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쯤의 일이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의 <반짝이는 태양>을 한글로 읽었었다. 아름다운 흑인 여자가 쓴 아프리카 사람들의 사랑 이야기. 민음사에서 '노벨 문학상을 받을지도 모르는 저자'라며 멋지게 홍보를 해서 기대를 많이 했었지만 문장이 산만해서 아주 더디게 읽었다. 욕조에 누워서 읽고, 다시 집어서 읽고 하다보니 책이 너덜너덜해졌다.
읽으면서 생각했다.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의 언어와 문화를 잘 아는 역자가 별로 없었겠지. 원문은 무척 좋은 글일텐데 이렇게 산만한 번역본으로 읽어서 아쉽다...
10년 전의 나는 두 가지 면에서 틀렸었다.
첫째, 아디치에는 원래 영어로 글을 쓰는, 미국인을 독자로 하는 작가였다.
둘째, 아디치에의 글이 원래 산만하다.
한국에서 책을 읽을 땐, 유발 하라리는 이스라엘에서 쓰는 언어로, 아디치에는 나이지리아에서 쓰는 언어로 글을 쓴 후 한글로 번역이 되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모두 영어로 글을 쓰는 작가였다. 한강 작가나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토머스 피케티처럼 온전히 비영어권에서 자라 모국어로만 글을 쓰다가 누군가에게 '발견'되듯 미국에 소개되어 히트를 치는 일은 드물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미국, 일본, 유럽, 아프리카, 중국, 중동 등 비한국인의 글을 열심히 번역하기에, 나는 미국 사람들의 '게으른 번역 문화'가 신기했었다.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는 나이지리아의 상류층 카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영어로 된 책만 읽다가 대학생 때 미국 코네티컷으로 이주해 대학을 다시 다니게 된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영어를 잘했고 미국 TV를 보며 자라다가, 십대 이후 아프리카의 문화를 '공부'하면서 천천히 모국에 대한 자긍심을 찾아간 케이스이다. 아디치에는 어린 시절 나이지리아에서 Grace라는 영어 이름을 쓰다가, 10대에 견진성사를 받으면서 Amanda로 이름을 바꾸고, 20대가 지나 Chimamanda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 번의 이름 변경은 두 개의 문화에 걸쳐 사는 아디치에의 정체성을 반영한다.
Grace는 그녀의 어머니의 이름과 같다. 저자가 나이지리아 출신 팟캐스트 진행자와 한 인터뷰를 보면, 그 진행자의 할머니도 Grace라고... 나이지리아에서는 본명을 영어 이름으로 쓰는 것이 오랫 동안 유행해온 것이다. 아디치에가 견진성사 때 Amanda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은 나이지리아 사람의 반이 Grace여서 였다고. 그러다 미국으로 대학을 와서 Amanda가 미국에서 얼마나 평범한지 다시 깨닫게 된다. 첫 번째 소설을 출간하기 직전, 문득 영어 이름이 아닌 Igbo 언어로 된 이름으로 데뷔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녀의 중간 이름은 Ngozi는 역시나 Igbo에서 너무 흔한 이름이라 패스... 그래서 고민고민하다가 여권상의 Amanda라는 이름에 Igbo스러운 힌트를 더해 Chimamanda라는 이름을 고안해냈다고.
그 팟캐스트 진행자는 "뭐야? 네가 개발했다고?? 내가 아는 치마만다만도 6명은 되는 것 같은데???" 라면서 충격을 받는다. 아디치에는 이민자로서의 정체성 혼란과 직결된, 내밀한 문제라인지 이름에 관한 이야기를 오랫 동안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의 책에도 "어릴 때는 영어 이름을 쓰는게 쿨한 줄 알았는데, 그게 부끄러운 것이란 걸 커서 깨달았지"라고 되뇌이는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지금은 아디치에의 신간인 <Dream Count>를 읽고 있다. 2020년대 문고판 섹스앤더시티처럼 느껴지는 책이다. 나이지리아 출신 Igbo 족의 똑똑한 부잣집 딸들이 워싱턴DC와 매릴랜드 지역에서 남편 찾기 프로젝트를 하는 이야기다. 친구들 간 조금씩의 차이는 있지만, 나이지리아의 전통적 카톨릭 가족관(서른되기 전에 결혼해야 한다, 여자는 집에서 아기를 보는 것이 행복한 거다)에 짓눌린 상태로 다양한 흑인 남자들을 만나면서(왠일인지 비흑인은 잘 만나지 않는다!) 아프리만 아메리칸(미국에서 오래 산 흑인들)과 특정 아프리카 나라에 명확한 뿌리를 가지고 있는 1세대 이민자 흑인들(영어에 악센트가 있고 직업이 좋은 경우가 많다, 비자를 받아야 하니까) 간의 미묘한 차이를 느낀다. 40대가 임박해서 조금 있으면 아이를 낳기 어려운 시기가 되고 마는데... 어떤 친구는 쿨하고 어떤 친구는 굉장히 절박해하지만, 이런 사회적 압력을 신경 쓴다는 점에서는 모두가 같다.
