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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May 27. 2023

합격수기에 못 다했던 이야기

10년 만에 다시 읽는 5급 공채 합격수기

"예술학과 학생이 행정고시를 한다고? 왜?"


2012년 '고시계'에 제출한 합격수기는 이 첫 문장으로 시작하였다. 고시계에서 합격 성적이 높지 않았던 내게 연락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에 처음 통화할 때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당시 담당자 분께서는 '홍대신문'을 통해 내 합격 사실을 아셨다고 하시면서, 미대생이 합격한 일이니 워낙 드문 일이니 글을 실어 달라고 부탁하셨다.


후일 공직에서 피아노, 무용 등 나보다 훨씬 예체능스러운 예체능 전공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나는 그다지 특이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지만, 합격 후 10년이 된 지금까지도 "왜 미대생이 행시를 봤냐"는 질문을 받는 것을 보면 내가 신기한 존재이긴 한가 보다. 같은 이야기를 100번 쯤 반복하다보니 상대방의 관심 정도에 따라 간략버전, 풀 버전, 코미디 버전 등으로 과거의 이야기를 구사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2012년의 나는 다음과 같이 시험도전 의도를 털어놓고 있다.

 


저는 2학년 겨울방학 때 갤러리에서 인턴 큐레이터로 근무해본 이후에, 공익적인 차원에서 예술을 중흥하는 데 기여하는 일을 한다 면 삶이 참 보람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술관 정책을 짜거나 문화재 환수 정책을 담당한다고 상상할 때에는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습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면 학위가 없다 해도(갤러리에 서 같이 일했던 분들은 대부분 석사 이상 학위를 소지하였습니다) 문화정책의 결정과정에 직접 참여할 자격이 주어진 다는 것도 커다란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 정인영, 꿈과 믿음, 그리고 실천, 고시계 2012년 3월호, 303면.



언뜻 단정해보이는 문장 뒤에는, 미처 꺼내지 못한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다. 2008년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나는 여느 때처럼 책을 읽고 패밀리 레스토랑 또는 과외 알바를 하며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나보다 현실감각이 있던 그 당시 남자친구는, 네가 장차 일해야 하는 미술업계에서 일을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떤지 제안을 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어머니는 반색을 하시며, 혹시 급여가 알바보다 흡족하지 않다면 매 달 용돈으로 30만원 정도는 보태줄 의향이 있노라고 하셨다.


예술학과 학생은 학부를 졸업하면 대학원에 진학한 후 미술관의 학예사가 되거나, 갤러리에서 전시기획을 하거나, 옥션에 들어가거나, 운좋게 학계에 진출한다. 또는 기자가 되거나, 출판사에서 일하거나 또는 전혀 관련 없는 분야로 취업을 할 수도 있다. 이 중 갤러리의 문호가 가장 넓을 것이라고 판단한 나는, 한국화랑협회 선정 1위 갤러리부터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고 꽤 머지 않아 어느 한 군데에서 무급도 괜찮다면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계약서도 쓰지 않은 채 아침 8시 반 출근, 저녁 7시 퇴근의 삶이 시작되었다.


출근해보니 학부생 인턴은 나 뿐이었다. 다른 인턴들은 대부분 석사급 학위 소지자였지만 감사하게도 '인턴 큐레이터'라는 명함을 만들어주셨다. 학사 이상 학위 소지자는 6개월 간 월급 50만원을 받으며 인턴으로 일한 후('일용직 계약서'라는 것을 썼다고 한다), 정직원으로 채용될 경우 120만 원 정도 월급이 지급되는 구조였다. 당연히 교통비, 식비 아무것도 지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이너스 생활이었다. 비싼 한남동 골목 깊숙한 곳의 가정집 같아 보이는 식당에서는 매일매일 바뀌는 한식 메뉴를 5천 원에, 만두국을 6천 원에 판매했다.  


