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의 딜레마

검사의 삶

by 윤슬

법정 안, 고요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김민수 검사'는 증거 서류를 꺼내 들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피고인은 조직적으로 서민을 상대로 투자 사기를 벌였습니다.

피해자 수는 43명, 피해 금액은 약 17억 원에 달합니다.”


검은 법복을 입고, 정의의 이름으로 기소하는 검사. 그것이 지금의 민수였다.

그는 사건 기록을 밤새 읽고, CCTV와 녹취록, 금융 거래 내역을 샅샅이 확인했다.
탐문 수사, 참고인 조사, 구속영장 청구…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잡기 위해 쉼 없이 달렸다.

검찰청 사무실엔 밤 10시가 넘어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피의자 진술, 빠르게 정리해 주세요.”
“압수물 목록 이건 왜 빠졌습니까? 다시 정리해서 보고해요.”


젊은 수사관들은 그의 철저함에 혀를 내둘렀다.

하지만 민수는 늘 긴장 속에서 살았다.
기소 한 번에 사람의 인생이 바뀌는 무게를 알기 때문이었다.


“김 검사는 이번에 대산전자 사건 맡게 되었어. 고소장은 어제 도착했더라고.”


부장검사의 말에 김태준은 서류를 받아 들었다.
‘대산전자 협력업체 직원, 산업기술 유출 혐의.’

고소인은 국내 1위 전자기업 대산전자.
피의자는 중소 협력업체 직원, 이선우 씨.
그는 회의록, 샘플 사진 등을 외부로 유출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이런 기술 유출은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중형 구형으로 가시죠.”

부장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민수는 서류를 넘기며 눈살을 찌푸렸다.

‘유출’이라고 하기엔 정황이 이상했다.
메일 전송 시간은 야근 중이었고, 수신자는 거래 중단 직전의 협력업체였다.
자료 대부분은 이미 공개된 것들이었고, 피해 사실도 불분명했다.

직접 조사를 시작한 그는 이선우 씨를 대면조사 했다.


“제가 그날 그걸 보냈던 건, 협력사에 남은 재고 정리를 위한 겁니다. 이미 납품이 끝난 부품들입니다. 기술 유출 같은 게 아니에요.”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대산전자가 협력 계약을 일방적으로 끊었고, 저희 회사는 폐업 직전이었어요. 그냥 마지막 정리를 도와주려던 거예요.”


민수는 잠시 말이 막혔다.
그의 말은 거짓이 아닌 듯했다.
하지만… 고소인은 대산전자였다.
이미 검찰 윗선과 대산전자 법무팀 간에 수사 방향도 조율된 상태였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법정의 문이 열렸다.

민수는 서류철을 가슴에 안은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피고석에 앉은 남자, 이선우 씨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 뒤엔 가족으로 보이는 아내와 어린 딸.
그들의 눈빛은 두려움과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검사 측, 최종 의견 말씀해 주세요.”


재판장의 말에, 민수는 천천히 일어섰다.
법복 자락이 발목에 스쳤다.


“본 검사는 피고인 이선우가 산업기술 유출 혐의로 기소된 이 사건에 대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기밀 유출이라는 행위는 용인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그의 목소리는 침착했지만, 손끝은 떨리고 있었다.
말을 이어가려다, 그는 조용히 고개를 들었다.

이선우 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엔 분노도, 변명도 없었다.
그저, 억울함과 간절함이 맑게 담겨 있었다.

그 순간, 민수의 입이 멈칫했다.

‘지금, 내가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재판정에 긴 침묵이 흘렀다.
피고인 방청석에서 누군가 조용히 흐느꼈다.

마침내 그는 입을 열었다.


“…하지만 본 검사는 이 사건의 자료를 반복 검토한 끝에, 해당 기술 정보가 이미 사내 포털에 남아 있었으며,
피고인이 이를 외부에 악의적으로 유출할 동기와 이익이 부족함을 확인하였습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또한 피고인은 중소 협력사 직원으로서, 대산전자의 일방적인 계약 해지로 직장을 잃을 위기에 놓인 상황이었습니다. 본 검사는 이 점을 고려하여, 구속 수사를 지양하고, 공정한 재판 절차를 통해 진실을 규명하고자 합니다.”


판사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재판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피고인의 구속 청구는 기각합니다. 정식 재판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이선우 씨는 말없이 눈을 감고 눈물을 흘렸다.

재판이 끝나고, 민수는 법정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작은 손이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아저씨, 아빠… 안 잡아가줘서 고마워요.”


그 아이의 말이, 웅장한 재판장의 말보다 무겁게 가슴을 때렸다.



며칠 뒤, 검찰 내부 게시판에 익명의 글이 올라왔다.


“요즘 검사는 대기업도 못 건드리나?”
“자기 정의감에 취해서 조직 신뢰 깎아먹는 자를 어떻게 봐야 할까?”


그리고 회의석상, 부장검사의 표정은 싸늘했다.


“김 검사, 대산전자 건은 윗선에서 민감하게 보고 있었어. 이렇게 흐리게 만들면 조직 전체가 손해야.”


민수는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후로 그는 주요 사건 배당에서 빠졌고, 자료 검토나 증거 정리 같은 ‘허드렛일’만 맡았다.

젊은 검사 몇몇은 그를 흘끔거리며 수군거렸다.


“출세길에서 멀어진 거 아냐?”
“혼자 정의로운 척하다가 불이익받은 꼴이지 뭐.”


억울한 사람을 돕기 위해 올바른 선택을 했지만, 돌아온 건 조직 내 냉대와 침묵뿐이었다.

‘내가 틀린 걸까? 정의는 왜 이렇게 외로운가…’

그날 밤, 검찰청 구내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마치려던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힘들지?”


돌아보니, 이성훈 검사가 조용히 앉았다.
그는 검사들 사이에서 원칙과 신념으로 통하는 인물이었다.


“나도 한때 너처럼 흔들린 적 있어. 진실을 말했는데, 조직은 불편해했지.”


그는 천천히 국을 한 숟갈 떠먹었다.


“그런데 말이야… 정의는 원래 박수받지 못해. 하지만 누군가 외면할 때, 한 사람이라도 붙잡아 주는 게 우리가 할 일이더군.”


민수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시간이 지나면 안다. 정의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지키는 거란 걸.”


이성훈 부장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흔들려도 괜찮아. 다만, 멈추지 마.”


그 말은 민수의 마음 깊은 곳에 박혔다.

그날 밤, 자판기 앞에 선 김태준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불확실한 정의 앞에서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누군가를 위한 일. 그리고 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기 위한 선택.’


'검사의 삶 체험 완료. 다른 삶을 선택하려면 자판기 카드에 손을 얹으세요'


그는 고개를 들고 다음 버튼을 눌렀다.
시간의 틈이 다시 열렸다.


[가정주부]


'그래, 소중한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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