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동의가 있었다.(2)

그래도 엄마욕을 하는 건 아니었어.

by 바다의별


'엄마 우리는 조카들에게 사과해야 해'
엄마는 '나 그런 적이 없는데' 친구를 몰래 때려놓고 아닌 척하는 천진난만한(?) 4살 아이처럼 고개를 우아하게 젓는다.



내가 교회에 적응이 어느 정도 되고 따가운 시선들을 느꼈지만 맑디맑은 나의 영혼은 '나한테 왜 저러는 건가?' 정도였다. 어린이집 원장으로서 나름 성공적인 안정을 취해가는 나였기에 '질투인가?'정도로 받아들였다. 극 [외향적인 성향]에다 [자기애 성향]도 꽤나 높은 나의 행동은 꼴불견 자체였겠지. 딱 때 맞추어 올케언니로부터 들려오는 친정집의 모든 가족사는 최고의 간식거리로 제공되었다는 것을 한참 후에 알았다.

지금도 소꿉친구들인 이들의 양아치무리는 박힌 돌의 역할로 대단하다. 조금은 수그러들었던가? 아니다.


하여간 몇 년의 시간이 지나니 나도 알지 못하는 가족사가 나의 귀로 직접적인 질문으로 전달되었다. 하필이면 사무실이 교회 근처에 있는 남편과, 나랑 공감대가 형성된 공동체 식구들을 통해서다. 알고 보니 오빠의 사업장 옆에 오픈한 언니의 식당이 이들의 아지트였다는 것을 나는 왜 눈치를 못 챈 걸까?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수치심이 밀물처럼 몰려온 것이다.

돌아보면 그토록 화가 난 건 나 스스로 수치스러운 가족사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 일 것이다.

그것이 까발려졌다는 건 완벽해야 하는 나의 이미지에 치명적 타격으로 느껴져 왔다.

그리고 흥과 끼로 충만했던 아버지의 유전자 탓인지, 성공을 추구하는 엄마의 유전자 탓인지 오빠도 물적, 명예적 성공의 궤도에 올랐고 덩달아 언니의 줏가도 상승했다.


부의 상징인 그랜져가 있었고, 수상스키인 제트스키가 휴일이면 낙동강을 물보라를 일으키며 달리고 있었다. 이런 씀씀이는 엄마에게 언니를 향한 공격의 빌미를 제공했다. '오빠의 등골을 빼는 여편네'로 엄마의 비난이 시작되었고, 교회 식구들로부터 받은 부당한 눈길에 대한 비판으로 나는 엄마와 일치점을 찾았다.


친정아버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탓에 오빠에 대한 불안함이 많았던(이건 나의 관점. 실제 원인을 제공했는지는 모름) 올케언니와의 갈등에 기름과 불을 동시에 붙는 사건이 일어났다.



오빠가 동창들과의 만남이 끝난 후 대리운전을 통해 집 주차장에 도착했지만 재 주차를 시도하던 오빠의 차는 순식간에 달렸고 오빠는 뇌출혈이라는 중상을 입었다.

오빠는 며칠 후 딸이 근무하는 병원에서 뇌 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왔다. 그것도 아내가 아닌 엄마의 수술 동의서를 받아야 했다.

오빠는 일주일 만에 다시 재 수술을 받았다. 그 무서운 뇌 수술을 두 번이나 받은 오빠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보았던 파르스름한 온몸의 색깔로 응급실을 향했다. 응급실 바닥에 앉아 울고불고 난리를 부리는 그 여자들을 엄마와 나는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날도 올케언니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올케 언니의 모든 삶을 샤머니즘으로 통제하던 유일한 보호자인 언니가족이 함께 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일반병실로 옮긴 오빠는 완전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한쪽 머리는 움푹 들어가 있었고 그 와중에도 병원비 타령만 하는 언니를 머리를 쥐 떴고 싶다는 맘이 들 정도였다.