인턴 큐레이터로서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페인트칠과 박스 포장이었다. 갤러리의 하얀 벽을 보면서 '어쩜 이렇게 하얗지'라며 신기해한 적이 있으신지. 그건 매번 전시마다 새로 칠하기 때문이다. 못박힌 구멍을 매우고 그 위에 페인트를 칠하면 감쪽 같다. 내가 다니던 갤러리는 작품 판매보다는 렌탈로 현금수입을 올리는 중이었다. 전시가 바뀔 때마다, 또는 렌탈 고객업체(주로 강남의 고급 프라이빗 뱅킹 센터 같은 곳이다)의 주문이 있을 때마다 작품을 싸고 뜯고 배송을 하였다. 갤러리에서는 세련된 화장과 검은 정장, 구두 착용이 의무였는데 그런 복장을 하고 100호 짜리 작품이나 대리석 조각을 걸고 내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백남준 같은 유명 작가의 작품을 조립하는 일도 인턴들 몫이었다. 작품을 갤러리에 대여해 준 재단에서는 반드시 테크니션에게 맡기라고 하였다지만, 갤러리에는 그런 사람을 고용할 돈이 없다고 했다. 70년대 Sony TV와 비디오 기기에 연결된 수백 개의 선을 꽂으면서 손을 덜덜 떨었다. 팀장님은 혹시라도 고장을 내면 작품 소유주측으로부터 엄청난 배상요구가 있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내가 그 모든 손해를 부담하게 될까 전전긍긍하며 원래 고장난 TV였더라도 내 잘못이 되는 걸까 전전긍긍했다.


본디 큐레이터는 작품이 담고 있는 스토리를 어떻게 관객에게 흥미롭게 전달할 지 연구하고, 책자를 만들고, 전시를 홍보하는 등의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갤러리 내에 팀장님 딱 한 분인 것 같았고, 해외 유명 작가의 전시를 제외하면 보통 작가들이 보내주는 내용 그대로 인쇄를 하였다. 전시를 하고 싶어 하는 젊은 작가들은 넘쳐났다. 그들은 팔리지 않은 작품을 놓아둘 창고가 없었기 때문에, 전시 종료 후 작품 보관이나 렌탈과 관련된 계약서에 흔쾌히 서명을 하였다. 갤러리의 높은 사람들은 소수의 고위층 고객과 '미팅'을 한다고 사무실을 비우는 경우가 잦았다.


선배들은 나에게 '한 살이라도 젊을 때 이 바닥을 뜨라'고 하였다. 그리고 2월의 어느 날, 나는 불현듯 해고 통보를 받았다. 고려대 법대를 나와서 불문학 석사를 받은 사람이 인턴으로 일하고 싶어하니 당장 다음 주에 책상을 내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고학력자가 내 후임이 된다는 것에 신기해 했고, 선배들은 어떻게 너를 그렇게 부려먹고도 박카스 한 박스도 안들려 보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정작 내가 정말 '이 바닥을 떠야겠다'고 생각했던 때는, 내가 참 좋아했던 선배가 고급 레스토랑에서 2만 원짜리 버거에 8천 원짜리 오렌지주스까지 시켜주던 날이었다. 선배 월급은 분명히 50만 원인데, 어떻게 내게 2만 8천 원을 쓸 수 있을까? 그러고보니 어떻게 저렇게 완벽한 정장에 완벽한 머리를 하고 매일 출근을 할까? 그 때 깨달았다. 나는 그들과 '출신성분'이 다르다는 것을. 내가 운좋게 정직원이 되어 120만원을 버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나는 후배들에게 기껏해야 떡볶이를 사줄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남자친구와 어머니의 바람대로 나는 미술업계에서의 내 미래를 직시하게 되었다. 갤러리나 미술관이나 옥션에 근무하려면 최소한 석사가, 특히 해외 석사가 있으면 좋다는 것이 지인들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래서 유학을 알아보았으나, 도저히 미대 대학원 등록금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설령 어떻게 어떻게 빚을 내서 공부를 하더라도 뜻한 대로 직업을 구할 수 있을지 불투명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너무 위축되었거나 용기가 없었던 것도 같지만, 20대 초중반의 내 시야에는 캄캄한 대해만 놓여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는 불확실한 미래에 베팅을 할 여유도, '이 일이 아니면 안된다'는 열정도 없었다.


그래서 원칙을 정했다. (1) 4대 보험 가입이 되고 (2) 학사 학위만으로 할 수 있는 (3) 데스크잡을 찾아보자 (꽤 긴 알바 경험을 통해 육체노동을 평생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술관 계약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여기 저기 수소문을 하다가, 우연히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박사출신 연구관으로 근무하던 선배로부터 "그냥 공무원 시험을 보지 그래? 그게 더 쉬울걸..."이란 말을 듣고, 시험 삼아 2009년 '행정법총론'과 '미시경제학' 수업을 듣게 되었다.


어떤 종류든 경쟁이 치열한 시험에 도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미국의 변호사 시험(bar exam)은 한국과 같은 5회 제한도 없고 절대평가인 데다가 통상 합격률이 50%를 상회하므로 훨씬 덜 치열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미국 내에서는 그조차 학생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야기하고 시험성적이 업무능력의 척도가 되지도 못한다면서 변호사 시험을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도 많다.


