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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Nov 23. 2021

억척스러운 얼굴에 미움을 느끼다

잠실역 지하상가에서 장갑을 사면서

꼬마 명창으로 성장해 컨템프러리 음악을 섭렵했다고 알려져 있는 이자람.


재즈페스티벌 목록에서 언뜻 이름을 보다가 그의 진면목을 최초로 알게 된 것은 과천시민회관에서 브레히트의 희곡을 각색한 모노드라마,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을 보면서 였다. 과천청사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나는, 퇴근시간이 되면 도망치듯 과천을 빠져나와 지하철이나 버스에 몸을 실었다. 10여 분 후 서울의 경계에 들어서게 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시절 과천은 지겹고 도망치고 싶은 곳이었다. 그래서 예술의 전당에서 수백명의 초등학생에 휩쓸려다니며 전시를 보거나 조그만 갤러리들에 발품을 팔 지언정, 과천시민회관에 갈 생각은 하지도 못하던 때였다.


어느 날 함께 일하던 지은이가 과천시민회관에서 이자람이라는 사람이 하는 모노드라마를 보자고 했다. 명창으로 유명한 이인데 현대극이니 내가 좋아할 것이라면서. 나는 1명의 사람에 의해 모든 공연의 품질이 좌우되는 모노드라마에도 국악에도 과천시민회관에도 흥미가 없었으나 순전히 지은이를 좋아하는 마음에 승낙을 했다. 지은이는 기뻐하면서 커피도 사주고 티켓도 사주려고 했다.


나는 그날로 모노드라마와 국악, 이자람이라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 1명의 예술가가 이 정도의 폭발력을 지니고 있다니. 유럽의 전쟁을 배경으로 쓰인 희곡을 중국의 오래 전 시대로 옮겨 각색한 작품이었는데, 이자람은 잘난 체 하는 장군이 되었다가, 가난한 어미가 되었다가, 지조 있는 딸이 되었다가, 아첨하는 관리가 되었다가 하였다. 어려서부터 국악으로 다져진 목소리, 득음을 한 듯한 목소리는 시대극에 아주 잘 어울렸다.


마음 약하고 따뜻하고 가난한 어미에서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이를 악물고 남을 해칠 수도 있는 억척어멈이 되기까지. 단지 살려고만 했을 뿐인데, 왜 세상이 그를 그렇게 일그러지게 만들었는지 온 가슴으로 공감하고 지은이와 함께 펑펑 울었다. 모든 것을 다 토해낸 이자람은 공연이 끝나니 늙어보이기까지 하였고 나는 그 사람의 젊음 한 조각에 빚을 진 기분이었다.




얼마 전 요조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마음산책)>을 읽다가 또 한 번 억척스러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요조는 책방을 운영하다보니 '돈독'이 오르게 되었다고 했다. 돈을 못벌 줄 알았지만 정말로 돈이 안벌리니 버티기가 힘들었고, 책방에 와서 사진만 찍고 나가버리는 사람들에 대해 미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종로에 있던 원래 책방무사는 고질적인 주차 문제가 있는 곳이었는데, 매일 같이 가게를 막는 차들 때문에 구청에 전화를 걸어 견인차를 부르고 차주들과 실랑이를 했다고 한다. 어딘가에 차를 댔을 때 득달같이 뛰어나와 "여기 차대시면 안돼요!"라고 소리를 지르는 구겨진 얼굴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래서 아마도 덜 얼굴을 구기고 싶어서 임대료가 적고 사람도 적은 제주로 이사를 하게 되었나 싶다.




미국에서 2년 정도 대형 마트와 아마존만 이용하다가 오랜만에 한국에 와보니, 자영업자들이 즐비해있는 지하상가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미국에는 자영업 상점이 수량도 많지 않은 것 같고, 가격도 비싼 느낌이라 잘 이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무엇을 사든 백화점이나 마트에 가게 된다. 잠실역에서 비슷비슷한 가격대의 의류 계통의 물건을 팔면서 무한경쟁을 하는 수십 개의 자영업 상점이 생경하고 또 정감 있다가왔다. 온 김에 내게 사이즈가 딱 맞는 구두며 장갑이며 품질 좋은 것들로 다시 채비를 해서 미국에 가져가리라 다짐을 했다.  


양말 스타킹이 눈에 보였다. 미국에선 은근히 구하기 힘든 아이템이다. 품목마다 안내표지가 붙어 있다. "1개 2천원, 3개 이상부터." "1개 1천원, 6개 이상부터." 꼭 3개가 되어야 파는 것인지 여쭈어보니 3개 이상부터 카드가 된다는 의미라고 하였다. 물건마다 기준이 달라서 꼼꼼히 들여보다가 1종을 여러 개 사는 것을 일단 선호하시는구나 싶어 1종의 스타킹을 여러 장 사고 송금을 했다. 5백원의 카카오페이 송금수수료는 내 몫이지만, 내가 귀찮아서 은행 앱을 안깐 탓도 있고 이 분들은 카드 결제 자체를 싫어하시는 듯하니 이게 서로에게 좋은 일이지. 부부처럼 보이는 두 분은 카드 기준을 넘어섰음에도 송금을 하는 내게 고마워하는 눈치였다.