여자들이 좋아하는 주제이다보니 술술 읽히긴 하지만, 역시 완성도가 낮다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 작가의 개성인 것인지. 내가 에디터였다면 아마 책의 반 정도는 삭제하라고 줄을 쳤을 것 같은 글. 이렇게 rough한 상태로 세상에 글을 내어놓는 작가가 대단하고, 최선을 다해 읽으면서 작가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는 독자들이 많다(나를 포함)는 것도 신기하다. 내 마음 한 켠에서는 '나이지리아 작가' (미국 영주권자로 매릴랜드에 살고 있다), '아프리카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라는 식으로 identity literature의 수혜를 입은 작가가 아닐까라는 의심을 지우기가 힘들다.
하여튼, 그런 산만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녀의 identity literature를 좋아한다. 비 아프리카 사람이 이해할 만하게 아프리카 문화를 자연스럽고 깊이 있게 소개해주기 때문이다. 그녀의 책에는 종종 미용실에서 6시간 또는 8시간을 보내는 흑인 여성들이 등장한다. 그들이 비욘세의 비단 같은 머릿결을 얼마나 원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불가능한 목표인지. 자신의 코일 같은 머리에 어떻게 자긍심과 수치심을 동시에 느끼는지. 아프리칸 아메리칸과 아프리카의 국가에서 새롭게 이주해 온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로 뭉치게 되는지.
그녀의 책을 통해서만, 본국의 부유한 부모 밑에 자라서 경비원이 있는 맨하탄의 고층 아파트를 afford할 수 있는 흑인 싱글 여자가 미국인들로부터 어떤 시선을 받게 되는지 알 수 있다. 사실 미국 사람들만큼 대놓고 돈을 숭상하는 사람들도 없는데, 이런 여자분들은 때때로 미국 백인들로부터 아프리카의 '피로 물든 더러운 돈' (석유, 다이아몬드, 마약 등)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한국의 법에 대해 영어로 글을 쓰지 못했다. 한국의 어떤 점이 미국인들에게 신기하게 보일지 또는 당연하게 보일지 감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굉장히 재밌는 점이라고 생각해 소개해도, 미국인들은 '읭? 그게 무슨 소리야?' 하는 반응이여서 한참을 배경 설명을 해야 한다. 나는 아주 평범하고 무난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미국인들은 듣자마자 무릎을 치며 그것 참 insightful하다고 하기도 했다. 청자를 잘 모르다보니 소재를 소개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디치에의 그러한 감각에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아프리카를 잘 모르는 나같은 독자가 어떤 점을 신기해하고 재밌어할지, 그리고 어떤 부분에서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한지 속속들이 알고 있다.
내가 아디치에에게 경탄했던 순간 중 하나는 그녀가 '단일 서사의 위험성'이라는 주제로 한 TED 강연에서다. (보고 싶은 분은 Chimamanda Ngozi Adichie: The danger of a single story | TED Talk)
그녀는 이 강연에서 아프리카 문화가 전 세계의 주류 매체에서 단일한 서사로 취급받고 만다는 이야기를 했다. 미국 주류 사회의 사람들 (예를 들어, 맨하탄에 사는 교육받은 백인 남성) 은 전 세계에 매우 다양한 서사로 공유된다. 제프 베조스처럼 기회를 잘 보고 집요한 스타일. <How I Met Your Mother?>의 마셜처럼 부인에게 쩔쩔 매는 스타일. <Friends>의 로스처럼 착하고 똑똑하고 나사가 하나 빠진 것 같은 스타일.
반면, 아프리카의 다양한 나라와 문화들은 '아프리카'라는 말로 일축되고 아프리카 사람들이 어떠한지에 대해서도 이런 저런 고정관념이 쉽게 붙는다. 그녀는 '단일 서사'가 그 집단을 객체화(objectify)하는 출발점이라고 말했고, 나도 거기에 동의했다. 아마 우리나라도 이제서야 남북분단과 전쟁이라는 '단일 이미지'에서 벗어나 문학(노벨상을 탄 한강)과 비문학(퓰리처상을 탄 우일연)과 대중문화(bts, 데몬헌터스, k-드라마, k-뷰티) 등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을 터다.
그래도 종종 미국에서 백인 할머니, 할아버지를 만났을 때,
"오! 너 한국에서 왔구나. 내 아들도 인도네시아에서 아이를 입양했어."
