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로스쿨에서 결혼한 학생들을 많이 만났습니다("부모 학생회"도 따로 있습니다). 미국 사람들이 20대에 결혼을 많이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회생활 경력이 있는 채로 로스쿨에 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정말 신기했던 건 수업시간에 아이를 데려오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로스쿨 파티든 개인 파티든 대부분 '파트너 동반'으로 열리기 때문에 친구의 배우자를 만날 기회도 많았습니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한 제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여기저기에서 결혼이 넘쳐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결혼이 '비싸다'고 여겨집니다. 자녀 교육비와 치솟는 주택비용 때문에 젊은 사람들이 쉽사리 결혼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고 하죠. 전통적인 가족관이 해체되고 개인의 행복을 더 이상 결혼과 육아에서 찾지 않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도 있겠지만, 너무 높은 생활비가 결혼에 장애가 되는 요소임에는 그다지 이견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헬조선에서 결혼은 사치"라는 것입니다.
한국은 매년 1,000명 당 4명의 사람들이 결혼을 하는 반면, 미국은 1,000명당 6명 정도의 인구가 결혼을 한다고 합니다. 단순계산을 해보면 미국의 결혼인구비중이 한국보다 1.5배 높습니다. 그리고 평균 초혼연령은 미국이 28.9세(2019년), 한국이 31.8세(2018)년입니다. "빨리 결혼좀 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한국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미국이 아주 좋은 본보기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미국 사람들은 결혼을 더 빨리, 더 많이 하는 걸까요?
소득이 높아도 결혼을 안하는 유럽
처음에는 미국이 우리보다 평균 소득이 높기 때문에 결혼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닐까 추정을 했었는데, 확인해보니 마찬가지로 소득이 높은 유럽에서는 아래 그림처럼 1,000명 당 3~4명만 결혼을 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 스페인, 이태리 등은 우리나라보다도 조혼인율이 낮고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낮은 동유럽 국가는 조혼인율이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즉, 소득이 높다고 해서 결혼을 할 의사가 높아지는 것은 아닌듯 합니다.
사회가 박해지면 결혼을 많이 한다?
조금 모순적이게 들릴 수 있겠지만 저는 미국의 결혼에 대한 높은 선호가 (1) 넓은 땅덩이와 (2) 각박한 사회제도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치다 치즈루라는 일본의 철학자는 <어른 없는 사회>라는 명저에서 국가가 공급하는 복지체계가 잘 정비될 수록, 자본주의가 심화될 수록 가족은 해체할 수밖에 없다는 재미 있는 주장을 폅니다. 전쟁이 있던 시절 일본은 국가가 치안을 유지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동네의 어른들이 모여 민방위를 구성하고 순찰을 돌았다고 합니다. 사회의 기반이 약하면, 사람은 가까운 가족과 공동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런데 현대 자본주의 복지국가는 "개인의 선택에 의한 소비"를 최우선으로 하고(개인화) 국가가 치안, 소방, 최저생계지원, 보건 등의 복지를 체계적으로 지원하므로(국가화) 개인과 공동체의 중간지대에 있는 "가족"이 개인의 방패막이로서 설 자리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저는 미국이 우치다 치즈루 님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좋은 사례라고 생각했는데요. 국가에 의해 탄탄한 안전망이 제공되지 않는 미국 사회에서 가족이 "필수재"처럼 여겨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미국은 힘없는 개인이 살아남기가 꽤 어려운 나라라서(어쩌면 헬조선보다 더...) 결혼이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결혼이 경제적으로 유리한 선택
제가 가족법(Family Law) 첫 수업을 듣던 날, 교수님께서 "결혼의 이유가 무엇인지?" 질문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등장한 답변이 "세금," 그 다음이 "건강보험(health benefits)"과 "이민"(immigration)이었습니다. 교수님이 다양한 '현실적' 이유들을 칠판 가득 받아적었을 때쯤 가장 마지막에 "사랑(love)"이라는 답변이 조그맣게 나왔습니다. 즉, 미국 사람들이 특별히 로맨틱하다기보가는 현실적으로 '이득이 되기 때문에' 결혼을 한다는 것입니다.
결혼한 사람에 대한 연방법 상의 혜택(출처: PBS Newshour)
위 그림에는 결혼한 동성 커플(이성 커플에도 적용됩니다)이 연방법에 따라 어떤 혜택을 받을 수 있는지가 설명되어 있습니다.