2009년의 나에게도 행시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일단 나이가 많았다. 이과 공부를 하다 대학에 낙방하며 3수를 해서 동기들보다 두 살이 많았다. 이미 3학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결정적으로 그간 미술사와 철학 공부만 했지, 수험 과목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었다.


당시 '행정법총론'을 가르치셨던 송시강 교수님을 복도에서 맞닥뜨렸을 때 '왜 미대생이 이 수업을 듣는지' 질문을 하셨는데, 나도 모르게 공무원시험을 생각하고 있다는 의향을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미대생이 넓은 안목으로 커리어를 생각하는 것을 칭찬하시면서 '꾸준히 공부한다면 무조건 합격할 것'이라고 자신하셨다. '기본적인 법학 용어도 잘 모르는 수준이다.'라고 하였더니 모르는 내용마다 포스트잇을 붙여서 매 수업이 끝날 때마다 찾아와 질문을 하라고 하셨다. 조교님에게 질문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했던 미대생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했던 친절함이었다.


선생님께서는 행정고시 1차 시험인 PSAT 유형만 잘 맞다면, 단답형인 7, 9급 시험보다 서술형인 5급 시험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딱 두 가지 원칙을 주문하셨는데, '휴학을 하지 것'과 '1시간에 10페이지 씩, 하루 10시간 100페이지를 것'이었다. 그 후 1휴학을 하긴 했지대체로는 원칙을 꾸준히 지켰다. 2년 간 여러 번 눈물을 흘리고 만성 근막염으로 글씨를 더 쓸 수 없을 때까지 공부를 한 후에 최종합격을 하였다.


행정고시를 준비하기로 한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결정이었다. 소수점 둘째 차이로 붙었기 때문에 글씨를 조금만 더 못썼어도 시험에서 떨어졌으리라 생각하지만, 떨어졌다 하더라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행정고시를 하게 되면서 세상이 넓다는 것, 모든 잡마켓이 캄캄하지는 않다는 것, 세상에는 유능하면서도 친절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송 교수님을 따라서 행정법이론실무학회에 가본 후 그 유쾌한 문화에 끌려서 대학원에 지원하기로 했다. 나는 장학금을 주겠다는 모교에 지원하고 싶었지만, 송 교수님은 부득불 서울대 대학원을 고집하셨다. "명문대를 나온 사람들이 너보다 특별한 사람들이라는 환상을 지울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게 나는 2012년 졸업과 함께 서울대 대학원에 행정법 전공으로 입학하며 연수원에 입소했고, 글쓰기의 고통에 신음하다 2018년에야 법학 석사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미국에서 법학 박사과정까지 밟게 되었지만, 내가 과연 법학에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법학은 300개의 각주를 초연하게 준비할 수 있는 성실함, 여러 사례를 관통하는 핵심원리를 들여다보는 통찰력, 이 통찰을 한두 번 비틀어보는 창의력까지 요하는 학문이다. 나는 그 중 어느 것에도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다'는 이유로 법학을 하기로 한 것이 과연 잘한 것인지에는 자신 있게 답할 수가 없다. 더군다나 영어로 법학을 공부하는 요즘에는, 역시 언어가 아니라 '수학'을 많이 쓰는 학문(예를 들면, 계량경제학이나 통계학)을 택하는 것이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시간을 되돌려 내가 그토록 행정법에 끌렸던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행정법 사람들' 사이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내 자신이 '(1) 젊은, (2) 미대 출신, (3) 여성'이라는 것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토론을 할 때는 교과서를 쓰신 원로교수님 만큼이나, 미대 출신 신출내기인 이야기도 존중되었다. 왜 이렇게 옷을 신경쓰고/안쓰고 왔는지, 사귀는 남자친구는 없는지, 시집을 언제갈 것인지 등을 아무도 묻지 않았다.


서른 살 즈음에 갑작스레 치아교정을 결심하고는, 삐까뻔쩍한 교정기를 끼고 세미나에 등장한 적이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교정기에 대한 발언을 하지 않아서(최소한 "원래 교정을 했었나?" 정도의 질문을 기대했다) "왜 교정기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는지" 물으니 자리에 계시던 분들은 "보인다고 다 말해도 되는 건 아니지. 듣는 사람이 민망할 수도 있잖아."라고 대답하셨다. 또 한 번은, 누군가 술을 잘마시는 편이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을 하면서 내심 "홍대에서 클럽을 많이 다녔겠구나." 또는 "미대생들은 술을 잘 마시더라." 등의 반응을 기대했으나, "행정법 사람 답네!"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 때 깨달았다. 마이노리티에게 자유는, 내가 마이노리티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아도 될 때 찾아온다는 것을. 나는 내 자신이 '외모,' '나이,' '성별' 등으로 규정되지 않은 채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는, 어찌보면 당연한 사실에 큰충격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아르바이트, 인턴은 물론, 친구와 친척을 만나는 사적인 자리에서 나는 '여성' 또는 '젊은 여성,' 젊은 미대 출신 여성'이라는 집단의 일원으로 규정되었다. 나의 정체성은 개방된 정보로 간주되었고 사람들이 서슴없이 난처한 질문이나 코멘트를 던졌다. 그리고 나는 모난 돌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듯 미소로 대응하려고 노력했다.  