그 다음은 스카프. 따뜻해보이는 스카프 여러 장이 걸려 있는 매장이 있었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 때문인지 스카프들이 참 좋아 보였다. 매장 사장님은 친구분인지 직원분인지 하는 분과 열렬히 누군가가 어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두 장을 골라서 내려주면 매어보겠다고 하였는데, 매장 사장님이 한장을 먼저 꺼내서 갑자기 포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 제가 매어보고 살지 말지 보려구요." 그랬더니 "그럼 1장만 매어보세요."라고 차갑게 대꾸하셨다. 그래서 매어보았다. 매장 사장님은 친구분과 이야기를 멈추고 내가 매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지그시.


그렇게 한 장을 매어봤는데 색이 맘에 들지 않아 다른 것도 매어보면 안되냐고 하니 길게 한숨을 쉬셨다. "아, 그러면 제가 꺼내서 혼자 볼게요."라고 했더니 두 분이 동시에 "그거 잡아당기시면 안돼요! 기다리세요!" 라고 하셨다. 30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스카프를 매보며 흘끔 흘끔 눈치를 봤고 사장님은 거의 눈도 깜빡이지 않고 계속 쳐다보고 계셨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손님들에게 "언니들! 들어와서 보세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두 번째 스카프도 아쉽게 맘에 들지 않았다. 평소라면 사지 않았겠지만 그 눈빛이 무서워서 그냥 결제를 하기로 했다. 그래, 어차피 목도리 없이 2주 더 체류하기는 힘들겠지. 1만 9천원이면 비싸지도 않으니까. 결제를 하고 송금을 한다고 했더니 "교환, 환불 안돼요."라는 말과 함께 봉지에 넣어 주었다. 휴, 5분이 50분 같았다.


그 다음은 장갑. 이 정도 겪었으면 그냥 지하상가를 떴어야 하는데 찬 공기에 또 장갑이 갖고 싶어졌다.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매장 앞에 걸려 있는 장갑 몇 개를 만지작거렸다. 어느 디자인을 사야할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 때 매장 사장님이 걸어오시는데 아까 스카프집 분과 눈빛이 비슷해서 친구에게 "잠깐 음소거좀 할게."라고 말했다.


사장님은 장갑을 색깔별로 진열하면서 한숨을 쉬셨다. 그리고는 내게 "어느 디자인을 찾으세요?"라고 물어보셨다. "아.. 좀 편하게 가볍게 낄 수 있는 장갑이요."라고 하니, "아... 어느 디자인을 찾으시는지 물어본 이유는 통화하시면서 계속 이 장갑 저 장갑 만지작 거리셔서 계속 만지면 장갑이 늘어나기 때문에 말씀드린 거에요."라고 하셨다. 그래서 "아...네... 장갑 만져보면 안되는 거군요."라고 하니 "만져보면 안되는게 아니라, 다 껴보시라고 저희가 이렇게 진열해놓은 거죠. 근데 그래도 이것 저것 다 만지다보면 장갑이 늘어나요. 저에게 원하시는 스타일을 말씀해주시면 제가 추천해드릴 수도 있고, 그게 서로 좋으니까 말씀을 드리는 거에요. 어차피 혼자 고민해봐야 답도 안나와요."라고 하셨다.


그래서 6천 원짜리 장갑이 어떠냐 물으니, 이것보다는 8천 원짜리가 더 소재가 좋고 편하다고 말씀해주셔서 8천원짜리 장갑을 샀고 계좌로 송금을 했다. 송금완료 내역을 보여달라고 하시길래 8,500원으로 되어 있는 내역을 보여드렸더니 "아, 500원을 수수료로 내셨군요..."라고 하시면서 "장갑 끼고 가시겠어요?"라고 물으셨다. 내가 "아뇨, 그냥 가방에 넣어갈게요."라고 했더니 "아, 그러면 제가 이거 택이랑 다 떼어드릴게요. 손 긁히실 수도 있어서요."라고 하셨다. 내 손을 걱정해주는 것인지 교환, 환불을 받아줄 수 없다는 이야기인지 헷갈렸다. 택이 붙어 있으면 교환, 환불을 무조건 해주어야 한다는 법 같은 것이 있나?  




불현듯 예전에 홍대 앞에서 샀던 원피스가 떠올랐다. 거기는 옷을 주문제작하는 곳이라고 했다. 샘플로 있던 M을 입어보고 S 사이즈가 맞겠다고 하시며 며칠 뒤에 오라고 하였다. 공장이 내일 쉬어서 며칠 후에나 된다고. 매장을 떠나고 두시간 후쯤 내게는 너무 비싼 옷(당시 6만 8천원이었는데 아주 비싸다고 생각했다) 같아 혹시 취소할 수 있는지 연락을 하였는데 방금 공장장님께 문자로 주문을 넣었고 그 쪽에 입금도 했기 때문에 취소할 수 없다고 답변을 들었다.


