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의 <걷는 사람> Ⅲ

두 발로 선 인간

by 시선
이 지상에는 거인이 있다.
그에게는 기관차를 거뜬히 들어 올리는 팔이 있다. 하루에 수천 킬로미터나 달릴 수 있는 발이 있다. 어떤 새보다도 높이 구름 위를 날 수 있는 날개가 있다. 어떤 물고기보다도 자연스럽게 물속을 헤엄칠 수 있는 지느러미가 있다. 보이지 않는 것도 볼 수 있는 눈이 있으며, 다른 대륙에서 말하는 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 그는 산을 뚫고 엄청난 기세로 떨어지는 폭포를 막을 수 있을 정도의 힘이 있다. 그는 자기 마음먹은 대로 대지를 개조하고 숲을 만들고 바다와 바다를 연결하고, 사막에도 물을 끌어들인다.
이 거인은 바로 인간이다.

- 미하일 일리인(Mikhail Ilyin, 1895-1953)




르네 마그리트, <인간의 아들>(1964)

두 발로 걷는다는 것,

그것은 단지 한 생명체의 이동 방식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 무게를 감당하며 세상에 맞서는 방법이자, 자기 진화를 증명하는 몸짓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으로서 꼿꼿이 걸어야 하는 직립의 책임을 떠맡게 된 것이다.


두 발로 꼿꼿이 서서 걷는다는 것,

직립은 인류가 지구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적 선택이었고, 중력을 거스르는 대자연에 대한 도전이자 수직의 꿈이었다.

눈은 밝아졌고 푸른 하늘 너머의 세계를 동경했다. 목을 열어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했으며, 지혜로운 두 손은 창조의 흔적을 새겼다.


알베르토 자코메티, <걷는 사람>(1960)

한편, 직립의 대가는 혹독했다.

뒷발로 온전히 몸의 무게를 지탱해야 했고, 척추는 구부러지고 출산은 고통이 되었다. 또한 속도는 느려졌으며, 감각은 무뎌졌다.

하여 거친 산야를 달리기에는 쉽게 지쳤고, 다가오는 맹수의 소리와 체취를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두발로 서서, 걷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뼈아픈 직립’이었다.


피테르 브뤼헐(Pieter Bruegel, 1527-1569), <바벨탑>

대지에 우뚝 선 인간은 저 높은 세계를 바라보았다.

바벨탑을 세워 그곳에 닿고자 했고, 감히 피라미드 속에서 영생을 꿈꾸었다. 고개를 들수록 인간은 오만해졌고, 하늘을 향할수록 뿌리는 말라갔다. 직립은 눈부셨으나, 위태로웠다.


한편,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던 인간은 때때로 고개를 숙이기도 했다.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여정에서 인간은 대자연의 거대한 질서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그리고 먼저 간 이들을 보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저 나약함을 시인하며 무릎 꿇고 홀로 기도하는 일뿐이었다. 직립은 자유였으나, 고독이었다.


오귀스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왼쪽), <걷는 사람>(오른쪽)


로댕의 ‘생각하는 인간’과 ‘걷는 인간’ 사이.

온몸으로 사유하는 존재로서의 인간과 몸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인간 사이. 우리는 이 두 조각 사이에서 오늘을 살아낸다.


때로는 온 힘을 다해 고민하고 때로는 아무 말없이 그저 걷고는 한다. 걷는 자는 다시 일어선 자이며, 걷는 자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자이다.


두 발로 서서, 걷는다는 것,

그것은 ‘나 아직 살아있다’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언어이다.




이 에세이를 끝으로, 로댕의 <걷는 사람> 시리즈를 마무리합니다.
이 글이, 지금 어딘가를 묵묵히 걷고 있는 이들에게 조용한 응원이 되었으면 합니다. 걷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위대한 일입니다. 두 발로 걷는 자만이 앞으로 한발 내딛을 수 있고, 넘어진 자만이 다시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매일 걷습니다.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두렵고, 때로는 막막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걷습니다. 그 걸음 속에서 삶의 희망이 조금씩 피어나기를, 나다운 길이 열리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