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와의 불편한 동거가 싫다는 엄마.

자식이어도 불편할 수 있다.

by 바다의별
평생 처음 오빠의 이야기를 꺼냈어.
누군가는 '별일 아니에요'라고 하겠지.

필리핀으로 출장을 간 둘째 오빠가 친정 가족톡에 사진을 올렸다. 아버지를 많이 닮은 잘생긴 오빠가 표정 없는 얼굴로 현지인들과 찍은 사진이었다. 누가 현지인이 아닌지 구분이 안되었다. 오빠가 구미를 떠난 후 10년 가까이 오빠랑 대화를 한건 두어 번 될까? 사진 아래 무어라 댓글을 달고 싶었지만 다시 오빠랑 연결고리를 만드는 시작점이 될까 그만두었다.


오빠는 친정 가족 중 아마 나와 지낸 시간이 가장 많을 거 같다. 가족들이 치를 떠는 오빠의 사춘기와 20대의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했고, 30대가 되어서도, 40대가 되어서도 늘 나의 주위에 있었다. 그건 오직 엄마를 위한 불가항력적인 선택이었다. 오빠와의 동거가 일주일이상 지속되면 장남에게 구조요청이 오고, 다음 마지막 요청지는 '하나뿐인 딸' 나다. 그래도 엄마는 한 번도 먼저 고마워한 적이 없다. 아니 기억조차 없다. 오빠를 나에게 부탁했다는 건 엄마의 자존심이 허락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엄마는 애써 '부정'이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하고 있는 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방금 전에도 엄마의 전화가 왔다.

아침에 분명 오늘은 비가 와서 못 간다고 연락을 드렸는데 비가 오니 안 와도 된다고 연락을 주셨단다. 다 죽어가던 엄마의 목소리는 한 옥타브 올린 당당함이 느껴진다.


" 오빠는?" "차 타고 나갔다"


그리고 '잘 지내나? 우리가 놀러 왔다' 동네 아줌마들의 나를 향한 안부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온다. 지금도 엄마는 아닌 척 또 본인의 마음을 춘다.


오빠를 향한 두 가지의 감정이 나에게 있다


오빠는 내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잘 생긴 얼굴에 누군가를 대하는 태도도 상당히 매력적이었으니까.

나에게 기억되는 오빠는 늘 책을 끼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두꺼운 책들을. 오빠 덕에 나도 책을 꽤나 읽게 되었다. 그 어려웠던 책들을 어떻게 읽었는지 모르겠다. 특히 이상의 '날개'는 몇 번을 읽었지만 좀처럼 이해는 못 했다. 몇 년 전 다시 나는 이 책을 읽었다.


동네 처음으로 흙벽돌로 ㄱ자 집을 아버지가 지었다. 널찍했던 건넌방에 오빠의 이불이 늘 깔려있었고, 오빠가 읽던 책들과 오빠가 적다 만 커다란 노트가 있었다. 동네친구가 많지 않은(우리 동네가 양반동네(!)여서 남. 녀가 같이 놀면 안 되었다. 동갑이 합쳐서 넷 뿐이었지만) 나에게 오빠의 글들을 읽는 건 재미있는 놀이였고, '켈리크라피'같은 지금의 나의 글씨체는 오빠의 시원스러운 글씨체를 모방하다 만들어진 거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날 오빠가 친구들과 함께 디스코텍에 데려갔다. 술은 오빠에게 배워야 한다고. 나의 친구들은 열광했었다. 대학교 입학 후 '신입생 환영회'때 오빠를 나의 파트너로 데려갔을 땐 과 선배들이 소개해달라고 그때도 난리난리였었다.

그리고 오빠가 알려준 '여자는 분위기를 깨면 안 돼. 매력 없어' 그 세뇌는 오래도록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술잔을 쥐고 있게 했다. 지금 같은 세대라면 이건 벼락 맞을 말이지만.


몇 년 동안 함께 지낸 인천생활 때문인지 우리 아이들은, '도스(dos)'를 사용했던 처음으로 보는 컴퓨터를 두들기던 외삼촌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둘째 오빠도 가장 먼저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는 앞서가는 사고를 가졌었다.


