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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un 09. 2023

#5. 언니, 내가 곁에 있을게

권선징악 4편

* 등장인물

정원(나): 주인공

정선: 정원의 동생

철종: 스토커

경희: 정원과 정선의 엄마




변호사는 철종과 전화를 하는 동안 조금 놀란듯 했지만,

이내 온화하게 미소를 지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변호사: 대충 들으셨죠?

정원, 정선: 네.

정원: 합의금이 너무 많다고 하던가요?

변호사:네. 집 대출금이랑 자동차 리스, 그런 것들 때문에 현금을 융통하기가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외국계 대기업 다니시는 분이라면서요?

정원: 네. 경제적으로 부족함은 없어 보였어요. 잘은 모르지만요. 2백만원이 너무 많은 액수였을까요?

변호사: 아닙니다. 전혀 아니에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저 분의 반응이 제가 생각한 이상이네요. 정말로 미안하다면 미안함을 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을 때 받아들여야 하는데, 2백만원을 듣자마자 '협박하는 거냐, 나도 변호사 선임할 수 있다, 그렇게 돈 밝히는 친구인 줄 몰랐다' 이런 식으로 말을 하더라구요.

정원: 왠지 그럴 것 같았어요.

변호사: 그럴 것 같았는데도, 정원씨는 용서해 줄 생각을 했군요.

정원: 그러게요. 왠지 그럴 것 같았는데.. 정말로 제 눈 앞에서 보니까 조금 충격적이긴 해요.

정선: 진짜 양심도 없네요. 돈 밝힌다고? 와, 진짜. 무릎 꿇고 평생 사죄할 힘은 있고 2백만원 줄 힘은 없군요.

변호사: 그래서 제가 아까 말씀드린 거에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죽을 죄를 졌다고 사죄하는 것은, 진정한 사과가 아닌 경우가 많아요. 상황을 모면하고 나면, '걔가 유별났어. 나한테 여지를 줘놓고 왜 이제와서 딴 소리야? 내가 그래도 처신을 잘해서 크게 운 나쁠 거 한 거 피했지.' 이런 식으로 상황을 정당화합니다. 본인의 죄를 쏙 빼놓고,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할 생각만 하는 거지요. 저런 분들을 계속 대면하다보면 피해자가 '내가 너무한 건가, 내가 이해심이 부족한건가' 하는 생각에 빠지게 됩니다. 지금 정원씨가 딱 그런 상황이었어요.

정원: 네... 정말 그렇네요.

변호사: 지금 2백만원에 대해 저 사람이 보이는 태도를 보면, 그다지 미안해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정말 미안하면 자동차 리스 안내고 합의금을 줘야죠. 본인이 잘못을 저질러 놓고도 그로 인한 책임을 지고 싶지 않았던 것 뿐이죠. 변호사 선임해서 절차 진행한다면 오히려 아주 좋습니다. 그 쪽 변호사가 정원씨에게 직접 연락하는 것은 더더욱 못하게 할 거에요.

정원: 저는 정말 그렇게만 되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변호사: 네. 아마 이젠 못할 겁니다. 저희가 저희 안을 제시했으니, 정원씨를 설득하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어떻게 하는게 가장 유리한지 머리 쓰기 바쁘겠죠. 저희는 그냥 기다리면 됩니다.

정원: 네, 정말 감사합니다. 저 혼자라면 생각도 못했을 거에요.

변호사: 2백만원을 제안한 것이 좀 마음이 불편하세요?

정원: 네, 사실 그렇긴 해요. 그 쪽에서 큰 돈이라고 하니까 '내가 그 동안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데!' 싶어서 반감이 들어요. 차라리 1천 만원을 제시했으면 저런 욕을 들어도 괜찮았을 것 같기도 하고요.

변호사: 네, 충분히 그러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정원씨는 이 사람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죠. 이제 그 사람이 합의안을 받아들이지 않고 정원씨의 이해심이 부족하다고 욕하면서 절차를 계속 진행한다면, 정원씨도 이제 미안한 마음 없을 것 같지 않아요?

정원: 그건 그렇네요. 자기가 선택한거니 안 미안할 거 같아요.

변호사: 네, 그게 아마 가장 큰 수확일 거에요.



1시간 남짓이 흘렀다.


변호사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자매는 빌딩 밖으로 나왔다.

