 것이 다시 되살아날 수 있을까, 라는 윤이형의 질문 또한 마찬가지였다.

윤이형에 대한 평론을 준비하고 있던 나는 죽은 것은 다시 되살아날 수 없다, 고 답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답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되살아난다. 사람은 사랑으로 되살아난다.


그리고 몇 해가 다시 지난 지금, 한강이 물었다.

세상은 어떻게 이렇게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한강이 폭력에 대해 쓴 여러 글이 생각났다. 한강이라는 작가는 언제나 질문해왔다. 오래 전부터 그랬다. 채식주의자를 통해서는 육식이라고 하는 상징을 사용해 수직적인, 나무 줄기와 같은 형태의 폭력에 대해 이야기했다. 가정이라고 하는 작은 사회에서 일어나는 폭력은 캣콜링을 쓴 시인 이소호 또한 잘 적시한 바 있다(말 그대로 시각적으로). 폭력은 지붕을 타고 흐르는 빗방울처럼 아래로 흘러내리고, 그 지붕의 주인은 아버지이다. 이소호가 말하고 싶었던 폭력은 그런 것이다.

그러나 한강은 늘 그 이후에 대해 이야기했다. 육식과 채식, 식물처럼 모든 힘을 잃고도 천천히 되살아나는 듯한 기이함을 보였던 채식주의자의 그 중심 인물 뿐만 아니라 다른 작품 또한 그랬다. 한강의 흰, 에서 보았던 구절이 생각난다.


"그날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오래전 성이 있었다는 공원에서 내렸다. 제법 넓은 공원 숲을 가로질러 한참 걸으니 옛 병원 건물이 나왔다. 1944년 공급으로 파괴되었던 병원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한 뒤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곳이었다. 종달새와 흡사한 높은 음조로 새들이 우는, 울창한 나무들이 무수히 팔과 팔을 맞댄 소로를 따라 걸어나오며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 모든 것들이 한 번 죽었었다. 이 나무들과 새들, 거리들, 집들과 전차들, 사람들이 모두.

그러므로 이 도시에는 칠십 년 이상 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시가의 성곽들과 화려한 궁전, 시 외곽에 있는 왕들의 호숫가 여름 별장은 모두 가짜다. 사진과 그림과 지도에 의지해 끈질기게 복원한 새것이다. 간혹 어떤 기둥이나 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았을 경우에는, 그 옆과 위로 새 기둥과 새 벽이 연결되어 있다. 오래된 아랫부분과 새것인 윗부분을 분할하는 경계, 파괴를 증언하는 선들이 도드라지게 노출되어 있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 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 사람. "


죽었거나 파괴된 그 이후.

노랑무늬영원에 나오는 화자는 더는 그림을 그리기 힘든 몸이 되고 나서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 속에서 생명과 영원을 느꼈다. 한강의 글 또한 그랬다. 한강의 글은 때때로 선명하게 현실을 묘사했고, 어떤 사건의 여파 혹은 폭력의 지문을 자세히 기록했다. 때문에 한강의 글은 누군가에게는 '역겨울 정도로' 폭력적이고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숨이 벅찰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한강의 글에서 폭력을 보았느냐, 살아남은 이의 생명력을 보았느냐의 차이다. 식물 상태처럼, 유령 상태처럼 보이는 화자에게서 독자는 '살아있음'을 거의 느낄 수 없지만 그들은 '살아있다.' '작별하지 않는다'의 화자처럼 희미한 빛을 안고 폭설을 헤치고 걸어나가거나, 기이한 생명력을 보이는 식물처럼 살아남는다.


그리고 지금, 한강의 질문이 현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두를 관통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세상은 어떻게 이렇게 폭력적이고, 위험하며,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을까, 현재가 과거를 구할 수 있을까. 우리는 절반의 질문에 대답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현재가 과거를 구할 수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그리고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세상은 어째서 이렇게 고통스럽고, 어째서 이렇게 아름다운가. 그건 우리가 싸우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분열과 재생의 과정은 반드시 고통을 동반한다. 고통받고 있는 자는 세상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는 자다. 생존을 원할 뿐인 인간은 고통을 피하며 살아가는 기술을 익힌다. 우리가 불편을 극도로 회피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김수영과 블랑쇼, 한병철을 읽으며 알게 된 것들.


오랜시간 하나의 질문을 곱씹어왔다. 죽어버린 것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또 하나의 질문이 삶 위에 내려앉았다. 세상은 어떻게 이렇게나. 질문이 내게 스며들었기에 책을 든다. 다시 읽는다. 문학을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입술을 깨물던 끝에 오늘 어울리는 시가 생각났다.



"왜 이렇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간단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 --불란서 혁명의 기술"


"사랑을 알 때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1967.2.15. 김수영의 사랑의 변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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