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혼숙려캠프의 이호선 선생님을 좋아한다. 왠지 오로지 자기 능력만으로 사회에서 덧씌우는 굴레를 이겨내나가신 분의 느낌이 있어서 좋다. 정규 심리상담 공부도 많이 하셨겠지만, 사람을 읽는 감이 탁월하시다. 상대의 약한 부분을 정확히 알고 신뢰를 얻어서 미래에 도움이 될 조언을 해주신다. 팩트폭격을 날리실 때마다 속이 다 시원하다. 말씀을 너무 잘하셔서 정말 매운 맛의 출연자들도 이호선 선생님 앞에선 고개를 숙이고 만다.
하지만 어제 본 부부는 이호선 선생님도 해결이 불가능해보였다.
그 이유는 여자가 남자가 어떤 죄를 지어도 용서해주기 때문이었다. 남자에게는 이미 죄가 많다. 그는 결혼하자마자 바람을 피웠다. 바람 피운 후 '어~ 미안해~'라는 한 마디로 퉁친다. 그러면서 여자의 행실이 나쁘다며 온갖 트집이고, 여자의 딸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친다. 원래 집에 살던 첫째와 둘째 (모두 20대이다)는 독립을 하고, 10대인 셋째는 가출을 하고, 16살인 넷째가 집에 남았다. 넷째는 아빠의 마음도 이해하고 엄마의 마음도 이해한다며 다정한 말을 하지만, 제작진에게는 "삼촌은 엄마를 돈으로 보고, 엄마는 삼촌을 통해 공허함을 채우려 해요."라고 놀랍도록 냉철한 진단을 털어놓는다.
남자가 그 여자 눈에는 귀엽고 애틋해보이는 것 같았다. 그 귀여움의 힘이 얼마나 큰지, 본인과 자식들의 인생이 무너져도 귀여움에 혹하고 마는 것을 보며, 패널들은 정신차리라며 여자를 다그쳤다.
여자는 패널들로부터 질책을 당하는 것이 억울한 것 같았다.
나는 사랑으로 남편을 최대한 용서한 것인데,
나에게 고통을 준 것은 남편인데,
아이들에게 고통을 준 것도 남편인데,
왜 내가 나쁜 엄마란 소리를 들어야 하는 걸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 분을 보면서 '목로주점'의 제르베즈 생각이 났다. 하나의 장면이 마음 속에 오래 남는 책들이 있다. 나에게 목로주점은 제르베즈가 식빵처럼 발간 볼을 하고 멋지게 빨랫터를 운영하는 모습으로 남아있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빨랫터에서 파리의 아낙네들이 모여 열심히 빨래를 하고, 제르베즈는 나날이 성장해가는 사업체를 보면서 딸과 안정적인 가정을 꾸려갈 생각에 행복감을 느낀다. 딱 이 때가 내가 마음으로 응원하고 안아주고 싶은 제르베즈의 모습이다.
제르베즈는 좋은 사람이다. 성실하고, 착하고, 불평하지 않고, 주변 사람을 잘 돕는다. 그런데 남자를 보는 눈이 없다. 제르베즈의 빨랫터가 잘되자 파리 뒷골목의 사기꾼들이 들러 붙는다. 그들은 사랑으로 그녀를 구슬리고, 어린 나이에 어린 딸을 건사하느라 외로운 마음을 키워 온 그녀는 사탕발림에 넘어간다. 문제는 한 번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계속 넘어간다는 것이다. 각각의 남자들이 혐오스럽게 묘사되기에 독자 입장에서는 도대체 왜 저런 남자에게 기회를 주는지 의아한 마음이 들지만, 제르베즈에게는 무언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자비심인지, 성적 긴장감인지, 재미인지 도저히 그 출처는 알수가 없다. 하지만 무척 강력하다. 제르베즈가 자신의 인생을 버리고 싶었던 것도 아니고, 딸의 인생을 망치고 싶었던 것도 아니지만, 그 개개의 (바보 같은? 순진한?) 용서가 켜켜이 쌓여서 슬픈 결말로 이어진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도 비슷한 이야기였다. 마츠코는 제르베즈보다 교육을 훨씬 잘 받은 학교 선생님이었는데도, 자신을 때리는 남자들을 끝없이 용서하고 몸을 팔아서 그 남자들의 생활을 뒷받침한다. 그 남자들도 지나고보면 마츠코를 진심으로 사랑하긴 했던 것으로 나온다.
