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벨뷰의 정원 Nov 24. 2021

음주독서가 성공할 때도 있다

매우 중요한 4D 책읽기



장강명 작가인가 누군가가 술을 마신 후에 설거지도 할 수 있고 SNS도 할 수 있는데 왜 책읽기는 하지 못하는가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이 분은 책을 읽다보면 술이 마시고 싶어지고 술을 한두 잔 홀짝이다보면 책에 좀처럼 집중하는 일이 어려워지는 현상을 잘 아는 사람이다.


음주독서에 연이어 실패해온 사람으로서 나는 책을 읽을 때 주로 차를 마시지만, 가끔 못견디게 술이 당길 때가 있다. 이 경우 아마 책을 못 읽게 될테니 아무 술이나 마실 수는 없고 음주의 체험을 풍성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책의 내용과 어울리는 술을 마신다. 이를테면 재일한국인들의 이야기 <파친코>를 읽다가 파전에 막걸리를 마시게 되는 것처럼.


며칠 전에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무려 1980년대 유럽 여행 에세이인 <먼 북소리>를 읽던 중 술이 당기는 순간이 왔다. 내가 카드를 챙기고 옷을 입기 시작하자 나의 임시 룸메이트가 '술이 당기면 냉장고의 잣 막걸리를 마시라'고 알려주었다. 내가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룸메이트는 '왜? 이 밤에 나가기도 귀찮고, 잣 막걸리는 네가 싫어하는 단 술도 아닌데...'라고 했다.


나를 챙겨주는 마음은 고맙지만...  이태리와 그리스를 여행하는 책을 읽는 현재로서는 와인 아니면 위스키, 정말 많이 양보해봐야 유럽 맥주 정도 밖엔 마실 수 없다고 했다. 룸메이트는 역시 너 보통 애가 아니구나, 더 말해봐야 소용없겠다 하는 표정을 지었다.




야경과 함께라면 플라스틱 잔도 괜.. 괜찮아


이 고집스러운 독서애주가는 편의점에서 9,900원짜리 이태리 와인을 사왔다. 룸메이트는 냉장고에 있던 올리브를 들고 와서 옆에 앉았고 당연히 책보다는 수다가 더 재미있었다. 결국 음주독서는 이번에도 실패.






그리고 새벽, 술이 조금 취한 상태로 요조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읽기 시작했다. 요조가 운영하는 '책방무사'까지 갔음에도 다른 매력적인 책들과 고민을 하다가 끝끝내 사지 않았던 책이다. 하지만 알라딘 중고책방에 꽂혀있는 것을 냉큼 구입하고 말았다. 무게 때문에 미국에 들고 갈 수 없기 때문에, 책을 곱게 본 후에 누군가에게 주어야지라고 다짐했었다.


요조 만큼이나 빛나는 책


분명히 이 정도 취기라면 책이 안읽혀야 하는데 이상하게 잘 읽혔다. 너무 리듬감 있게 읽혀서 잠을 자기 싫을 정도였다. 요조의 담담하고 꽤 균형잡힌 시선, 가벼운 문체, 모던함 등이 아주 기분 좋게 다가왔다. 20대의 신비로운 여신 같은 분위기를 여전히 가지고 있는 사람, 그리고 들여다보면 의외로(?) 최선을 다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의외로 열심히 산다'는 말을 칭찬으로 여길 것 같은, 신비로운 생활인.


요조의 글에서는 장기하의 발바닥이 달라붙는 끈적끈적한 장판 같은 곤궁함이랄까.. 집시 감성이랄까 하여튼 그런 것이 느껴진다. 이런 느낌에는 반드시 라면을 먹어주어야 하는데... 때는 새벽 4시. 룸메이트는 자러 올라갔고... 결국 혼자 진라면 순한맛를 끓였다. 라면은 역시 깜짝 놀랄 만큼 맛있었다. 라면과는 훌륭하게 어울리는 잣 막걸리도 땄다. 캔에 담긴 막걸리는 처음 먹어보았는데 룸메이트의 말대로 달지 않고 맛이 좋았다.


그런데 라면과 책을 동시에 즐기고 싶은 욕심에 무리하게 냄비 손잡이를 독서대로 활용하다가 깨끗하게 읽던 책장에 라면 국물이 마구 튀는 일이 발생했다. 순간 '그래, 이 책을 아무에게도 주지 못한다해도 아무려면 어때' 싶었다. 열독하다가 라면 국물을 흘리는 것이야말로 내가 산 내 책, 마음에 드는 책을 가장 열렬하게 소비하는 방법이 아닐까. 재화의 효용을 극대화하겠다(소장할 수 없다면 선물로라도 활용하겠다)는 나의 자본주의적 마인드셋이 부박하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집념의 냄비 손잡이 (...)




여하튼 좋은 와인, 좋은 책, 좋은 라면이었고 오늘은 피곤에 찌들어 계획했던 바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오늘 룸메이트는 '넌 인생을 싫어하는 사람 치고 정말 최선을 다해서 인생을 살아.'라는 발언을 했다. 음... 나도 의외로 생활인 중의 하나인가.



*메인의 일러스트는 '아방'님의 그림

작가의 이전글 억척스러운 얼굴에 미움을 느끼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