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 청동에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를 새기다
: 로댕,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를 새기다
그는 말없이 생각에 잠긴 채 앉아 있다.
모든 힘을 쏟아 사유하고 있다.
온몸이 머리가 됐고,
혈관에 흐르는 모든 피는 뇌가 되었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
'지옥의 문'에서 지옥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는 누구일까?
단테일 수도, 로댕 자신일 수도, 아니면 고통의 세계를 마주한 ‘우리 모두’일 수도 있다.
그는 지옥의 인간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회의일까, 좌절일까? 아니면, 인생의 무상함에 대한 지독한 깨달음일지도 모른다.
그는 온몸으로 우리에게 묻는다.
"과연 당신은 무엇으로 사는가?"
스피노자는 말한다.
인간은 자기 존재를 유지하려는 힘,
곧 ‘코나투스(Conatus)’에 따라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욕망하는 것, 표현하는 것 모두
결국 인간이 존재를 지속하려는 하나의 방식이다.
그가 말하는 '무엇'이란, 거창하거나 무겁지 않다.
코나투스, 그것은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 있다.
내 아이의 웃음이 오늘을 견디게 한다.
부인의 숨은 배려와 사랑이 살아가는 힘이 된다.
누군가의 지지, 오늘의 땀과 작은 성취가 나로 서 있게 한다. 결국 우리는 일상의 소소한 기쁨과 사랑, 작은 성취로 살아간다.
'생각하는 사람'의 사유도 끝내 그 평범한 순간들에 도달하지 않을까.
그 일상의 순간들 속에 삶을 버티는 힘도,
나답게 존재하려는 몸짓도 있으니.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에는 '코나투스'가 약동하고 있다. 어두운 지옥 속에서 생의 의지를 읽고, 죽음 속에서 삶의 의미를 보는 그의 치열한 사유는 진실하고도 격렬한 생의 몸짓이다.
로댕, '생각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말한다.
"생각하라! 그러나 머릿속에서만 머물지 말고, 살아가며 생각하라. 그저 존재를 버티는 힘이 아니라, 나답게 존재하려는 그 마음으로."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라,
"나를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이 에세이를 끝으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시리즈를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오늘을 견디기 위해, 나로 살기 위해. 모두 살아 있는 사유이며, 존재를 붙드는 몸부림입니다. 그 어떤 사유도 경중 없이 귀하고, 헛된 법이 없습니다.
오늘 당신의 생각이, 나다운 삶으로 피어나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