- 배우자에게 이민법상 혜택을 줄 수 있다(a.k.a. 시민권)
- 공동으로 세금신고를 할 수 있다
- 자녀의 학교기록에 접근하는 등 부모로서의 권리를 지닐 수 있다
- 저소득층 가정에 대한 주거 지원혜택을 받을 수 있다
- 배우자가 사망할 경우 애도를 위한 휴가를 받을 수 있고 저작권 수입도 받을 수 있게 된다
- 유산 상속을 받을 수 있다
- 이혼을 하더라도 자녀에 대한 양육권을 공동 소유하고 재산을 나눌 수 있다
- 병원이나 감옥에 있는 배우자를 방문할 권리를 갖게 된다
- 배우자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최측근으로서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다
즉, '동성혼을 허용하는 것'의 문제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커플이 된다는 상징적 의미 외에 손에 잡히는 권리와 혜택이 걸려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어떠한 혜택이 있는지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사유 1: 건강보험
미국은 전 세계에서 의료의 불평등이 매우 높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젊은 사람이 좋은 건강보험을 가지려면 (1) 메디케이드(저소득층 대상 공공보험)로 인정을 받거나 (2) 좋은 건강보험을 제공하는 회사의 직원이 되거나, 아니면 (3) 자신이 직접 돈을 많이 내고 개인 보험에 가입하여야 합니다. (2)가 아무래도 가장 흔하겠죠..? 그리고 이런 회사는 배우자와 자녀의 건강보험도 커버를 해줍니다. 따라서 커플 중 한 명이 건강보험이 안좋으면 결혼을 할 유인이 매우 높습니다. 제 친구도 실직을 해서 건강보험을 잃고 약을 받지 못하게 되자 당시 오래 사귀던 남자친구와 급히 결혼을 했습니다.
사유 2: 세금 절감
그 남자친구는 컴퓨터 사이언티스트로 소득수준이 높았기 때문에 세금도 많이 내고 있었는데, 결혼하면서 두 사람 소득을 합산해 세금구간이 낮아지게 되자 매년 400만원 정도의 세금을 절감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상황입니다.
"세금: 당신이 연말 이전에 결혼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 (Huffpost.com)
사유 3: 이민자 신분
미국은 이민이 매우 흔한 국가입니다. 만약 커플중 한명의 신분이 시민권자 또는 영주권자가 아닐 경우 실직을 하거나 학교를 졸업하면 미국을 떠나야 하므로 결혼에 대한 의사결정을 빨리 내려야 하는 압박을 받게 됩니다.
사유 4: 사회보장 혜택
이에 더해 부부가 되면 함께 모기지 대출을 받아 집을 장만할 수도 있고, '가구'를 단위로 제공되는 각종 사회보장 혜택도 함께 받을 수 있게 됩니다. 학생과 군인은 가족이 있으면 방이 여러 개 있는 아파트에 배정을 받을 수 있고 부부의 소득이 낮을 경우 연방이나 주의 임대주택에 지원할 수 있습니다.
사유 5: 안전
미국은 거리도 대중교통도 그다지 안전하지 않습니다. 땅이 워낙 넓기 때문에 애초에 서울처럼 촘촘한 대중교통망을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거리에 노숙자가 많고, 총기 소지가 합법이기 때문에 누가 총을 들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어린이들을 차로 데려다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버스나 지하철에 어린이가 혼자 타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네요. 그리고해가 진 후에는 아이든 어른이든 잘 다니지 않습니다(뉴욕시 같은 번화가가 아니라면요). 아이가 16살에 스스로 운전을 할 때까지 부모가 계속 운전을 해준다는 것은 사실 굉장한 시간투자이므로 부부 간 협업체계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해가 진 후에는 보통 집에 있기 때문에 가족이 함께 보내야만 하는 시간이 아주 깁니다. 이런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본인도 빨리 가정을 꾸려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사유 6: 주택 관리
땅덩이가 넓은 만큼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house)에 거주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단독주택은 유지비용이 비싸고 불편하고 투자가치가 낮다고 알려져 있지만, 미국 사람들은 뛰어놀 수 있는 정원이 있어야 살만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하지만 단독주택에 정원까지 달려 있으면 당연히 손이 많이 가지요. 정원에서 고기를 한 번 구워먹으려고 해도 꽤 많은 노동이 들어갑니다(펜션에서 구워먹어 보셨죠..?). 여기에서도 일을 분담할 파트너가 있다면 훨씬 수월해지겠지요.
