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 만나던 남자가 있었다. 같은 대학에 다니던 사람. 그 사람은 미술을 하던 사람이었고,
나 또한 예술을 하며 온갖 철학 사조와 조각과 그림과 시를 닥치는 대로 탐하던 사람이었으나 우리는 대화가 통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우리는 같은 것을 보면서도 다른 부분에 집중했고, 같이 있는 시간은 즐겁지 않았으며 사소한 것으로 다투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나는 상대방이 나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아갔다.
상대도 그랬겠지.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술에 잔뜩 취한 채로 다른 여자와 잘 뻔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그게 서로 좋아서 한 일도 아니고 강제에 의해 일어날 뻔한 일이라는 걸 들었을 때에는
병에 걸릴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랬었지.
끔찍한 경험이었다.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상대 뿐만 아니라 나 자신도 끔찍하게 생각하게 된.
그 여자 아이는, 내가 아무 것도 모르고 태연하게 인사를 건넸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째서 주변의 그 누구도 나에게 제대로 된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한 건 이후의 일이다.
나는 상대의 거짓말 덕분에 그런 쓰레기까지 품어주는 쓰레기장으로 살았다. 그 시절에는.
제법 오랜 시간 잊고 지낸 그런 기억이
무리를 하거나 힘들 때 갑자기 집안에 들이닥친 벌레처럼 찾아온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기억, 더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것들이 불쑥불쑥 현관을 열어 젖힐 때가 잦았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하고 여러군데 알아보았다.
결론적으로 얻었던 것은 하나다. '그 기분 나쁘고 수치스럽고 모멸감 드는 기억이 나를 어떻게 좋은 사람으로 바꾸어 주었는지' 인지해야 한다는 것.
그러나 내가 좋은 사람일까. 동의할 수 없다. 상대를 구태여 성장의 발판으로 삼겠다고 다시 기억할 필요가 있는 걸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쁜 생각과 기억이, 끊임없이 눈꺼풀 사이를 찌르고 들어왔다.
그런 생각으로 마음이 소란스러울 즈음, 나는 맡은 일을 완벽하고 빠르게 해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과열되어 있었고
일을 천천히 해도 괜찮은 시기이니 무리하지 말라는 상사의 배려 덕분에 일주일 남짓한 휴가를 얻었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째 되던 날 정신이 들었다.
정신이 드니 다시 글을 쓸 수 있었다. 나 자신을 돌볼 수 있었다. 무언가를 다시 거뜬히 견딜 수 있었다.
더운 날씨는 여름이니 당연하다고, 더우니 도리어 좋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아픈 것과 건강한 것은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
그리고 드디어 정말로, '수치스럽고 모멸감 드는 불쾌한 기억이 나를 어떻게 바꿔주었는지'에 대해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어제 애인과 함께 본 영화는 이터널 선샤인이었다. 짐 캐리와 케이트 윈슬렛이 나오는.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때, 유난히 돈독한 사이였던 오빠와 보았을 뿐더러
나는 첫사랑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어린 아이였다. 때문에 이 영화가 어째서 그렇게 슬픈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 삶을 살아가면서 같은 영화를 볼 때마다 다른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책등이 하얗게 질려가는 책장 가득한 책들의 의미. 과거의 기억 사이로 불쑥 불쑥 들어오는 지금, 여기에서의 말들.
하얗게 눈이 내리는 해변. '흠 없는 신녀의 운명은 얼마나 행복한가?' 알렉산더 포프의 구절에서 나오는 '신녀'가
델포이의 피튀아를 말하는 것이라면 티없는 마음이란 세상물정을, 진실을 모르는 마음을 뜻하는 것이며
영원한 햇살이란 맹목적인 믿음이나 사랑, 희망과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피튀아의 미덕은 신의 말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정치나 사회 문제에 무지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것은 이전에 이미 몇 번이나 영화를 다시 보면서 찾아냈던 것이지만
어제 새롭게 보인 것이 있었다.
작중 클레멘타인의 머리 색은, 연애를 시작했을 때 가장 붉었다가 몬톡에서 조엘과 재회했을 때에는 파랗게 물들어 있다.
감독이 대놓고 언급까지 해주었는데도 지금 와서 깨달은 것은 그게 감정의 온도를 상징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맨 마지막 장면, 복도에서 두 사람이 마주보고 끝내 웃음을 터트려버렸을 때
클레멘타인의 머리카락은 푸르고 옷은 붉다. 마치 머리로는 어떻게든 파국을 맞이할 거라는 걸 알지만, 몸은 여전히 상대를 사랑한다는 걸 상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패트릭이 조엘의 흉내를 내며 그의 빈자리를 채우려 했을 때와는 다른, 몸이 알고 있는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색채란 영화의 미장센을 구성하는 주요 요소 중 하나다. 나는 그 사실을 이전에 배웠으며, 심지어 내게 끔찍한 기억을 준 상대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함께 라라랜드를 보았을 때의 일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하염없이 펑펑 울어버린 내게, 그는 그렇게 슬프지는 않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이 영화를 보며 흥미롭게 느낀 것은 배우가 입은 옷의 색깔이 변하는 장면들이었다고 덧붙였다.
그게 인물의 심정이나 상황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면서.
그렇구나, 하고 잊어버린 기억의 편린이다.
나 자신이 한심하고 끔찍하게 느껴진다면
그건 나 스스로가 나를 '이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지.
또한 그런 생각이 들 때에는 반드시 멈춰서 자신을 돌보아야 한다고.
오랜 시간 그런 말을 들었고, 동시에 몸으로도 깨달았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일들의 총합이 나라면
내 과거를 긍정하기 위해서는 지금을 긍정해야 한다.
이전에 있었던 모든 일이 나를 여기로 데려왔다고, 그래서 그 모든 우울과 파탄은 내가 반드시 경험해야만 했던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던 '네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여러 번 글로 썼듯이
나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만한 것으로 바꾸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끔찍한 기억이 너무나 많으면
나 스스로가 생각한 나와 너무나 다른 내가 지금, 여기에 있으면 쉽지 않은 일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라니, 내가 누구인지 너무나도 잘 아는 사람이 바로 나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뇌를 조사한 과학자들이
우리가 다른 이들을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의 개념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확장되기 때문이라고 하던데
어째서 간과하는가. 내가 타인을 사랑할 때,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나의 모습과 이상을 타인에게 투영하고 있다는 것을.
상대는 나의 욕망이 투영된 존재라는 라캉의 시점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그러나 분명 나는 차근차근히 변해간다. 좋았던, 싫었던, 찬란하고 산산조각 났던 그 모든 기억으로 인해.
나는 나를 싫어한다. 좋아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랑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지독하게 사랑해보았다.
그러나 이런 나로 지금 사랑하고 있는 이를 행복하게 해주어야 한다면
엉망인 나를 줄 수는 없다. 무슨 수를 쓰든 행복하게 해주어야지.
내가 이전의 모든 기억을 잊고, 어른스럽게 그 모든 것을 자양분 삼아 떠나보내야 한다고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사랑은 이상하다.
언젠가 강성은의 시집을 보고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어떤 시대를 통과해가는 매질이다. 우리의 육체는 그런 것이다, 강성은은 그것을 아는 시인 같다, 하고.
지금의 나 자신을 그렇게 느낀다.
어떤 사건과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파동에 하염없이 흔들리는 것 같다. 지금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