이런 이야기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반복된 내러티브인 듯 하다. 용서받을 가치가 없는 남자를 용서하는 여자들. 그런 여자의 용서 때문에 더 바닥으로 내려가는 남자.
나는 제르베즈를 보면서, 이혼숙려캠프의 아이 엄마를 보면서, 마츠코를 보면서,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외롭게 했나 궁금했다. 부모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해서? 교육 수준이 높지 않아서? 연애 시장에서 인기가 없어서? 남자를 원래 좋아해서? ... 하지만 여자는 원래 남자를 좋아하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런 용서하는 여자의 목록에 한 명이 추가되었다.
바로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Alice Munro)다.
이 분은 어쩌면 교육 수준과 커리어 측면에서 세계 정점을 찍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인의 어머니와 별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지만, 괜찮은 집의 자제로 당시 여자로서는 드물게 대학을 갔고, 대학에서 부잣집 출신 남편을 만나 자녀 셋을 낳았다. 여성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아 초기에는 주변인들에게 글을 쓴다는 것을 숨겼다고 한다. 하지만 그녀는 글을 계속 썼고, 딸들은 "엄마의 삶은 실제 삶 보다도 글 속에 있었다"라고 회상할 만큼 글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녀는 단편소설에 집중한 이유가 '너무 많은 집안일' 때문이었다고 회상한다. 아무리 남편의 지원이 있다고 한들, 세 딸을 키우면서 주변에 작가라는 사실을 숨긴 채로 긴 호흡의 글을 쓰긴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서른 여섯이 되던 해에 첫 단편소설집을 출간하면서 캐나다 문학계를 뒤흔들게 된다. 크리틱들로부터 좋은 평이 쏟아졌고, 캐나다의 가장 높은 권위가 있는 'Governor General's Award'를 수상한다. 첫 소설집의 출간 시점에 첫 남편 제임스 먼로와 그녀는 독립서점인 'Munro's Books'를 열었다. 앨리스 먼로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Munro's Books는 계속 커졌고 세계 3위 독립서점에까지 뽑혔다고 한다.
나는 앨리스 먼로를 여성 서간문학가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단편소설을 그렇게 즐기지도 않고, 이름도 '앨리스'로 너무 여성스러운데다, 책 제목도 '디어 라이프'처럼 여성스러워서, 도무지 매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제 뉴요커의 엄청나게 긴 기사를 읽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녀만 쓸 수 있는 글이 있었다. 굉장히 잔혹한 사람만 쓸 수 있는 글이.
그녀는 제임스 먼로와 20년의 결혼생활을 마감한 후, 두 번째 남편 제럴드와 재혼을 한다. 처음 만난 점심 자리에서 세 잔의 마티니를 마시고 곧바로 동거를 이야기할 만큼 대화가 잘 통했다 (이런 빠른 진도도 이혼숙려캠프의 전형적인 패턴이다). 제럴드는 초혼이었다. 당시 앨리스는 이미 크게 성공한 작가였다. 제럴드는 유쾌하고 인기가 많은 타입이었고, 앨리스를 그렇게 사랑하지는 않지만 자기가 같이 살 수 있을 만한 여자가 앨리스밖에 없었기에 결혼했다고 말하고 다닌다(;;). 이런 식의 오만함을 앨리스는 용서한다.
