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주부의 삶
눈을 뜬 민수는 당황스러웠다.
하얀 커튼, 장난감이 흩어진 거실,
그리고 부엌에서 들리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
“여보, 설거지 좀 해줘요! 애들이 또 쏟았어!”
아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금, 전업 가정주부로 살고 있었다.
하루는 정신없이 시작되었다.
아이 둘의 등원 준비.
유치원 가방, 도시락, 갈아입을 옷.
식탁에서는 아이가 시리얼을 바닥에 쏟았고, 막내는 울며 기저귀를 갈아달라고 소리쳤다.
하루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그는 기진맥진했다.
등원을 겨우 마친 뒤, 그는 부엌 바닥에 주저앉아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싱크대엔 아침 설거지, 소파엔 빨래 더미, 거실과 방에는 아이들이 벗어놓은 옷과 장난감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이게… 이렇게 힘든 일이었나.”
세탁기 돌리고, 설거지하고, 점심은 남은 반찬으로 겨우 때웠다.
방바닥엔 먼지와 머리카락이 굴러다니고 있었고, 이불은 아직도 개어지지 않은 채였다.
오후엔 아이가 열이 났다.
유치원에서 전화를 받고 급히 아이를 데리러 가 조퇴를 시켰다.
아이를 안고 나오는 김태준의 옆에 낯익은 또래 남자가 아이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자주 뵙네요.”
그 남자가 먼저 인사했다.
조용한 인상, 야윈 얼굴, 말끔한 셔츠. 그는 민수보다 두세 살 위쯤 되어 보였다.
“혹시… 전업이세요?”
“네. 둘째 돌 지나고부터 제가 맡고 있어요.”
그는 환하게 웃었다.
"쉽지 않으시죠?"
"네.. 한다고는 하는데, 잘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요. 아, 저는 김민수라고 합니다."
“저는 조한결입니다. 처음엔 저도 육아에 치이고 아무것도 못 하고, 정신없이 하루가 흘러간다고 생각했는데,
틈틈이 글을 써서 최근에 작은 출판사에 책을 냈어요."
“아… 작가시군요?”
“작가라고 불리긴 좀 민망하지만… 네. 정신없이 흘러간다고 생각했던 그 시간들이 오히려 글이 되더라고요.”
조한결은 아이의 손을 잡으며 덧붙였다.
“다른 건 몰라도, 애들이 커가는 걸 가장 가까이서 보는 기회.
그게 어떤 보상보다 커요. 남들이 안 알아줘도, 나는 내가 자랑스러워요.”
그는 인사를 건네고 아이와 함께 걸어갔다.
작은 아이 손을 잡고, 천천히.
민수는 한동안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저녁엔 아내가 퇴근했다.
그녀는 피곤한 표정으로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늘 하루 어땠어?”
“그냥… 좀 정신없었어.”
그는 간신히 대답했다.
아이들을 재우고 난 밤.
민수는 거실에 앉아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수고.
이게 바로… 가정이라는 전쟁터의 실상이구나.’
그 순간, 문득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일에 지쳐 돌아와, 아이들의 우는 소리에 짜증을 냈던 자신.
“하루 종일 집에 있었잖아!” 하고 무심히 내뱉었던 말.
그 말이 이렇게 큰 상처였다는 걸…
이제야 실감했다.
그날 밤, 그는 자판기 앞에 섰다.
몸은 고단했지만 마음은 잔잔했다.
‘모든 삶에는 보이지 않는 고통과, 겉으론 드러나지 않는 가치가 있다.’
그는 자판기 화면에 손을 올렸다.
'가정주부의 삶 체험 완료. 다른 삶을 선택하려면 자판기 카드에 손을 얹으세요'
화면 아래에 [현실로 돌아가기] 버튼이 새로 떠 있었다.
이제 선택의 순간이었다.
민수는 조용히 중얼였다.
“불평이 많았던 나, 이제는 조금 달라질 수 있겠지.”
그는 깊은숨을 내쉬며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