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가장 존중하지만 하늘에 맡긴다
아이에게 유익한 자극을 주고 싶어
좋은 책, 좋은 강의 섭렵하며
열심히 좋은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지만
어느 순간 뭔가 원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집중을 잘하고 있는 듯 보이던
아이의 노트 한편에 시답지 않은 낙서 하나를 보면 더 이상 유아 시절 내 아이의 귀여운 장난처럼 느껴지지 않고
'에구.. 다른 집 아이들은..'
하면서 불안감이 몰려오곤 한다.
유명한 옆집 성공기대로 잘 따라와 주지 않는
내 아이의 모습에 실망을 몇 차례 거듭하면
"아.. 그냥 학원이나 보내고 말자"
하는 마음이 쑥 올라온다.
차라리 처음부터 남들 가는 넓은 길 따를걸.
중심을 잡고 본질에 집중하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듯 보이는 바로 그때,
부모로서의 자괴감이 극에 이른다.
그런데 문제는 학원에 보낸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
모름지기 교육이란, 돈과 비례하지 않는다.
부모와 사회의 일방적인 인풋만큼
아웃풋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변수를 쏙 빼놓고
교육의 방법론에 가타부타 왈가왈부하는 것이
허탈하게 느껴진다.
도대체 부모들은 왜 아이 전문가 말은
한 귀로 듣고 그저 흘려보내는 것일까.
그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내면아이 문제이며
충족되지 못한 채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질병과
연결되어 있는 아주 비밀한 원리이다.
부모로서 충족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자녀의 결핍이 그리 크게 불안하지 않다.
그런데 기질적으로 회피성 기질을 지닌 부모들은
아이의 미래에 최대한 보호막을 쳐주려 부단히 고군분투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이가 아닌
부모 자신의 환경 설정에 따라
후천적으로 조절이 가능한 영역이다.
바로 자율성과 자아 초월이라는
양립불가인 듯 보이는 두 요인의 통합이
부모의 불안과 어긋난 기대로 인한
마음속 전쟁을 끝나게 한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교육 특성상
부모 역시 자율성을 충분히 누려본 적이 없다.
무엇인가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온몸으로 부딪치려는 태도보다는
누군가가 나를 위한 정답을 만들어 놓았을 거라는
희미한 기대 속에 살아간다.
그러다 보니 의존성이 지나치게 높은 사람들은
내밀한 불안을 타파하기 위해
추앙하고 따르려는 그 누군가,
혹은 그 어떤 강력한 조직을
선망한다.
사이비나 극단적 종교주의,
그리고 지나친 집단문화가 발달한 사회에는
개개인의 자율성이 저하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결국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키우기.
이것만큼 개인의 자율성을 키우는 방법은 없다.
결국 타인의 지나친 권위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를 존중하고
생각을 키우는 교육이 되어야 비로소
일방적이지 않은 수평적이고 실용적인
교육이 가능할 터.
그러나 보수적인 한국 교육의 분위기에서는
아이들에게 권한을 넘기는 것이
학생들에게 비대한 자의식 과잉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한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을 원천 차단해 주는 길이 있다.
바로 인생은 꼭 내 뜻대로 가지 않을 수 있다는
자기 초월적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
성경이나 논어 등 고전부터
전래 명작 동화, 소설에 이르기까지 읽어주어
꾸준히 인생의 다양한 경험을 쌓게 해 주는 것이다.
인생의 시야를 확장해 주는 경험을 쌓지 않으면
오직 부모나 학교 안에서만 정답이 있다고
알게 모르게 믿음을 한정하며
편협한 바운더리 안에 갇히게 된다.
(여기서 읽어준다는 의미는
아이와 교감하고 대화를 나눈다는 의미이다)
결국 독서와 대화가 정말 중요한 이유는,
수능 성적을 높이기 위함이거나
각종 시험을 잘 보기 위함이라기보다
내가 다 컨트롤할 수 있다는
자의식 과잉을 예방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지 않을까.
수학 문제 잘 푼다고
무한의 개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
영어 문제 잘 푼다고
영어를 사용해서
일상에 당면한 각종 복잡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결국 스스로 인생의 결정권을 회복하고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자기 초월성을 키울 때 비로소
내 아이는 스스로를 독립적인 존재로 바라보고
자기가 주도하는 학습을 하면서 동시에,
하늘에 맡기는 믿음을 키울 수 있다.
이것이 결여된 채
국영수 공부만 하는 친구들이
사실 나는 더 걱정이다.
진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