사유 7: 구하기 쉬운 일자리?
미국은 우리나라보다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더 박한 편입니다. 한국 정부는 출산장려금이나 출산 후 아이돌봄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하니, 아이가 있는 로스쿨 친구들은 "알잖아, 미국은 너무 후져(You know, America sucks)"라고 답변을 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람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많이 낳습니다.
저는 미국 여성들이 선뜻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기 쉬운 이유 중의 하나가 일자리를 찾는 것이 한국보다 덜 어렵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경단녀'가 직업을 구하는 것이 너무 어려워 '경력단절여성 취업지원사업'이 별도로 만들어질 정도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직장에서 잘리는 것도 쉽고 또 상대적으로 구하는 것도 쉽습니다. 이력서에 성별과 나이를 표기하지 않으며, 또 중간중간 커리어에 갭이 있어도 '가족 부양' 때문이었다고 하면 이해를 해주기 때문에 전문지식을 갖춘 상태로 인터뷰를 잘 볼 수 있다면 좋은 직장을 구할 수 있습니다. 즉, 결혼을 하면 커리어에 타격이 간다는 불안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 정도는 우리나라보다 낮은 것 같습니다.
2020년 에어비앤비에서 만난 미국인 가족에게 왜 유럽에 비해 미국이 결혼을 많이 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여성분들은 "유럽이 세금을 너무 많이 내기 때문"이라고 답을 했었습니다. 그분들 말에 따르면 스웨덴에서는 수입의 반을 세금으로 내야 하기 때문에 먹고 살려면 부부가 맞벌이를 해야 하는 반면, 미국에서는 혼자서 세후 1억원 이상의 수입을 얻는 것이 어렵지 않으므로 둘 중 한 명이 가사와 육아에 전념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개개인의 경제적 독립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 논리에 선뜻 동의하기는 어려웠지만, 종교적 이유에서든 사회경제적 이유에서든 "결혼은 필요하다"는 결론에 쉽게 다다르는 미국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사회 안전망을 후퇴시키자는 말은 결코 아닙니다. 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면 유리창이 깨져 있고 제대로 된 선생님도 없는 공립학교에 가야하는 미국 사회, 능력 없는 사람은 병원도 마음대로 가지 못하는 미국 사회가 슬프고 야만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들어감과 가족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들
제가 매우 좋아하는 두 책을 소개하고 글을 마치겠습니다. 문장력이 뛰어난 의사인 아툴 가완디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2014)>라는 책에서 병원에서 수십 개의 관을 달고 연명치료를 하는 삶, 자율성을 잃고 요양원에서 보내는 삶 등을 자세히 조명합니다. 인간은 나이가 들고 신체가 허약해지면 혼자서 삶을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을 '자원'으로 보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인들은 '가치를 잃은 자원'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노인들은 과거의 영광과 자신감을 잃은 상태로 주변에 폐를 끼치지 않으며 조용히 살아가기를 희망하는, 슬프고 고독한 일상을 누리게 됩니다. 저자는 질문합니다. 나이가 듦에 따라 두뇌와 신체가 약해지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가족에 둘러싸여 죽을 날을 맞이하는 과거의 삶이 더 좋지 않았나 하구요.
소피아 룬드베리의 <도리스의 빨간 수첩(2018)>은 아흔 여섯 살의 도리스 할머니 이야기입니다. 스웨덴의 집에서 혼자 살고 있는 도리스 할머니는 혼자 쉽게 거동을 할 수 없습니다만 청결하고 단정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정부에서 배정해 준 여대생들이 할머니의 집에 와서 청소와 간단한 요리를 하고 목욕을 시켜주지만, 그들의 발랄하고 무신경한 손길이 도리스 할머니를 종종 한숨 짓게 합니다. 도리스 할머니의 유일한 낙은 캘리포니아에 사는 종손녀 제니와 영상통화를 하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도리스 할머니의 아름답고 화려했던 젊은 날들과 현재의 고독한 삶이 따뜻하게 그려집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져 온 비대면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고립된 삶은 괴롭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저도 미국에서 학교, 도서관, 카페, 바 등이 모두 문을 닫고 오로지 공원 밖에는 갈 곳이 없는 상태를 꽤 긴 시간 동안 겪으면서 그간 제가 누렸던 행복이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가능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국가에게 의지를 하든, 가족에게 의지를 하든 아마도 인간은 혼자서 살기는 어려운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