이 날 두 자매는 테헤란로를 처음 걸어보았다. 어른들만 있는 곳일 줄 알았는데, 아, 우리도 이제 어른인가. 6월의 공기는 맑고 시원하고 따사로웠다.


정선: 와, 진짜 대박이네. 변호사는 다르긴 다르구나. 이런 사건을 많이 해봐서인지 답이 딱딱 나오시는구나. 어떻게 저렇게 상황 판단이 빠르지? 언니랑 나랑 그간 마음 고생한 거 생각하니까 좀 허탈하다. ㅎㅎ

정원: 진짜 사람은 배워야 되나봐.

정선: 그 놈은 좀 정신이 이상한 거 아니야? 나라면 감지덕지하고 합의하자고 할텐데.

정원: 그러니까. 그렇게 살려달라고 했으면서. 나는 누구한테 살려달라고 비는 것보다 2백만원 주는 게 더 쉬울 거 같은데.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 맘 같지 않나봐.

정선: 수치심이 별로 없나봐.

정원: 저 변호사님 진짜 멋지다.

정선: 그러게. 아예 생각도 못했어. 그런 방법은. 이제 전화올까봐 무서워 하는 일은 없어도 되겠네.

정원: 응.. 나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 올 때마다 평생 이러면 어쩌나, 형 확정되고 해코지하러 오면 어쩌나 계속 무서웠어. 만약 합의를 안해도, 본인이 선택한 거니까 해코지하러 올 것 같진 않아. 왠지.

정선: 언니, 진짜 고생 많았어. 교수님한테 너무 감사하다. 이런 분 소개해주셔서...

정원: 네가 고생 많았지. 맨날 나 데리러 버스 정류장에 나오느라고... 미안하고 고마워. 알지?

정선: 당연한 걸 가지고!! 저녁 뭐 먹을까?




Sisterhood

정원과 정선은 한 살 터울이다. 정원은 홍대, 정선은 이대를 다니고 있어서 마포구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다.


언제 불을 끌 것인지, 이불 빨래를 언제 할 것인지, 음식쓰레기를 누가 버릴 것인지 등으로 티격태격할 때도 있었지만. 정원이 가장 세상을 두려워했을 때 곁에 있어준 사람은 정선이었다. 스토커가 지켜보고 있기에 무서웠던 밤 길, 처음 가보는 경찰서, 처음 가보는 변호사 사무실, 그 과정에서 정선은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정원의 곁을 지켰다. 고맙다는 말도 새삼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런 동료의식은 같은 집에서 자란 여자 형제가 아니라면 키우기 어려운 감정인지도 모른다. 살면서 정선에게 고마운 순간은 무수히 있었지만, 이 때 만큼 정선의 의연한 태도와 존재감이 큰 위로가 된 적은 없었다.


어릴 때 정원과 정선은 꽤 많이 다투었다.


경희에게 '자매가 있는 것이 싫다'라고 불평을 하면, 경희는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언니나 여동생이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너희는 아마 모를거야. 남자 형제와는 나눌 수 없는 고민들이 살다 보면 많이 있어. 너희가 스무 살이 넘어가면, 분명히 내게 이야기할 날이 올거야. 언니를 낳아줘서, 동생을 낳아줘서 고맙다고.




경희의 말이 맞았다. 스토킹에 대해서 정원은 경희에게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대전에서 딸들의 건강과 안녕을 걱정하는 어머니에게 스토킹 당하고 있다는 말을 하면 얼마나 걱정을 하시겠는가. 학교를 휴학하고 대전에 내려오라는 것 말고는 도와주실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상황이 정말 심각해지지 않는다면, 가급적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부모에게 말할 수 없지만 자매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구나. 나도 정선이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온 몸을 다해서 막으려고 노력하겠지.


자매는 같은 여성이기에 신체적 ,정신적 위협에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서로 말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다. "네가 정신 차렸다면 그렇게 당하진 않았겠지"라는 비난도, "나라면 민. 형사고소를 해서 아주그냥 혼쭐을 내줬을 거야!"라는 무책임한 조언도 하지 않는다. 그저 곁에 같이 있어줄 뿐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언니가 이걸 혼자 겪을 일은 없어.




그 당시 정원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Image: https://pin.it/5eKo5V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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