같은 말을 종종 듣는다. "하하하, 그렇군요. 아기가 귀엽겠네요."라고 웃으면서 응수를 할 때, 나는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거리를 느낀다. 그에게는 인도네시아와 한국이 어찌저찌 유사하게 묶을 수 있는 동방의 나라들인 것이다. 그들의 의도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안다. 아마도 본인이 아시아 문화에 완전 문외한은 아님을, 본인이 그들을 배척하지 않는 오픈마인드 백인이라는 것을 어필하고 싶었을 터다. 다만, 한국에서 그 분을 만났을 때 내가 "오, 미국에서 오셨군요! 저에게도 폴란드 사람 형부가 있어요."라고 말한다면 그 사람이 아마도 지을 표정을 내가 짓고 있을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Asian을 single story로 치부하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곤 했다. 인종차별 분야에서 흔히 쓰이는 objectification, marginalization, alienation 같은 용어는 주류 문화의 사람들을 빌런화하는 경향이 있는데, '단일 서사'는 상대적으로 비난의 무게가 가벼워서 일상에서 부딪치는 사람들에게 적용하기 편한, 생각의 틀이 된 것이다. "일단 '서사'를 이해해주신 것은 감사합니다, 그래도 '단일'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세요, 저희에겐 여러가지의 모습이 있답니다."라고 정중하게 표현하는 것 같았다.
나의 배우자도 아디치에와 비슷한 삶의 시점에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잠시 다니다가 군대를 마친 후 미국의 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본국을 그리워하고, 본국이 '단일 서사'로 미국에서 다루어지는 것에 마음 아파하며, 본국의 아름다움과 다양함을 미국에서 전파하고 있는 아디치에와 달리, 그에게는 자신의 본국이 '단일 서사'로 다가온다. '한국의료 시스템이 좋은 줄 알았는데 엉망이네,' '한국 사람들은 역시 외모 지적을 많이 해,' '한국 사람들은 깜박이를 켜지 않고 과속을 하고 양보를 안해,' '한국은 도로시스템이 엉망이야' 등. 특정 개개인이나 지역의 특성도 그에게 '한국의' 좋은 점과 나쁜 점으로 치환되었다.
특정 나라가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언뜻 보기에 객관적인 사실의 서술 같지만, 사실 대체로 협소한 주관적 감각에 기인한 경우가 많다. 한 사람이 세 개 이상의 나라에 깊은 전문가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잠시 머무는 나라에는 그런 판단을 내리기가 쉽다. 인도는 거리가 지저분해 (Pune 시의 거리는 아주 깨끗했다), 일본 식당은 정이 없어 (오사카의 어느 식당에선 서비스를 많이 주었다), 스페인 식당은 정이 많아 (바르셀로나의 식당은 정이 없었다). 그런데 20년을 산 자신의 모국을 단일 서사화하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헬조선'을 이야기하는 세대처럼, '우리나라는 틀렸어' 하는 비관주의인 걸까.
<Dream Count>의 세 여자 캐릭터는 모두 미국에서의 삶을 좋아한다. Zikora는 워싱턴 DC에서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변호사다. DC 인구의 70%가 흑인이라고 하니, DC 법조계에도 흑인이 많을 것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똑똑한 흑인으로서의 이점과 나이지리아보다 좋은 의료시설과 아름다운 브런치 가게가 있는 DC를 만끽한다. Omelogor는 나이지리아의 성공한 뱅커여서 뻔질나게 미국에 여행을 오지만, 곧 '음란물이 청소년 성교육에 미친 부정적 영향'에 대한 연구를 하러 미국 대학원에 온다. 셋 중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Chia는 미국에 살든 어디 살든 직업이 없이도 충분히 자금을 대줄 수 있는 부모님이 있어서, 여행 작가로 살면서 전 세계를 마음대로 돌아다닌다.
그래도 그 세 사람은 자기의 방식대로 나이지리아를 그리워한다. 카톨릭 문화를, 남자들의 책임감을, 여러 명의 자식을 낳아 친척들과 함께 기르는 삶을. 백인 보다 흑인을, 흑인 중에서도 비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기왕이면 나이지리아 출신의 Igbo 사람을 배우자로 선호한다. 세 사람은 (서로 아무리 싸워도) 먼 미국땅에서 새로 사귄 친구들보다 끈끈하게 결속된다. 미국 사람이 '나이지리아는 xx해'라고 말하면 '네가 뭘 알아?'라고 쏘아붙일 준비가 되어 있다.
나의 배우자도 한국인과 결혼한 것을 보면, 한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편안함은 있는걸까. 그가 싫어하는 것은 사실 한국이 아니라 나의 '한국 향수병'인걸까. 단일 서사화하는 사람은 오히려 나인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