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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May 27. 2023

록산 게이(Roxane Gay)와 스즈메

버림 받은 여자 아이를 구원할 수 있는 자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느 날과 같이 연구에서 잠시 벗어나, ChatGPT와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놀던 오후였다. 

챗GPT가 Roxane Gay라는 이름을 뱉었다. 

GPT의 서술에 따르면, 미국 내에서 응고지 아다치에와 비슷한 무게감을 갖는 미국 여류 작가인 듯 한데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굴까. 

동네 도서관에서 <Difficult Women>과 <Hunger>를 빌렸다. 


Roxane Gay, <Difficult Women>


<Difficult Women>은 수기(memoir)인 줄 알고 읽었는데 한참을 읽다보니 소설이었다. 

너무 가슴 아프게 슬픈 이야기라, 이게 정말 작가가 겪은 일이란 말인가 싶어 다시 머리말을 들춰보았다. 


이 책의 주인공은 언니와 형부를 따라다닌다. 언니는 19살에 15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했다. 

형부의 유일한 장점은 머리 숱이 많다는 것. 

형부는 돈 벌 생각이 없고, 종종 주인공에게 징그러운 눈빛을 보낸다. 

언니는 형부와 만났다 헤어졌다 하는데, 언니의 결정이 무엇이 되었든 주인공은 언니를 따라다니며 언니의 옆 방에 산다. 


이쯤 되면 의문이 든다. 

동생은 직업이 없나? 

왜 언니는 형부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나? 

형부가 돈을 안 벌어도 언니와 형부는 괜찮나?

동생은 왜 언니에게 형부의 눈길에 대해 말하지 않는걸까? 

 
그리고 갑작스레 장면은 충격적인 과거로 넘어간다. 

10살의 주인공은 동네에 주차된 RV차량을 궁금해서 들여다보다가, 그 안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저씨에게 붙잡혔다. 그 장면을 본 11살 언니는 늑대처럼 동생을 구하려고 차 안에 뛰어들었고, 소녀 둘은 아저씨의 완력에 제압되어 나란히 끌려가 외딴 동네의 시골집에 갇힌다. 

남자는 매일 여동생에게 언니의 몸을 묶도록 시킨다. 

여동생이 울면서 언니를 묶으면, 동생은 옆 방으로 끌려가서 강간을 당한다. 

동생이 지쳐서 돌아오면 언니는 울면서 무슨 일이 있었냐 묻고, 동생은 대답하지 못한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고, 어느 날 아저씨는 언니에게 동생을 묶도록 시킨다. 

오랜 기간 평정을 지켰던 동생은, 언니가 희생양이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울면서 아저씨에게 달려든다.

“내가 얌전히 있으면 언니를 가만두겠다고 했잖아!!!!”


하지만 소녀가 아저씨를 이길 리가 없다. 상황은 점점 안 좋아져서, 

자매는 그 후로도 몇 주 간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못하고 그 아저씨는 물론 아저씨의 친구들로부터 매일 강간을 당하게 된다. 

자매는 시간의 흐름도 알 수 없게 되는데, 나중에 아저씨가 무슨 뜻에서인지 자매를 병원 근처에 데려다 놓고 도망쳤을 때, 6주가 흘러 있었다. 

 
나중에 엄마가 언니에게 “왜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고, 차 안에 뛰어들었니?”라고 묻자, 언니는 “동생을 혼자 둘 수는 없었어.”라고 말했다. 

자매가 15, 16세가 되었을 때 엽기행각을 벌인 사내가 붙잡혔다. 

그는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고, 마침 부자여서 자매에게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주었다. 


어느 날, 자매는 가석방된 간강범으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자매로부터 용서를 받고 싶다는 것. 

언니는 동생에게 편지를 보여준 후, “우리가 이 사람을 만날 일은 없어.”라고 단언하며 편지를 태운다. 
 

Roxane Gay, <Hunger>


 <Hunger>는 저자의 ‘몸의 자서전(memoir of body)’이라고 했다. 

나는 히딩크 감독의 ‘나는 아직 배고프다’ 같은 의미의 배고픔인 줄 알았는데, 실제 육체적 배고픔을 의미했다. 저자는 고도 비만 여성이었던 것이다. 다이어트와 씨름하며 평생 배고픔을 달고 사는 이야기. 

저자는 어릴 적에도 통통한 편이었고, 백인만 있는 동네의 몇 안 되는 중산층 흑인 아이로, 전교 1등을 하던 착한 카톨릭 소녀였다고 한다. 

그 아이는 12살에 동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크리스토퍼’라는 아이를 흠모했는데, 크리스토퍼는 다른 남자아이들을 데려와 12살 소녀의 손을 묶고 집단 강간을 한다.

