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가운 속의 밤

의사의 삶

by 윤슬

“다음 환자, 302호 할머니 MRI 결과 나왔습니다.”

하얀 가운을 입은 민수가 차트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곳은 대학병원 심장내과, 그는 15년 차 전문의 ‘김민수 교수’였다.


조용히 진료실에 앉은 그는 점점 지쳐가는 자신의 얼굴을 모니터 화면에서 확인했다.

“오늘만 몇 명째지…?”


아침 7시에 출근해 밤 9시까지 쉬지 않고 환자를 본 날이 수두룩했다.

응급 호출이 들어오면 식사도 못한 채 병실로 달려가야 했고,

중환자실에서는 생사의 갈림길에 선 환자들 앞에서 순간순간 무거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 의사의 삶은 고되고 힘들구나. 그래도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직업이니 가치 있겠지.’


그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했다.

의사라는 직업은 단순히 병을 고치는 일이 아니었다.

환자들의 고통, 가족들의 눈물, 병원 행정, 의료소송, 인터넷 악성 리뷰…


“우리 엄마 괜찮은 거 맞죠? 왜 이렇게 설명이 어려워요?”

환자의 보호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검사 결과는 조금 더 기다려야—”

“말이 너무 어렵다고요! 그냥 살 수 있는지 없는지 말해요!”


그는 숨을 고르며 조심스레 설명을 이어갔지만,

이미 보호자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그날 오후, 중환자실에서 심정지 환자가 발생했다.

“코드 블루! 5층 중환자실!”

그는 즉시 달려가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5분, 10분, 15분… 하지만 환자는 깨어나지 않았다.


“사망 선고 하겠습니다. 16시 38분.”


조용히 고개를 숙인 그는, 울부짖는 가족의 모습 앞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내가 더 잘했더라면… 아니야, 이건 누구도 막을 수 없었어.’


퇴근길, 병원 옥상에 서서 멍하니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던 민수는

문득, 한 소년 환자를 떠올렸다.


희귀병으로 몇 년째 병원에 입원 중이던 민호.

작고 마른 몸에 늘 미소를 머금은 그 아이는 그에게 자주 물었다.


“선생님, 나도 나으면 의사 될래요. 아픈 사람 고쳐주면, 마음도 같이 나아지는 것 같아요.”


그 말에 그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맞아… 이 길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지.’


어느 날 밤, 그는 민호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긴급 처치 끝에 아이는 가까스로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다음 날, 민호가 남긴 쪽지가 그의 주머니 속에서 발견됐다.


“선생님이 있어서 무섭지 않았어요. 고마워요.”


그는 조용히 웃었다.

모든 피로가 그 말 한 줄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내가 했던 수많은 선택들,

그 안에는 이렇게 누군가의 삶을 지킨 순간도 있었구나.’


하지만 동시에 생각했다.

이 무게를 평생 감당하며 살아가는 삶… 나에게 맞는 걸까?


그는 조용히 자판기 카드를 꺼냈다.



의사의 삶 체험 완료

다른 삶을 선택하려면 자판기 카드에 손을 얹으세요



“누군가에겐 이 일이 삶의 이유지만, 나에겐… 그 무게가 조금은 벅찼던 것 같아.”


민수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자판기에 손을 얹었다.

다음 버튼이 점멸하고 있었다.


[검사]


“정의를 지키는 삶… 과연 나는 진실과 마주하여 정의를 지킬 수 있을까?”


시간의 틈이 또 한 번, 조용히 열렸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