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엄마와 부르는 버스킹이란다.

따뜻한 가족.

by 바다의별
오늘도 습관처럼 이른 새벽잠이 깼다.

아직 '아침묵상 동영상'이 업로드되기 전인 시간이라 '날개작가님'의 브런치북을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이분의 글은 내가 브런치 작가가 되고 처음으로 라이킷을 누르고 댓글을 달았었다. 풀어놓기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단편소설처럼 적어놓으셨기 대문이다. 그리고 브런치북 마지막 화엔 에필로그처럼 따뜻한 가족에 대한 정의를 남기셨다.



무언지 모를 눈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고 그 새벽에 라이킷을 눌렀다. 혹 피곤했던 하루를 회복하는 단잠을 깨우는 건 아닐까 고민도 되었지만.

따뜻했다.

어쩌면 물리적 환경은 내가 훨씬 더 나은 어린 시절일지 모르겠지만 엄마의 따뜻함에 대한 기억은 그분처럼 많지 않다.


무슨 일인지 난 국민학교 입학 이전의 기억은 거의 없다. 엄마가 나의 발톱을 깎다가 피가 났고 엄마가 나를 업고 이웃집 아줌마네 집으로 놀러 갔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그때가 나의 유아기 시절이라고 한다.

아버지와 엄마는 막내오빠와 나만 데리고 서울에서 몇 년을 살았다고 한다. 엄마에겐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고, 시골집 할머니댁에 남겨진 큰오빠와 둘째 오빠에겐 그야말로 지옥 같은 서러움의 시간이었을까? 하여간 둘째 오빠에겐 그랬던 거 같다.


갓 결혼한 작은아버지와 작은 어머니가 할머니를 모시면서 조카들을 키운다는 건 분명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할머니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다.

단지 눈이 온 세상을 다 덮은 날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작은 아버지가 할머니와의 정을 떼지 못해 미친 사람처럼 눈밭을 헤집고 다니셨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얼핏 들은 이야기이지만 할머니의 작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은 끔찍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에 흰쌀밥을 혼자만 먹이실 정도였다고 하니까.

어쨌든 할머니의 막무가내 서울동반상경에 대한 요구로 부모님은 어쩔 수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만약 계속해서 서울에 살았다면 엄마의 삶은 지금과 달랐을까?

엄마는 그 당시에도 참 예뻤다. 명절을 앞두고 한 번씩 미용사분이 마을로 오면 모든 동네 아줌마들이 빠글빠글 똑같은 파머를 했다. 엄마는 이때도 혼자만 우아하게 고대를 했다. 그리고 명절이나 마을 행사가 있을 때마다 한복을 곱게 있으셨다.

서울 물을 먹어 본 엄마의 감각인지, 다들 부잣집으로 시집을 잘 간 이모들의 영향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동네분들이 부담스러울 만큼 엄마는 옷차림과 외모가 남 달랐다.


엄마는 집에서 재봉질을 자주 하셨다. 버선 만들기는 기본이었고(엄마는 시골에서도 하얀 버선을 자주 신으셨다) 아버지의 한복을 직접 만들기도 하셨다. 엄마의 낡은 한복으로 나의 설빔 한복을 만들어서 입혀주셨다. 나 혼자서 한복을 입고 친구들의 부러움 속에 온 동네를 휘젓고 다니던 기억이 난다.


처음으로 ㄱ자 집을 지었을 때 엄마는 꽃이 있는 예쁜 타일을 벽 중간중간에 포인트로 직접 붙여놓으셨다. 농번기 겨울이 오면 뜨개질 부업을 하셨다. 그때는 실이 타래로 와서 나랑 아버지가 두 손을 어깨너비만큼 벌리고 있으면 엄마가 실타래를 걸고 풀어 동그랗게 말기 시작했다.

엄마는 늘 안주를 준비해 놓으셨다. 찹쌀풀을 발라 김부각을 만들고, 들깨송이를(맞는 표현인지?) 따서 부각으로 튀기면, 들깨향이 솔솔 나는 엄마만의 특별한 명절 음식이었다.


엄마는 가끔씩 연근. 당근. 생강등을 이용하여 전과를 만들어 두었다. 김 씨 집안 종갓집인 우리 집에 언제든 누가오더라도 예쁘게 술안주상을 차려서 내놓기 위해서였다.


