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네. 집 대출금이랑 자동차 리스, 그런 것들 때문에 현금을 융통하기가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외국계 대기업 다니시는 분이라면서요?
정원: 네. 경제적으로 부족함은 없어 보였어요. 잘은 모르지만요. 2백만원이 너무 많은 액수였을까요?
변호사: 아닙니다. 전혀 아니에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 분의 반응이 제가 생각한 이상이네요. 정말로 미안하다면 미안함을 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때 받아들여야 하는데, 2백만원을 듣자마자 '협박하는 거냐, 나도 변호사 선임할 수 있다, 그렇게 돈 밝히는 친구인 줄 몰랐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더라구요.
정원: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변호사: 그럴 것 같았는데도, 정원씨는 용서해 줄 생각을 했군요.
정원: 그러게요. 왠지 그럴 것 같았는데.. 정말로 제 눈 앞에서 보니까 조금 충격적이긴 해요.
정선: 진짜 양심도 없네요. 돈 밝힌다고? 와, 진짜. 무릎 꿇고 평생 사죄할 힘은 있고 2백만원 줄 힘은 없군요.
변호사: 그래서 제가 아까 말씀드린 거에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죽을 죄를 졌다고 사죄하는 것은, 진정한 사과가 아닌 경우가 많아요.상황을 모면하고 나면, '걔가 유별났어. 나한테 여지를 줘놓고 왜 이제와서 딴 소리야? 내가 그래도 처신을 잘해서 크게 운 나쁠 거 한 거 피했지.' 이런 식으로 상황을 정당화합니다. 본인의 죄를 쏙 빼놓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할 생각만 하는 거지요. 저런 분들을 계속 대면하다보면 피해자가 '내가 너무한 건가, 내가 이해심이 부족한건가'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정원씨가 딱 그런 상황이었어요.
정원: 네... 정말 그렇네요.
변호사: 지금 2백만원에 대해 저 사람이 보이는 태도를 보면, 그다지 미안해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하면 자동차 리스 안내고 합의금을 줘야죠. 본인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그로 인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죠. 변호사 선임해서 절차 진행한다면 오히려 아주 좋습니다. 그 쪽 변호사가 정원씨에게 직접 연락하는 것은 더더욱 못하게 할 거에요.
정원: 저는 정말 그렇게만 되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변호사: 네. 아마 이젠 못할 겁니다. 저희가 저희 안을 제시했으니, 정원씨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어떻게 하는게 가장 유리한지 머리 쓰기 바쁘겠죠. 저희는 그냥 기다리면 됩니다.
정원: 네, 정말 감사합니다. 저 혼자라면 생각도 못했을 거에요.
변호사: 2백만원을 제안한 것이 좀 마음이 불편하세요?
정원: 네, 사실 그렇긴 해요. 그 쪽에서 큰 돈이라고 하니까 '내가 그 동안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싶어서 반감이 들어요. 차라리 1천 만원을 제시했으면 저런 욕을 들어도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하고요.
변호사: 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정원씨는 이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죠. 이제 그 사람이 합의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원씨의 이해심이 부족하다고 욕하면서 절차를 계속 진행한다면, 정원씨도 이제 미안한 마음 없을 것 같지 않아요?
정원: 그건 그렇네요. 자기가 선택한거니 안 미안할 거 같아요.
변호사: 네, 그게 아마 가장 큰 수확일 거에요.
1시간 남짓이 흘렀다.
변호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자매는 빌딩 밖으로 나왔다.
이 날 두 자매는 테헤란로를 처음 걸어보았다. 어른들만 있는 곳일 줄 알았는데, 아, 우리도 이제 어른인가. 6월의 공기는 맑고 시원하고 따사로웠다.
정선: 와, 진짜 대박이네. 변호사는 다르긴 다르구나. 이런 사건을 많이 해봐서인지 답이 딱딱 나오시는구나. 어떻게 저렇게 상황 판단이 빠르지? 언니랑 나랑 그간 마음 고생한 거 생각하니까 좀 허탈하다. ㅎㅎ
정원: 진짜 사람은 배워야 되나봐.
정선: 그 놈은 좀 정신이 이상한 거 아니야? 나라면 감지덕지하고 합의하자고 할텐데.
정원: 그러니까. 그렇게 살려달라고 했으면서. 나는 누구한테 살려달라고 비는 것보다 2백만원 주는 게 더 쉬울 거 같은데.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 맘 같지 않나봐.
정선: 수치심이 별로 없나봐.
정원: 저 변호사님 진짜 멋지다.
정선: 그러게. 아예 생각도 못했어. 그런 방법은. 이제 전화올까봐 무서워 하는 일은 없어도 되겠네.
정원: 응.. 나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올 때마다 평생 이러면 어쩌나, 형 확정되고 해코지하러 오면 어쩌나 계속 무서웠어. 만약 합의를 안해도, 본인이 선택한 거니까 해코지하러 올 것 같진 않아. 왠지.
정선: 언니, 진짜 고생 많았어. 교수님한테 너무 감사하다. 이런 분 소개해주셔서...
정원: 네가 고생 많았지. 맨날 나 데리러 버스 정류장에 나오느라고... 미안하고 고마워. 알지?
정선: 당연한 걸 가지고!! 저녁 뭐 먹을까?
Sisterhood
정원과 정선은 한 살 터울이다. 정원은 홍대, 정선은 이대를 다니고 있어서 마포구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언제 불을 끌 것인지, 이불 빨래를 언제 할 것인지, 음식쓰레기를 누가 버릴 것인지 등으로 티격태격할 때도 있었지만. 정원이 가장 세상을 두려워했을 때 곁에 있어준 사람은 정선이었다. 스토커가 지켜보고 있기에 무서웠던 밤 길, 처음 가보는 경찰서, 처음 가보는 변호사 사무실, 그 과정에서 정선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정원의 곁을 지켰다. 고맙다는 말도 새삼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동료의식은 같은 집에서 자란 여자 형제가 아니라면 키우기 어려운 감정인지도 모른다. 살면서 정선에게 고마운 순간은 무수히 있었지만, 이 때 만큼 정선의 의연한 태도와 존재감이 큰 위로가 된 적은 없었다.
어릴 때 정원과 정선은 꽤 많이 다투었다.
경희에게 '자매가 있는 것이 싫다'라고 불평을 하면, 경희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언니나 여동생이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너희는 아마 모를거야. 남자 형제와는 나눌 수 없는 고민들이 살다 보면 많이 있어. 너희가 스무 살이 넘어가면, 분명히 내게 이야기할 날이 올거야. 언니를 낳아줘서, 동생을 낳아줘서 고맙다고.
경희의 말이 맞았다. 스토킹에 대해서 정원은 경희에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대전에서 딸들의 건강과 안녕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스토킹 당하고 있다는 말을 하면 얼마나 걱정을 하시겠는가. 학교를 휴학하고 대전에 내려오라는 것 말고는 도와주실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상황이 정말 심각해지지 않는다면, 가급적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부모에게 말할 수 없지만 자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구나. 나도 정선이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온 몸을 다해서 막으려고 노력하겠지.
자매는 같은 여성이기에 신체적 ,정신적 위협에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서로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네가 정신 차렸다면 그렇게 당하진 않았겠지"라는 비난도, "나라면 민. 형사고소를 해서 아주그냥 혼쭐을 내줬을 거야!"라는 무책임한 조언도 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 같이 있어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