제럴드가 집에 들어오면서 20대인 실라와 제니는 독립을 한다. 하지만 9세로 너무 어렸던 안드레아는 그 집에 계속 살게 된다. 안드레아는 세 남매 중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아주 영특해서 제럴드는 "안드레아는 우리 집에서 '아이'가 아니라 '사람'으로 받아들여졌다"라는 오묘한 말을 한다. 안드레아는 제럴드로부터 사랑을 받고 싶어 했고, 제럴드의 선을 넘는 농담도 '친구 사이의 비밀'로 이해하게 된다. 친구 사이의 비밀은, 제럴드가 자신의 성기를 일상적으로 노출하는 수준으로 발전하게 된다. 9세인 안드레아의 침대에 침입하기도 한다. (구체적인 디테일은... 독자를 위해 생략하겠다)
너무 어린 안드레아는 이 일을 좋게 봐야할지 나쁘게 봐야할지 모르는 채로, 자신의 step-brother (친부인 제임스와 함께 살고 있는 아들)에게 털어 놓는다. 다행히 제정신이었던 step-brother는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캐롤(제임스의 새 부인)에게 말하고, 캐롤은 제임스에게 말하지만, 제임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앨리스는 글을 쓸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무너지고 좌절하게 될 것이라며 캐롤에게 앨리스를 '추악한 진실로부터 보호'할 것을 명한다. 그들은 (1) 어린 안드레아의 증언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2) 앨리스는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다, (3) 제럴드와 안드레아를 최대한 격리한다면 제럴드가 제정신이 될 것이다와 같은 논리로 자신들을 위안한다.
안드레아는 step-brother에게 장난처럼 이야기했다가, 캐롤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1차 충격을 받은 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에 2차 충격을 받는다. 그 후 안드레아와 제럴드를 단둘이 놓지 않으려고 언니들이 이따금 동원되긴 하지만 (제임스는 앨리스에게 말할 용기는 없었지만 큰 두 딸에게 말할 용기는 있었다), 안드레아가 25세가 되어 자신의 상황을 냉철하게 볼 수 있게 되기까지, 그리고나서 앨리스에게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소상히 편지로 쓰기 전까지 침묵은 계속된다.
안드레아는 그 전에도 '제럴드와 나 사이엔 친구끼리의 비밀이 있어.'라면서 앨리스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만, 앨리스는 애써 듣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안드레아는 오랜 기간 '엄마가 혹시 알고 있는 것 아닐까'라는 의구심을 품었다고 한다. 안드레아가 앨리스에게 편지를 전달했다고 말했을 때, 제임스는 "잘했어.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정말 제임스가 친부가 맞는지, 흠씬 두들겨 패고 싶은 심정이었다.
앨리스의 성공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앨리스의 성공에 온 가족이 기대고 있어서인지 (첫째 딸은 엄마를 따라 작가가 되고 싶어했고, 제임스는 이혼 후에도 Munro's Books를 경영하며 먹고 살았다), 아니면 정말로 앨리스가 유리 멘탈의 소유자여서 였는지, 온 가족은 가장 약한 사람인 안드레아가 아니라 가장 강한 사람인 앨리스를 보호하기 바쁘다. 그리고 그 틈을 제럴드는 영악하게 이용한다.
안드레아의 편지를 읽은 앨리스는 Comox라는 외딴 곳으로 도망친다. 식구들이 예측한 대로 식음을 전폐하며 그 곳에서 한 동안 홀로 생활을 한다. 마치 이혼숙려캠프의 엄마처럼 "남편과 딸 사이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 괴롭다" "여성에게 이런 부담이 주어지는 것은 여성혐오적이다"는 이상한 논리를 편다. 안드레아는 자신이 엄마를 불행하게 한 것 같아 죄책감에 시달리며 자신도 그런 여성혐오적인 부담을 엄마에게 지우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해명한다. 결국 제럴드가 Comox에서 앨리스와 다시 살게 되면서 상황은 종료된다.
앨리스가 두고 갔던 안드레아의 편지를 읽은 제럴드는 아주 용감한 행동을 한다.
1) 편지를 미래 기록을 위해 아주 정확히 보존하겠다고 주변인들에게 선언하고,
2) 자신의 입장을 담은 commentary를 적어서 주변인들(제임스 등)에게 보낸다.
