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게. 다 소용없는데 누구 줄려고 그랬을까"
엄마는 나의 질문에 민망한듯한 웃음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그러고선 내가 다른 집 딸들보다 누린 혜택들을 도리어 자랑스럽게 쏱아내기 시작했다. '너는 고등학교도 보냈고, 오빠들도 보내지 않은 대학교도 보냈다.' 결론적으로 그걸로 이미 너에게 다 해 준 것이니 입 다물라'였다.
엄마말씀처럼 외동딸에 막내로 누린 혜택은 사실 많았다. 60년대생이 그렇듯이 중학교과정조차도 힘들게 다니는 친구들과 언니들이 많았다. 농번기엔 동생들을 챙겨야 했고, 집안살림을 도와야 했고, 가족의 생계와 형제자매의 등록금을 위하여 열악한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여고시절 명절에만 잠깐씩 볼 수 있는 고향친구들의 변신된 모습은 가끔씩 부럽기도 했었다. 예쁘게 화장을 하고 선물꾸러미를 들고 인사를 오는 먼 친척언니들의 삶은 나중 내가 대학생이 되어 그들의 숙소를 방문했을 때에야 나와 무언가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날카롭게 엄마와 대립한다.
"엄마. 내가 대학교를 간 건 엄마가 보낸 게 아니지. 내가 장학금 받고 간 거지. 오빠들이 만약 그때 같이 갔다면 엄마는 하늘이 두쪽이나도 나를 보내진 않았을 거야. 그리고 엄마가 막내오빠 공부하라고 등록금 대 주었다고 나한테 다 말했잖아. 다른 오빠들도 이래저래 가져간 돈들 대학교 다닌 것보다 더 많이 주었다고 엄마가 그래놓고선 "
나는 애써 눌렀던 감정이 다시 서러움으로 폭발하고
"엄마 그냥 네 마음이 그랬구나. 미안하다고 하면 되잖아."
엄마는 다시 언짢은 내색을 감추지 않았다.
60이 다 되어가는 내가 이렇게 까지 노년의 엄마에게 화를 내는 건 어떻게 보면 막돼먹은 딸로 보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 시대에 엄마로선 최선을 다한 양육일 수도 있다. 그래서 감사했고, 그래서 최선을 다해 엄마의 자랑스러운 딸이 되고 싶었다. 엄마의 끝없는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오빠들 대신에 나라도 하고 싶었다.
엄마는 내가 대학교 강의를 갔을 때 학교이름을 수첩에 적어두고 가라고 했었다. 엄마는 지금도 큰 손녀딸의 임용고시 합격했던 해를 기억하고 출신학교를 외우고 있을 정도다.
엄마는 나와 함께 가는 모든 병원비는 내가 지출하는 것이 늘 당연하다.
지난번 백내장수술을 했을 때에도 종합병원에 입원하면서 받은 지라 병원비가 상당히 많이 나왔다. 결제를 마치고 나니 슬그머니 5만 원 두장을 내미시더니 '괜찮아' 이 말에 바로 주머니에 집어 넣어졌다.
이 당연함이 어느 순간부터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엄마의 명의로 체크카드를 만들기로 했다. 오빠들의 설득에 엄마의 동의가 있었고 나는 엄마를 모시고 거래처 농협에 갔다.
"엄마가 몸이 편찮으셔서 제가 같이 왔어요. 체크카드를 만들려고요"
통장 거래만 하시다가 갑자기 딸과 함께 와서 체크카드를 만든다고 하니, 의심의 눈초리를 감추지 않는 엄마의 담당직원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갑자기 엄마의 목소리가 힘이 빠지면서
"내가 허락했습니다. 내가 아파서 딸과 왔어요."
불편한 엄마의 기색에 굳어버린 담당직원의 눈초리를 더 이상 견디기 힘들어 큰오빠에게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했다. 큰오빠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또다시 바닥에 깔린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엄마가 말씀했다.
"이런 큰일을 여자들이 해야 하나? 이런 거는 남자들이 나서서 해야지. 넘 부끄럽게"
"엄마. 걱정 마시고 동생이랑 하셔요. 내가 바빠서 동생한테 부탁을 했어요."
엄마는 큰오빠가 와 있을 거라 내심 기다렸던 거였다. 아들이 아닌 딸과 은행업무를 본다는 것이 도대체 무어가 부끄러운 것일까? 겨우겨우 오빠의 설득으로 엄마와 직원의 조금은 풀어진 눈빛을 느끼면서 은행업무는 끝났다.
큰오빠의 권유로 2개의 카드를 만들었다고 말하자마자 엄마의 얼굴은 다시 새파래졌다. 내가 돈이라도 빼 갈까 봐 그러시나. 난 통장금액조차도 궁금해하지 않았는데. 나는 체크카드를 엄마에게 그리고 막내오빠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체크카드 만들기 대 과업은 끝났다.
"엄마와 거리 두기가 필요해"
나의 말에 막내오빠가 그랬다.
"너 나중에 후회할 거야."
그렇다. 정말 나중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이라도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결정은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