공직에서 젊은 미대 출신 여성의 삶은?


내가 경험한 공무원의 삶은, 크게 (1) 글을 쓰는 일과 (2) 사람을 다루는 일로 나뉜다. 글에는 수백 개의 셀이 있는 예산시트, 이 돈이 왜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예산설명서, 이 규제를 신설할 경우의 비용보다 편익이 크리라는 것을 입증하는 비용편익분석서, 법률제개정문, 장관님이 행사에 참석하실 때의 말씀자료, 새로운 정책을 설명하는 보도자료 등이 포함된다. 이 글들에는 대개 일정한 양식과 모범답안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어서, 간략하면서도 내실 있는 글을 쓰는 '보고서의 신'들이 어느 부처에나 존재한다. 장관님 말씀자료를 쓸 때는 행사의 성격에 맞게 (1) 청자들이 듣고 싶어하는 말, (2) 부처에서 전달해야 할 말, (3) 사람 또는 기자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훅(hook, 보통은 사자성어나 유명인의 말을 활용한다)이 있어야 한다.


사람을 다루는 일에는 각급 회의, 보고, 위원회 운영, 민원인 상담, 상급자 수행 등 컴퓨터 앞에서 벌어지지 않는 모든 일이 포함된다. 민원인과 수 시간 통화를 해야할 때도 있고, 국회의원 보좌진에게 날선 비판을 들어야 할 때도 있으며, 내년도 업무계획에 신박한 꼭지가 없어서 고민하는 회의에서 땅만 보고 있기도, 여기저기서 모신 저명한 인사들로 구성된 위원회를 끌고 가야 할 때도 있다. 장관님이 주재하는 행사도 어떤 장소에서 어떤 순서로 어떻게 진행할지 모두 일단 사무관이 결정해서 상급자의 결재를 받아야 하고, 행사 현장에서도 스텝이 꼬이지 않도록 장소 안내, 동선 확인, 기자 응대, 말 안하고 빠진 사람 자리 매우기 등 꼼꼼함과 순발력을 발휘해야 한다.

 

전자와 후자 모두 시간과 공을 들여야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잘 쓴 보고서들을 참고하고, 내가 쓴 글을 수없이 퇴고하고, 사람 간에 예상치 못하게 오해가 생기는 일들을 맞닥뜨리고, 실수를 하고 괴로워하면서 다음에는 어떻게 좀 더 부드럽게 해결할지를 고민하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젊은 미대 출신 여성'이라는 라벨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오래, 더 치열하게 일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많은 법을 개정하고, 문화예술 분야에선 꽤 많은 예산인 1,000억 원 대의 예산을 증액하기도 했다. 웹툰 작가가 되길 꿈꾸는 장애인을 위해 사회복지시설 내 교육시설 설립을 지원하였고, 지방자치단체와 손잡고 지역 예술가를 위한 창작공간을 각지에 조성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대형 실감 콘텐츠 체험관을 만들기도, 만화영상진흥원, 국립중앙도서관과 함께 웹툰 아카이브를 구축하는 일도 하였다. 방송통신위원회에서 근무할 때는 모르는 기술용어를 공부해가면서 EBS2 채널 실험방송 허가를 발급하였고, 뉴스프로그램에서 금전을 지급 받고 특정 업체에 대해 우호적인 보도를 한 것에 대해 법령의 공백을 매우기 위한 법리를 '개발'해 제재처분을 하기도 했다.


'미대 출신'인 것은 장단점이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업무 특성상 문화예술인을 많이 만나게 되는데, 내가 예체능계 출신인 것을 알면 대화가 부드러워지곤 했다. 문, 이과, 예체능을 다 경험해본 내게 자녀 진로상담을 하는 분들도 종종 계셨다. 한편, '미대 출신'이 얼마나 일을 잘할지 성격이 너무 직선적이지는 않을지 의구심을 표하는 분들도 계셨다.


