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이 왔다.

괜찮치 않은 갱년기. 이러다 정신병원 가는 거 아니야?

by 바다의별



‘올해는 저에게 안식년입니다’


‘어린이집원장’ ‘연합회 사무국장’ ‘대학 강사’란 괘 괜찮은 차를 동시에 몰게 되었다. 200킬로 정도의 속도로 나는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던 걸까?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도 고장이 난 거 같다.


그동안 주어진 많은 성공의 타이틀이 너무나 큼지막하게 포장되어 실려 있었다. 무겁고 버거웠지만, 그냥 멈추기엔 박살이 날 것 같았다.


52세가 되던 1월 멈출 준비를 했다.

누가 무어라 말해도 나는 멈추어야만 했다. 나의 몸이 빨간불로 쉴 새 없이 깜박이며 경고를 보냈기 때문이다.

다음 강의는 어렵다고 전했다. 연합회는 총회진행 후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2월 마지막 주. 떠나야 하는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보낸 후 남아있는 부모님들께 난 엄청난 일을 저질렀다. 공문을 보냈다.

‘올해는 저에게 안식년입니다’

그렇게 나의 차는 급정차되었다. 나의 차에 실려있던 모든 성공들이, 진짜 박살이 나서 처참했다. 어린이집은 반 토막이 나고 남아있는 선생님들은 나의 몫까지 다 감당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나는 연합회의 임원이 마무리되면 예전의 나로 돌아오는 줄 알았다. 난 자주 듣던 ‘순수해요’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어느 젊은 분이 사석에서 처음 만난 날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늘 멀리서 보던 원장님과 이렇게 식사를 하게 되다니. 영광이에요”


곁에 계시던 오랜 친분의 원장님 얼굴은 그리 좋아 보이질 않았다.

나의 동역자라 밤새워 말해주시던 원장님들이 너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마이크를 잡는 시간이 많아진 만큼 그분들은 나와의 거리감을 느끼셨나?.


난 거짓말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깊은 수면 아래로 내려앉았다.

3월 이렇게 안식년으로 숨은 것이 아주 긴 시간이 될 줄 미처 몰랐다.

나의 일기엔 이렇게 적혀있었다.


잠수
언제부턴가 다들 꼭꼭 숨는다.
아니 나부터 숨어버렸다.
감사함과 설렘과 기대감으로 나 꽁꽁 싸맨 채.
그렇게 잠시 다시 꼭꼭 숨어 버릴 테다.
그리고 보여주련다.
매실 향이 은은한 그쯤 일런가? (2015. 3월 일기)



괜찮지 않은 갱년기. 엄마 2층에서 하늘 보지 마.

온몸이 아팠다.

아픈 몸뚱이만큼 맘조차 아파 왔다. 가슴까지 답답하다. 한의원에서는 ’ 화병‘이라 진단했다.

이렇게 평생 아파야 하나? 까맣게 타들어 가는 나의 얼굴은, 판매하는 산삼을 선물하도록 만들 지경이었다. 난 그 산삼을 나보다 더 힘들어하는 누군가에게 다시 선물을 했다. 하여간 나의 오지랖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그분께는 지금도 감사하다. 다행히 며칠 후 남편이 미지급된 공사대금 대신 산삼 몇 뿌리를 받아왔다.

무차별적인 통증에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의 기복과 불면증, 오르락내리락 열감은 상상 초월이었다. 지독한 갱년기가 플러스된 것이었다.

둘째는 어디서 주워 들었는지 나를 만날 때마다 수시로 말했다.


“엄마 2층 가서 하늘 쳐다보지 마”


첫째가 남해로 1박 2일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우리 아이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나의 분노는 폭주했고, 큰애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짐을 챙겨 떠나버렸다.


“엄마! 엄마에게 너무 실망이야. 다시는 집에 안 올 거야.”


거의 30년 전이었다.

엄마가 한약 한재를 사 들고 인천에 있는 우리 집에 오셨다.

좀처럼 딸 집에 오지 않는 분인데.


“너희 오빠가 나를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네 신세 좀 지자.”


엄마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라 나를 보자마자 하소연을 했다.

엄마도 지독한 갱년기를 보내고 있었다. 엄마와 가장 가까이 지내던 막내 오빠가 엄마의 감정 기복을 견디지 못하고 근처 정신과 병원을 찾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지금처럼 정신의학이 보편화된 시절이 아니었다. 미친 사람으로 취급당했다는 것에 분노한 엄마는 다음날 퇴원을 하고, 자존심이 허락지 않았지만 딸 집으로 온 것이다.

엄마는 끝내 보름치 한약을 다 드시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나이가 어리던 나도 그때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나 이러다 정신병원 가는 거 아니야?

예배시간 한 시간 동안 분노가 폭발했다.

하필 내 앞자리에 우리 어린이집에 교사로 근무한 권사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 저년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가버려?‘

나의 주먹이 몇 번이나 그를 향했지만 실 가닥 같은 나의 이성이 미친 듯이 ’ 그건 아니야 ‘라고 속삭였다.

나를 지탱하던 성공이란 타이틀이 박살 나면서 나의 자존감은 치명적 타격을 받았다. 몇 달의 시간이 지났지만 나의 피해의식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특히 교회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극에 달했다.


내가 다니는 교회는 12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혈연과 지연의 고리로 ’끼리끼리‘ 빈틈없이 연결되어 있었다.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는 나에게는 장로 남편을 둔 권사들의 ’끼리끼리‘는 비난을 넘어 혐오하는 수준이었다.

하필 이분이 이 범주에 들었다. 그것도 교사로 근무하는 기간에 남편이 장로가 되었고 그분의 자랑질(?)은 정말 꼴 보기 싫었다. 아마 그분 역시 고용주인 나로부터 받는 불편함이 분명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한 시간을 젖 먹는 힘까지 다하여 버티어 낸 나는 여전히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계단을 후다닥 내려왔다.

’아~ 이래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겠구나. 나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거 아니야?‘

심리상담을 하고 계신 분에게 전화를 했다. 늦은 시간 달려오셨다. 평소에도 욕을 잘하지 못하는 내가 “이런 미친년이” 이 한마디로 어찌할 바를 몰라 하자 그분이 고개를 끄덕이며 차분하게 말씀하셨다.


“괜찮아요. 그냥 실컷 욕해요. 내 앞에선”

처음이었다. 한번 해 보고 싶었던 쌍욕(나의 기준에서)을 입 밖으로 내뱉어본 것은.



다름
틀린 것이 아닌 다름을
그냥 인정할 수 없어서 너무나 많이 아팠을 수도.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 나 때문에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누군가 때문에
너무나 많이 아팠던.

이 가을 나의 숙제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다르다 끄덕여주기. (2015년 9월 일기)



이후에도 나는 오랫동안 그분을 불편해했다.

물론 그분 역시 나의 눈 맞춤을 피한 형식적 인사를 나눌 뿐이다.

쉽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 그때 그랬어요 ‘하고 웃으며 말할 날이 올 거라 믿는다.



연합회 마지막 행사/ 보육인자정결의대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