나는 어리석게 기도 요청을 했다. 그러나 '내가 그러면 안 되었다'는 비난의 소리로 나에게 전달이 되기 시작했다. 그 양아치 무리들이 언니의 입장을 온 교회에 소문을 내주었다. (내가 학창 시절 보았던 양아치들이란 표현 말고는 적절한 단어가 없다) 전도사님이나 권사님들을 통한 권면이 나에게 시작되었다.


이런 미쳐버릴 상황의 전개라니.


그리고 오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이라는 카드를 받았다. 그리고 그렇게 좋은 그랜져가 아닌 트럭에 실려 엄마네 집으로 왔다. 바로 그 양아치 아줌마들 중 한 분의 남편이 운전을 했단다.


그렇게 많이 병든 오빠를 내 팽개친 나쁜 년의 말이 더 신뢰되고 있다는 건 나로서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엄마와 나의 흑백논리에 의하여 이 떠벌이 무리들은 적이라 단정 지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한 무차별적인 냉소와 거리 두기가 시작되었다.


오빠는 버려졌다. 무슨 상황에서도 아내의 입장에서 나를 설득하던 오빠는, 가족과의 이별을 끝까지 원하지 않았지만, 아픈 채로 처참하게 버림받은 것이라고 우리 가족은 분노했다.

지금 오롯이 여자의 관점에서 돌아본다면 그 선택에 박수까지는 절대 아니고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의 이해는 한다.


오빠는 엄마의 1년 가까운 보살핌으로 다시 회복해 갔고 나는 오빠를 어린이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동안 오빠에게 여동생이라 받은 것들을 갚아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오빠는 이때 카메라를 들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을 마음과 카메라렌즈에 담기 시작했다. 어린이집 운전을 도우며 아이들을 학부모님들을 가족으로 여기며 살아냈다.


이혼한 언니는 오빠의 근처에서 맴돌았고 이런저런 협박도 만만찮았음을 알고 있다. 재산 분할에 대한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였는지 아픈 사람이 운전을 한다고 시에 신고하겠다는 협박도 있었다고 한다. 어린이집 원장님들을 통하여 나와 오빠에 대한 맹공격이 이후로도 이어졌다는 것을 듣고 있다. 음식솜씨가 좋으니 생계를 위하여 조리사로 근무했다고 한다.


지금의 오빠는 조금의 계획에도 없었던 [바닥을 기는 실패자]라는 오명이 있었지만, 기타리스트로 자신의 노후를 잘 가꾸어가고 있다. 그리고 어린이집과의 인연으로 연결된 학원에서 모든 열정도 다하고 있다. 근처 산중턱에 '0방'이라는 본인만의 아지트를 놀이터 삼아 가꾸기도 한다. 최고의 베짱이 삶이다. 그런 오빠를 나는 응원한다.



얼마 전 둘째가 소식을 전했다.


"엄마 외숙모 다시 암이 재발했다고 그러던데"

" 그랬구나...... "


나는 그냥 침묵했다.

어쨌든 두 조카의 엄마이고 가족이었던 인연이 있지 않은가? 시집을 간 조카는 지금도 아빠와 할머니와 고모는 상종 못할 원수라 생각하는 듯하다. 이젠 충분히 이해한다. 다행히 조카 녀석은 '고모' 하며 가끔씩 반가운 연락이 온다.


조카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참 사춘기 시절에 아빠와의 헤어짐에 이어 암과 싸우는 엄마까지 겪는 마음을 좀 더 많이 토닥여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그래도 잘 자라 주었다.



내가 아버지를 흉보는 이모가 미웠던 것처럼 '너네 엄마는 천벌을 받아야 한다'라고 독설을 퍼붓는 할머니가 얼마나 밉고 원망스러웠을까? 하나밖에 없는 고모란 사람은 먼저 전화 한 통이 없다. 오늘은 조카들에게 연락을 보내야 할거 같다.

'진심으로 미안해'


답이 오는 건 그들의 선택이다.


답이 왔다.

고모!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