'젊은 여성'인 것은 단점이 많았던 것 같다. 연수원에서는 '여자 사무관은 선 시장에서 헐값이지만, 남자 사무관은 잘 쳐주는 사윗감'이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들었다. 어떤 과장님께서는 "네 보고서가 잘 읽히는지 엄마에게 가서 물어봐."라고 하셨다. 그리고 내가 정말 엄마에게 물어봤는지 재차 확인을 하셨고, "엄마에게 여쭤봤더니 이해된다고 하시더라."라고 말씀드렸더니 "당돌한 여자 사무관"이라고 온 부서에 소문이 났다. 몇몇 국과장님들은 "여자 사무관을 울리는 것이 특기"라는 말씀을 하시곤 했다. 직장에서 또는 회식 자리에서 한 달에 두어 번은 언제 결혼할지 질문을 들었고, 즐겁게 술잔을 돌리면서도 누군가 "꼬리친다."는 식의 평가를 할까봐 두려웠다. 일을 하면서 젊은 여성을 하대하는 민원인과 이해관계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만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직종의 젊은 여성에 비해 내가 겪은 괴로움은 경미한 수준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사회는 척박한 환경에서 더욱 소수자에게 박해지는 듯하다. 안타깝게도 20대 초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서빙을 할 때 나는 젊은 여성으로서 업신여김을 당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었다. 이는 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로스쿨에서는 내 영어실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내 실력까지 부족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만나지 못했지만, 길가와 상점에서는 내가 '영어를 못하는 아시안'이라는 것을, 그리고 '물리적 폭력에 대항하지 못하는 여성'이라는 것을 되새기는 계기들이 숱하게 있었다.


아마 감정노동이 수반되는 업무에 종사하시는 모든 분들, 장애인, 성소수자, 소수 인종 등 조금이라도 주류에서 빗겨나 있는 사람들은 세상의 척박함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나름대로의 지혜를 계발해왔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보면 해초를 뭉텅이로 씹은듯 마음이 텁텁해진다.



꿈과 믿음, 그리고 실천 Revisited


얼마 전 차기 미국물리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신 김영기 박사님을 뵌 적이 있다. 박사님께서는 이휘소 박사님의 첫 제자인 강주상 교수님으로부터 입자물리학을 배우셨고, 미국 로체스터대에서 실험물리학으로 박사를 받으셨다. 이휘소 박사님께서 이론물리학부장을 맡으셨던 페르미연구소 부소장을 역임하셨고 현재는 시카고대 교수를 하시며 세계 3대 가속기를 활용한 입자실험을 하고 계신다. 쿼크나 전자 같은 초정밀 입자를 보신다고 한다.



팬입니다 박사님!


그 분이 86년에 유학을 오셨으니 거의 60세가 되셨을텐데 좋은 피부와 아담한 체구 때문인지 여전히 대학원생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세계적인 회의에 갈 때 호텔 직원으로부터 "여기 오시면 안됩니다." 대우를 받는 것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고. 이제는 그런 대우를 받는 것이 익숙하고, 재밌기까지 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분의 여성적인 친화력과 객관적인 과학적 성취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어 그 분에게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시아인이든 비아시아인이든 존경을 표할 수밖에 없는 아우라가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눈앞만 보고 살았는데, 이렇게 살아졌노라- 말씀을 하시는 여유와 자유가 부러웠다.



독일의 사상가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이렇게 말한다.

'남녀가 공용하는 또 한가지 매력 전술은 유쾌한 태도와 흥미 있는 대화술을 익히고 유능하고 겸손하고 둥글둥글하게 처신하는 것이다. 사랑스러워지는 여러 가지 방법은 성공하기 위해, 곧 '벗을 얻고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갖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방법과 같다. 사실상, 우리 문화권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경우, 그 의미는 본질적으로는 인기와 성적 매력이 뒤섞여 있다는 것이다. (p.  14 문예 출판사, 황문수 옮김, 2009)



이 말은 누구에게나 그의 정체성은 사람들에 대한 영향력을 형성하는 데에 중요한 지표가 된다는 것으로 읽힌다. 나의 젊음은 곧 사라지겠으나 아시안이자 여성인 나의 정체성은 영원히 나를 따라다닐 것이다. 가끔은 사무치도록 싫은 이 정체성과 화해하게 될 날이 과연 올까. 매일매일 주어진 과제를 조금씩 실천하며 살다보면 언젠가 김영기 교수님처럼 정체성과 행복하게 공존하는 날이 오리라 꿈과 믿음을 되새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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