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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리그 아이들의 공통점

by 벨뷰의 정원



나는 매일 천재들을 만난다.


프린스턴, 예일, 하버드, 스탠포드 등. 내로라하는 대학의 어린 친구들로부터 이메일을 받고 그들의 경력 상담을 해주기 때문이다.




어릴 때도 '머리 좋다'는 말에 의구심을 품던 나였다. 단번에 내용을 이해하고 까먹지 않으면 머리가 좋다는 말을 듣는 듯했는데, 과연 그런 순발력과 암기력이 '머리 좋음'의 가장 좋은 척도인지 의아했다.


학창 시절 머리가 좋다는 말을 듣던 친구들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노력도 함께 했고, 결국 시험을 잘봐 머리 좋음을 입증해냈다.


이런 선순환 구조도 의아했다. 반 아이들 중 무작위로 10%를 추출해 '머리 좋은 아이' 딱지를 붙인 후 1년이 지나 검증을 해보면 그 딱지를 붙인 아이들이 더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세계 최고의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은 과연 머리가 좋을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도찐개찐이다.


어떤 아이로부터도 "와! 이 아이는 정말 천재가 틀림 없어!! 어쩜 이런 통찰력이!!! 어쩌면 저렇게 완전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을까!!"라고 느끼는 순간은 없었다.


사실 완전한 기억력이란 건 내가 있는 업계에선 크게 자랑거리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기억력이 좋아도 관련 분야의 모든 논문을 기억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다시 찾고 또 찾아야 한다.


통찰력이 좋은 것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좋아도 그 통찰을 논문으로 전환시키려면 데이터와 싸우는 '엉덩이력'을 갖추어야 한다. 글쎄, 칸트나 비트겐슈타인처럼 젊은 시절에 짧은 글을 일갈하듯 쓰는 문화가 된다면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요즘의 학계는 젊어서는 기꺼이 노가다를, 늙어서는 비트겐슈타인 같은 글을 쓰는 분위기이기에 노가다를 피할 수 있는 천재는, 적어도 내 분야에서는 많지 않다. 우리나라 출신의 최예진 교수님과 한혜리 교수님이 수상하신 "맥아더 천재 상"도 어느 정도 연구업적이 쌓인 자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노가다와 통찰이 잘 어우러진 분들이란 뜻이다.




내가 만나는 학생들이 공통적으로 갖춘 것을 떠올려보면,

'현재 하는 일에 대한 우직함'이다.

이들은 자신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안정적인 가정환경여러 차례 쌓인 '성공의 경험'으로 인해 자기가 택한 길이 아마도 자기에게 잘 맞을 것이라는, 실패해도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묘한 기대감이 있다. 물론 그들도 똑같이 불안해한다. 경쟁에서 뒤쳐질지 모른다는 괴로움, 자기가 모든 것을 건 분야가 몇 년 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겪는다. 그래도 현재 하는 일에 대해서는 어떤 우직함을 갖고 밀고 나간다.


나에게까지 다다른 학생들 중에서는 '연구가 하기 싫은데 꼭 해야 하나요' 같은 류의 근본적 의문을 가진 친구들은 없었다. 최소한 '저는 연구자가 잘 맞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당신과 함께 연구를 하면서 경험해보고 싶습니다' 정도의 commitment를 갖추고 있으며, 어린 나이에도 프로페셔널하다. MZ세대는 물론 그 이후 세대의 아이들도 이런 우직함을 갖고 있다. 그래서 난 그들을 신뢰하고 함께 일한다.


나는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안정감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랐고. 어떤 분야에서 나를 '받아줄지' 몰랐으며, 설령 누가 날 받아준다 하더라도 그가 요구하는 기대치를 내가 충족시킬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사시나무 떨듯 얕은 바람에도 온 몸을 흔들며 커리어를 밟아왔다.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한다.


"자식 교육 어떻게 시키실 건가요?"


우리 아이가 18세가 되었을 때, 내가 만나는 아이들이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안정감을 가질 수 있을까?

모르겠다. 좋아하는 분야를 금세 찾는다면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확률이 높다.


나를 닮았다면 사시나무처럼 떠는 삶을 살테고 남편을 닮았다면 나보다는 우직한 삶을 살 테다.