그리고 나중에 만들어진 옷을 집에 와서 입어보니 사이즈가 너무 작고 기장이 짧아서 아무 곳에도 입고가지 못할 것 같았다. 동기 오빠와 같이 환불 또는 교환을 하러 갔다. 왠지 무서운 곳이라는 느낌이 있어 동기 오빠를 대동했었나 보다. 당연히 환불도, 교환도 해주려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1) 이미 집에서 착장을 해보았고 (2) 주문제작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경제학과 학생이던 동기 오빠는 택도 안떼었고 아무 데에도 입고 가지 않았는데 사이즈든 뭐든 교환이라도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요청을 하였는데 사장님은 피부 알러지가 일어나지 않는 한 교환을 해주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했다. 오빠가 뜻을 굽히지 않자 사장님이 남편을 불러서 남자끼리 목소리를 높이게 되었다.


"너만 남자친구 있냐, 나도 남편 있다!"라고 나에게 윽박지르는 사장님을 보면서 나의 남자친구도 아니면서 평생 들을 욕을 다 먹고 있는 동기 오빠에게 미안해졌다. 흥분한 동기 오빠를 억지로 끌고 작아서 입을 수 없는 옷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6만 8천원 아끼자고 얼굴 붉히며 속상한 일 만들 수는 없다는 생각이 너무 늦게 들었던 것이다. 동기 오빠는 내게 본인이 잘싸우지 못해 미안하다고 했는데, 나는 오빠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그 옷은 태워버리고 싶었다. 아직도 그 분들의 구겨진 얼굴이 눈에 선하다. 동기 오빠를 대동해서 어떻게든 무언가를 받아내려 했던 나 자신이 밉게 느껴진다.





미국에 다니다보면 카드를 안받는다던가 특정 카드를 안받는다던가 하는 상점들이 있다. 그러면 카드를 쓰지 않는다. Venmo 같은 송금을 받는 곳도 있지만 받지 않는 곳도 있다. 그래서 굳이 그 매장을 가야 한다면 어디서든 현찰을 찾아온다. 카드로 낼 때 부가세 등의 수수료를 더 내라고 하는 곳은 아직 보지 못했다. 카드를 꼭 받아야 한다거나 현금을 받으면 현금영수증을 해주어야 한다거나(현금영수증 제도는 없는 것 같다) 카드와 현금에 동일한 가격을 받아야 한다고 하는 등의 규제가 있는 것을 느껴본 적이 없다. 한편으로 우리나라에선 왜 이 모든 걸 일일히 법으로 정해놨어야 했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이런 법이 없다면 누가 맞냐 틀렸냐로 계속 싸우게 되었으려나 싶기도 했다. 여하튼 미국에선 자영업 상점을 잘 안가서인지 기싸움 비슷한 일도 겪은 적이 없어 우리나라와 동등비교하기는 힘들다.


스카프와 장갑을 팔던 그 분들은 얼마나 손님들에게 질려 있길래 손님을 싫어할까. 실컷 만져보고 그냥 나가버리는 손님들, 2,000원 짜리를 사면서 왜 카드를 안받냐고 신고하겠다는 손님들을 하루에 한 트럭 씩 만나다보면 미움이 디폴트값이 되는 걸까. 스카프를 감히 일일히 매어보고 사려고 하다니, 장갑 여러 개를 만지작거리다니!!! "언니, 들어와서 둘러보세요!"라고 하지만 둘러보는 손님들이 반갑기는 한걸까.


스카프를 매는 나를 바라보던 차가운 혐오. 그것은 분명히 혐오의 눈길이었다. 나는 혐오에 혐오를 더하기 싫어, 그리고 어쩌면 똑같은 혐오의 마음으로 얼른 스카프를 샀다. 내가 두 장이나 매어보고 안사고 나가면 저 사람은 손님에 대한 미움을 더 키우겠지. 내가 금전을 지불하면 그 사람은 혐오를 거둘테니, 그렇게라도 내 맘을 편하게 두고 싶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사람의 인격의 바닥을 보고, 내 인격의 바닥을 내어 놓은 기분이 들어 피로감이 몰려왔다.


이 모든 것은 적대감을 쉬이 느끼는 예민함 때문일까. 애초에 지하상가에서 물건을 살 때는 온 마음의 무장을 했었어야 하는 걸까. 친구는 "불법주차를 한 사람과 물건을 사러 매장에 들어온 너를 비교하면 안되지"라고 했다. 하지만 옳고 그름을 떠나 나의 만지작거림이 그 상점 주인들에게 야기했을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나도 스트레스를 받고, 앞으로는 비인격적인 대형 마트에만 가야겠다고 다짐을 하게 된다.


억척어멈의 구겨진 얼굴을 보고 공감하는 체 이해해보려고 하다가 내 안의 억척스러움이 올라오는 것이 싫어 결국은 슬금슬금 피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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