오빠는 작은 소도시에서 전설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그건 다른 오빠들과 엄마가 전해주는 이야기들이다. 지독했다던 오빠의 사춘기를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오빠가 집에 있는 날 가족 모두가 침울했다. 특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도망을 갈 만큼 막내오빠가 당했던 피해는 지금도 치를 떤다고 한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아버지가 오빠들을 줄 세워 혼을 냈는데 나만 혼나지 않았던 기억을 요즘도 막내오빠랑 나눈다. 다행히도 아버지의 품속에 안긴 고양이 같았던 나는 그리 무섭지 않은 오빠였었다. 단지 우울한 집안 분위기가 불편할 뿐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나도 무서웠는지 모른다,



사실 난 보았다.


오빠는 오래도록. 정말 오래도록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존재였었다. 지금까지 가족조차도 나누지 않았던 오빠의 이야기를 집단상담 시간에 끄집어냈을 때 확인했다.


나는 오빠의 노조활동(70년대 시대 상황상 엄청난 사건)으로 경찰관들이 집으로 드나들 때도 엄마의 하소연을 통해서만 들었다. 그 일들로 인해 엄마는 도리어 오빠에 대한 기대를 더 하는 것처럼 나에겐 보였었다. 엄마는 오빠에 대한 푸념을 털어놓는데 늘 그랬다.


"자가 우리 집에서 제일 똑똑한데. 꼭 한가닥 할 배짱을 가진 놈인데. 세월이 그래서"


엄마의 그 말들을 들으면서 나도 '그럴 거야. 그래 그럴 거야. 엄마가 그렇게 '부정'함으로 방어기제를 삼을 때 나도 그랬다.


건장한 오빠 앞에 아버지와 엄마가 무너져 내리는 그날을 난 보고 말았다. 소 한 마리 값을 훔쳐서 친구들에게 퍼 주는 오빠를 아버지와 엄마가 막아섰을 때 휘두르는 폭력을. 그리고 엄마가 문을 뛰쳐나왔다.


그 일 이후 엄마 아버지의 모든 삶이 변했다. 나도 많이 변했었다. 물러버린 스투키처럼 무너져 내리는 엄마 아버지를 보호하지 못하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착한 아이'로 살아야 한다는 강박뿐이었다. 그리곤 내가 아무리 용을 써도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을 때 내가 선택해야 하는 건 막내오빠처럼 도망가는 거뿐이었다. 아버지에겐 엄청난 충격의 폭탄을 안겨드리는 꼴이 되었지만.



1년 동안 배낭여행을 마친 둘째 오빠가 엄마의 집으로 기어(?) 들어왔을 때 엄마는 경악했다. 나 역시 그런 엄마에게 경악했다. 엄마 혼자 사시는 넓은 집(새롭게 집을 지으심)에 둘이서 잘 지내면 얼마나 좋으련만 엄마는 또 1주일을 못 버티고 구조요청을 했다. 나도 심리적 육체적 너무나 힘든 시기였던지라 애써 외면했다. '엄마의 자식이니까 엄마가 감당할 몫이라고' 이번엔 막내오빠가 불편한 동거를 잠시 했다.

그리고 한참 동안 엄마와의 연락은 뜸해졌다. 나에게 섭섭하신 거다


며칠 전 둘째 오빠가 왔다는 연락을 받았다. 또다시 불편함의 기류가 흐른다.

단지 오빠는 집 앞 텃밭에 김장용 배추를 심고 있을 뿐이란다. 혹시나 엄마가 다칠지도 모를 조경용 돌들을 몽땅 치워버린 나에겐 별것이 아닌 일들이, 엄마에게는 그날의 기억처럼 만행을 저지른 것으로 느껴지는 건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무리 부정해도 무의식 속에 똬리를 턴 '수치스러운 공포'라는 녀석이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면 안 되었지만 그럴 수 있지'라고 용서되는 순간이 온다면, 지난날 그랬던 것처럼 '그때 우리 이랬지. 그래 너도 그랬어' 털털 웃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 볼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