 
저자는 끝까지 자신을 너무도 사랑하고 자랑스러워 하는 부모님께 사실을 알리지 못한다. 

크리스토퍼는 저자를 ‘slut’이라고 홍보를 하고, 다른 남자아이들이 계속 강간을 하러 찾아오게 된다. 

저자는 20년이 넘도록 비밀을 끌어안은 채 ‘왜 나는 제대로 된 사랑을 받을수 없는 사람인가.’라며 자책을 한다. 

그리고 저자는 ‘남자가 원하지 않는 몸’이 되기를 꿈꾸며 폭식을 한다. 그런 몸이 된 후, 사회가 고도비만자에게 가하는 새로운 폭력에 눈뜨게 된다. 그녀는 박사학위를 받았고,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링 저자가 되었다.

용기 내어 자신의 이야기, '인격'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되었던 자신의 역사를 이야기를 한다. 

아주 유려한 언어로, 백인의 발음으로. 
 
운전하며 오디오북을 듣다가 여러 번 차를 세웠다. 

공터나 공용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이런 저런 상실과 폭력을 겪었던 나의 과거를 떠올리며 

자매의 슬픔, 저자의 슬픔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함께 앉아 있었다. 

여성의 삶이란, 인간의 삶이란 이런 것일까. 




BGM을 듣고 또 듣게 되는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스즈메가 동일본 대지진(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낳았던 그 쓰나미)으로 인해 엄마를 잃고 환상 같은 풀밭 속을 헤매고 있을 때, 흰 두루마기를 입은 여인이 스즈메에게 손을 내미는 장면. 

스즈메는 평생 그 여인이 누구였을까 궁금했는데, 알고보니 미래에서 온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 

신카이 마코토 감독은, 가족을 잃는 상실을 겪은 후 끝없는 슬픔 속에 내던져진 어린 아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 뿐이라는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그래, 이해할 수 있는 설정이지만. 

세상에 오로지 나 뿐이라는 것은 조금 쓸쓸하다. 


동생의 곁에 있어주기 위해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생각지도 않고 차 안에 뛰어드는  <Difficult Women>의 언니가 스즈메에게도 있었다면, 하고 생각해보았다. 

스즈메에게 모든 것을 베푼 이모와 더불어,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갈 형제나 자매가 있었다면. 







스즈메의 부모의 상실은 너무나 가슴 아프지만 어찌 보면 누구나 공감해줄 수 있는, 남들에게 밝힐 수 있는 아픔이다. 

한편 Roxane Gay의 상실(강간으로 인한 agency의 상실)은 부모에게도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상실이다. 

오랜 기간, 여성이 정조를 잃는 일은 여성이 부끄러워할 일로 간주되어 왔기에. 

Roxane Gay는 교육 받은 부모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부끄러워하며, 오로지 책 안에서 구원을 찾았다고 한다. 

그녀는 부모에게 끝까지 비밀을 지켰고(이 책을 읽고 알았겠지..) 부모는 그녀가 왜 끝없이 살이 찌는지, 밝음을 잃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예일대에 합격해서 1년을 다니다가 중퇴하고 부모의 곁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그마저 중퇴. 

한동안은 나이 든 남자와 마약에 빠져 살고, 결국 길고 긴 길을 돌아 여차저차 박사학위를 마치고 교수가 된다. 


먼 훗날 그 때의 괴로움을 되짚어 소설을 쓰며 가상의 구원자를 떠올려보더라도, 그 일을 함께 겪은 동성의 언니가 아니고서는, 아마 그녀를 보듬어줄 수 있는 이가 없었으리라. 

<Difficult Women>을 쓰면서 무너지고 또 무너지는 가슴을 부여 잡았을 저자의 모습이 떠올라 내 가슴이 아리다. 


육체적 폭력 앞에서, 앞도 뒤도 재지 않고 동생의 ‘옆에’ 있기 위해 몸을 던지는 용기. 

“네가 잘못한 것은 없어. 저 사람의 잘못이야.”라고 지치지 않고 확인해주는 권위. 

가해자의 용서를 받아줄 필요가 없다며, 그의 손편지를 가차 없이 태워버리는 단호함. 


열두 살 소녀에게 그런 언니가 있었더라면. 

그 슬픔의 세월을 가늠할 길이 없이 황망함 뿐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상실과 어머니의 고통을 함께 목도했던 나의 고마운 여동생과 남동생을 다시 떠올려본다. 

나 혼자 살아간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이 내 곁에 있어주었기에 내가 살 수 있었구나.  


#roxanegay #roxanegayhu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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