안드레아가 먼저 자신을 유혹했으며, 자기는 Lolita처럼 많은 문학작품에 나온 것처럼 안드레아에게 매력을 느꼈을 뿐이고, 이런 식으로 자신을 코너에 몰면 자기가 자살을 할 수도 있고, 자기는 결코 쉽게 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안드레아의 행실을 보여주는 그녀의 야한 사진을 대중에게 공개하겠다고 협박을 한 것이다.
나는 이 반응이 아주 식상하고 치가 떨렸다. 자신을 돌아볼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어린 아이를 앞세워 자신을 방어하려 하다니. 그 과정에서 그렇찮아도 멘탈이 약해져있을 아이를 정말로 죽일 수도 있는 선택을 하려 하다니. '설령' 이 남자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해도 (안드레아가 아주 행실이 나쁘게 태어나서 남자 어른을 유혹하는 버릇을 타고났다고 해도) 그것을 방패막이로 삼는 이 사람은 도대체 얼마나 치졸하고 비겁한가.
그리고 저런 식의 항변을 하는 인격을 가진 사람의 품에 다시 안기고 싶어하는, "자식과 남편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당하는 것이 괴롭다"고 우는 앨리스는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제럴드는 70세가 되어 30대 중반이 된 안드레아의 고소에 의해 재판을 받지만 실형을 살지 않고 가석방이 된다. 제럴드는 아주 좋은 변호사를 써서 배심원 재판도 피하고 대대적인 미디어 노출도 피하게 된다. 앨리스는 재판 결과가 유죄일 것을 예상했기에 '친구 집으로 이주하여 별거'할 준비를 모두 끝냈지만, 미디어가 재판 결과에 관심이 없는 것을 보고 계획을 철회한다. 제럴드와 앨리스의 결혼 생활은 happily ever after로, 제럴드가 2013년 사망할 때까지 이어진다.
앨리스 먼로에게 제럴드의 성폭행 이야기는 금기시되는 주제였지만, 앨리스의 치매 증상이 심해짐에 따라 "내가 어떻게 그런 괴물과 함께 살 수 있었지" 이런 식의 말을 이따금 했다고 한다. 그리고 앨리스는 2024년 세상을 떠난다.
뉴요커 기사는 아주 신랄하게 팩트를 보여주지만, 직접적인 판단은 최대한 독자의 몫으로 남겨둔다.
뉴요커 기사의 저자가 앨리스의 선택을 이해하는 한 가지 키는 그녀가 이 모든 내용을 소설의 소재로 썼다는 것이다. 그녀의 소설에는 성인 남자를 유혹하는 어린 여자아이의 내용이 나오고, 그런 어린 여자아이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성인 여자의 모습이 나오기도 하고, 남편의 무례한 처우를 끝까지 참는 부인이 나온다고 한다. 앨리스는 인터뷰를 할 때도 스스로 '페미니스트'라고 불리는 것을 불편해하면서 자신은 '여성'이라기보단 '관찰자(watcher)'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간의 상호작용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해서 때때로 자신의 주변 상황이 좀 극단적으로 치닫더라도 내버려두기도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로부터 직접 소재를 가져와서 인간의 바닥을 탐구한다면, 장편소설로 쓰기는 힘들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가 타인의 삶을 '관찰'했듯, 나도 그녀의 책을 통해 그녀의 삶을 '관찰'하고 싶어졌다. 그녀가 예술을 빌미로 자신과 자신의 딸들을 objectify했듯이 나도 그녀의 삶을 objectify하고 싶었다.
아무리 예술이 중요하다고 해도 어떻게 어린 딸이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범죄에 노출되는 것을 용인할 수 있을까? 아무리 노벨문학상이 값지더라도 이 고통의 무게를 정당화할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정말로 예술적 관찰이 필요해서였을까? 아니면 이혼숙려캠프의 용서하는 여자들처럼 사랑과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예술적 관찰'이라는 것은, 오히려 그녀가 유약하고 무책임한 자신에게 주는 면죄부가 아니었을까?
세상을 살아가려면,
자신과 자식을 지키려면,
'용서하지 않는 능력'이라는 것도 필요한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