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잘 나가는 어린이집원장이었다.
마이크를 잡을 때 가장 어울렸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간디학교 교가처럼 난 늘 꿈을 꾸는 사람이다.
나는 어린이집 원장이었다.
나는 어린이집 원장으로 20년. 그전 교사로서의 경력 6년까지 26년이 조금 넘는 시간을 유아교육에 전념했다. 30대 초에 두 아이의 엄마로서 유아교육을 다시 공부했다. 그리고 30대 후반 꿈꾸던 어린이집 원장이 되었다.
유아교육과 교수님 중 ‘바다의 *’ 유치원을 경영하시던 분이 계셨다. 너무나 귀여운 목소리와 챙이 넓은 앙증맞은 모자는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이름이 너무 좋아 처음부터 기억했던 난 ‘바다의 *’이라 이름 지었다. 그렇게 ‘바다의 *’은 내 젊은 시간의 모든 중심이 되었다.
평범한 삶이 싫었던 나에게, 그동안 평범하다 못해 부끄럽기까지 한 나의 현실에서 ‘어린이집 원장’이란 꽤 괜찮은 명함을 오래도록 사용하게 된 것이다.
유아교육에 대한 철학이 나름 확고했기에, 난 거침없이 성장했다. 그리고 보육인상. 시장상. 도지사상. 뭐 등등 많은 상들은 덤으로 주어졌다.
선생님 공부해서 강의하세요!
“교수님”
50세가 되던 해. 드디어 괘나 괜찮은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게 된 것이다.
유아교육을 공부하던 때 예쁘고 풋풋한 20대 동기들 속에 만학도 아줌마 동기들이 몇 분 계셨다. 그중 한 명인 나에게 유독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교수님이 그러셨다.
“선생님! 선생님은 공부를 더 해서 강의를 하면 좋겠어요.”
사투리 사용하는 걸 유독 싫어했던 친정엄마 탓에 난 꽤나 세련된 말투를 사용했고, 어려서 웅변을 해서 그런지 또박또박 발음이 좋았던 거 같다. 하여튼 그분의 이 한마디는 ‘난 강의를 할 거야’라는 확고한 꿈이 추가되었다.
꿈을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마흔이 되던 해. 다시 아동복지학을 공부하게 했다, 대학 강단에 서기 위해선 최소한 석사학위가 필요했기에 3년이란 시간을 더 투자했다. 어린이집 일과 아이들 문제로 친정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논문을 작성했고 석사학위가 주어졌다.
그리고 어린이집 연합회 일로 너무나 바빠서 잠시 강의에 대한 꿈이 흐릿해질 때쯤이었다.
강의를 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상대평가를 해야 하는 학점관리제도는 나를 식겁하게 했다. 성적 정정 기간에 걸려오는 전화는 심장이 쿵쾅 될 정도였으니 말이다.
마이크를 잡고 서는 용기가 내게 있었다.
외향적이고 에너자이저인 나의 성향은 어린이집 연합회 임원으로서 긴 시간을 활동하게 했다.
‘적당하게’라는 건 상상도 못 하는 일 처리 능력 덕에, 어린이집을 대표하는 연합회 사무국장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4년이란 시간 동안 일반인으로선 상상도 못 했던 활동들을 기획하고 진행하게 된다.
도 보육인대회. 몇 만 명이 모이는 행사다. 보육인 시상자를 선정하고, 장기자랑 및 식사 그리고 이동 등을 치밀하게 계획. 준비하고, 진행해야 하는 일들은, 초인적인 능력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야만 했다.
그리고 매월 이루어지는 크고 작은 행사들.
특히 ‘보육 어린이 현장 체험활동’은, 몇 천명의 어린이가 안전하게 가정으로 귀가하기까지의 일정이 마무리됨과 동시에, 나는 며칠간 병원에 입원을 해야 했다.
요즘 언론을 떠들썩하게 하는 ‘새만금 잼버리’ 행사 진행 상황을 보면서 사실 쓴웃음이 나왔다. 나로선 준비상황이 상상이 안 되는 일이다.
그렇게 나는 50대 초반을 꿈꾸던 대로 이루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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