스탠포드 로스쿨, 하버드 의대와 같은 결론을 내가 정해줄 수도 없고 정한다고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 내가 오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아이에게 꼭 가르치고 싶은 능력이 있다면 (1) 고요히 앉아서 책을 읽는 능력, (2) 멍을 때리는 능력, (3) 사람에게 관대할 수 있는 능력이다. (2)는 어느 정도 타고 나야 하는 것이고. (1)은 아마도 내가 책 읽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고 아이가 읽는 책에 관심을 갖는다면 습득이 될 수도, 습득이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3)은 아이가 나에게 자문을 구할 때까지는 도와줄 수 있겠지만, 나를 믿음직한 상담자로 여기지 않을 경우 도움을 줄 기회가 없을 것이다. 함께 여행을 하면서 여러 종류의 가치와 인간군상을 보여주면 조금은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결국 내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1) 책 읽는 것 보여주기, (2) (아이가 원할 때) 대화, (3) 함께 여행하기 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실 이 세 가지를 다 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것이 '시간'을 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3-40대는 바쁘다. 노후 대비 안되신 부모님 챙기랴, 자기 노후대비하랴, 아이의 미래를 위한 저축을 하랴, 돈 쓸 곳은 많고 시간은 없다. 유유히 책을 읽을 시간도, 아이와 여행하고 시간을 보낼 짬도 없는 가정이 대부분일 것이다 (나도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나에게 "우리 아이, 아이비리그 보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인공지능 시대에 잘 나가는 인재로 키우려면 어떻게 하죠?" "박사님은 자식 교육 어떻게 시키실 거에요?"와 같은 질문을 하면 해줄 수 있는 "처방"이 이것 뿐이다.






Q. 우리 아이 영어유치원에 보내야 할까요?

A. 부모가 행복한 쪽으로 하세요. 영어 유치원 보내서 숙제를 다 한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면 보내시고, 경제적으로 부담되어서 마음이 불편하다면 보내지 마세요. 부모의 행복이 가장 중요합니다.


내가 보기에도 참 도움 안되는 답변이다. 그렇지만 어쩌겠는가.

아이비리그 학생들을 보면 볼수록, 나는 부모가 자식의 행복이나 인성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지만, '공부 좋아하는 성향'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내가 만난 아이들 중 극빈층 출신 아이들은 드물었다. 그렇지만 부모가 꼭 가방끈이 길다거나 자식과의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부모가 공부하기 좋은 환경에 적극적으로 기여하지 않아도 잘 자라는 아이들이 많았다. 그 아이들이 왜 잘 자랐는지는 잘 모르겠다. 태어날 때부터 호기심이 많고 끈기와 책임감이 좋았던 것인지, 좋은 은사님을 만났는지, 적절할 때 좋은 책을 읽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그렇게 자랐다.


아이는 결국 좋아하는 것을 하게 되어 있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등 떠밀어서 강제로 보낸다해도 튕겨 나가게 된다. 특히 내가 있는 분야(인공지능 윤리)에서는 이 분야를 좋아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 경쟁을 참아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인공지능 시대에 공부를 좋아하는 것이 반드시 좋다고 볼 수 만도 없다. 공부를 좋아하는 것의 장점은 아마도 충동적인 성향이 줄어들어서 큰 범죄를 일으킬 위험이 줄어든다...는 것 정도가 있을런지 모르지만, 자살률은 더 높을지도 모르고, 사실 돈을 잘 벌기 위해서는 공부보다 더 좋은 길이 훨씬 많다. 우리 남편도 공부는 그렇게 잘하지 못한 것 같지만, 나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고 돈도 잘 번다.


맹모삼천지교의 효과성이 가장 높던 시절은 과거시험 한 방으로 미래가 결정되던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요즘처럼 평생에 걸쳐 공부를 하고 새로운 경쟁을 맞닥뜨려야 하는 시대에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가, 실패해도 감당할 이유와 용기가 있는가를 끝없이 고민하는 힘이 더 중요하다. 부모는 조용히 박수치고 응원하는 역할밖에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 아이가 살아갈 미래는 내가 아무리 고민해봐야 다 알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 문제를 이렇게 고민한 것은,

나 또한 어린 시절 "더 이상 공부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한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공부할 이유를 찾을 수 없다."고 했었고, 엄마는 '선택지가 넓어진다' 등 막연한 주장을 반복하다가 결국 "내가 지금 너에게 이유를 설명해 설득시킬 수는 없겠지만, 너도 이 답답함을 네 아이를 키워보면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내 아이가 똑같은 말을 내게 했을 때 내가 무슨 말을 할지를 오랜 시간 고민해왔다. 그리고 훌륭한 아이들을 만나면 만날 수록 더욱 더 답할 말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네가 이번 해에 약속한 것은 다 마쳐야지. 그래야 책임감 있는 사람이니까. 만약 내년부터 공부가 필요치 않은 새로운 길을 가고 싶다면, 그건 엄마도 응원해. 어떤 길이 있는지 함께 생각해보고 싶다면, 엄마도 최대한 도움이 되려고 노력할게."


정도의 말밖에 못할 것 같다.


어쩌면 이래서 서울대 나온 아빠들을 학원 상담에서 배제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여하튼 나는 우리 아이의 미래가 기대가 된다.

기후변화를 생각하면, 아이가 얼마나 좋은 미래에 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재활용 뿐이니. 재활용이나 열심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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