엄마가 만들어 덮어 둔 하얀 레이스를 돌려 박은 냉장고 커버와 티브이커버를 오는 사람마다 칭찬하셨다. (그 당시 솜씨 좋은 이모 한분이 수예점을 운영하셨다. 재료는 요기서 구입.)


엄마의 이러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과, '여자는... (화났을 때는 가시나) 이런 걸 배워 놓아야 해' 선머슴애 같은 나에게 엄마와, 엄청 우애 좋은 듯한 이모들의 가르침이 마주칠 때마다 이어졌다.

나도 손재주는 뛰어나다. 이것은 그땐 지긋지긋한 잔소리였지만 정말 감사할 일이다.


그러나 이런 엄마가 부담스러운 건 아버지시다.

아버지는 그야말로 막걸리 스타일이셨다. 술조차도 막걸리만 드셨고, 특히 옷차림은 편안하게 입고 싶어 하셨다. 엄마가 풀 먹여 빳빳하게 다려놓은 모시적삼은 외출시마다 두 분의 다툼을 유발했다. 술 한잔 드시고 기분 좋아 바닥에라도 주저앉아버리면 끝장이다. 그리고 처가덕에 살림이 일어섰다는 엄마의 자부심은 나도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다.

돈 많은 이모들의 유세도 만만찮았다. 큰 이모는 그 당시 아이들도 옷을 맞추어 입힐 정도로 대형문구점을 운영하셨고, 방학 때 한 번씩 들리면 옷이며 노트며 선물을 한 보따리씩 싸서 주셨다. 뒷맛이 씁쓸했던 건 무능력해서 언니를 고생시키는 형부에 대한 불만을 딸인 나에게 대 놓고 투덜거렸었다. 기가 센 자매들.


이것이 10대 사춘기 이전의 나의 기억이다.

돌아보면 세련되지 않았지만 맘껏 사랑해 주신 아버지가 계셨고, 세련된 엄마의 가르침이 있었다.

물론 오빠들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른 상황 일 수도 있다. 부모의 사랑을 둘 다 포기하면서 10대를 살아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지금 오빠들과의 대화 속에서 느끼는 벽은 어찌할 수가 없다. 50이 되어 나는 그냥 아주 사랑만 받고자란 화초 같은 공주였다는 사실이 허상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다. 하지만 '무언가 따뜻하지 않다'라고 내가 느낄 뿐이라고 자책했었다.



엄마의 예민함은 청각을 서서히 잃게 만들었다.

그것은 더 다른 예민함을 낳았고 그 예민함은 엄마랑 가장 오래 살아온 아버지와 내가 안았다. 내가 결혼한 이후에는 막내오빠가, 그리고 이후엔 큰오빠의 몫이었는지 정확하지는 않다. 지금은 남아있는 모든 가족들이 안아야 하지만 다들 온전히 떠안고 싶지는 않은 듯하다. 조차도.


글을 적는 동안 온몸의 신경들이 면도날에 베이는 것처럼 아파온다.

엄마의 예민함을 닮은 나도 지난번 '다면적 인성검사' 결과에도 나타났듯이 내면의 아픔은 신체화되어 나타난다.

그럼에도 이리 급하게 후다닥 가족사를 발가벗듯 하나씩 내어놓는 것은, 내가 가진 수치심을 내어놓기 위해서다. 늘 말하지만 내가 버겁도록 갈등하는 괜찮아 보이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유롭고 싶어서다.


물리적으로 보이는 번듯한 환경 말고 내 안에서 용서되지 않는, 그리고 용서를 빌고 싶은 가족이었던 누군가와 그리고 지금도 가족인 이들을 더 이상 미워하거나 원망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사랑하며 살기에도 부족한 나이이지 않은가?


글을 적기 전 이 영상은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치매엄마와 덕수궁돌담길에서 부르는 버스킹 ㆍ ㆍㆍhttps://youtu.be/6 BiigXcHiWI? si=wMK-gdLoUDcl0 p93


해리 할로우 박사님의 '헝겊 원숭이 실험(가짜원숭이 실험)'에서 우유병을 든 철사 엄마보다는 우유병이 없는 헝겊인형에게 더 많은 애착을 느끼는 것처럼, 그래도 난 자꾸만 돌아가신 아버지가 더 따뜻하고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