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가고, 한 달의 시간이 흘렀다. 신기하게 철종으로부터 한 번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매일 아침, 철종의 여러 번호를 통한 문자 메시지로 잠을 깨곤 했었는데. 한 달 내내 모르는 번호로 전화도, 문자도 오지 않았다. 변호사로부터도 연락이 오지 않았다. 아마도 철종(또는 그의 변호사)이 연락을 취하지 않았나보다. 무슨 일이 있으면, 24시간 언제든 자기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었기에, 정원은 감사하고 든든한 마음만 가지고 있었다.
정원의 머릿 속엔 '돈 밝히는 사람'이라는 말이 계속 흘러 다녔다. 아무리 스스로 그 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비난의 목소리는 마음에 아로새겨지는 법이다.
'나보고 돈 밝히는 사람이라고? 200만원이면 얼마나 잘 봐준건데(변호사님이 그랬잖아!)!'
'사죄하고 싶다더니 200만원은 아까웠구나!'
이런 식의 생각들. 그를 미워하다가 그래도 돈을 요구한 것이 조금 품위가 없었나(?) 싶기도 하다가. 대체로 억울하고 화가 났다. 이미 합의안을 제시한 것을 물릴 수도 없고. 어차피 다 벌어진 일인데, 왜 그 사람의 지나가는 말에 이렇게 나 혼자 고통을 받고 있나. 너무 비생산적인 것이 아닌가 고민을 하다가, 정원은 문득 깨달았다.
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용서해주지 못해서 괴로워하는 마음보다 훨씬 가볍다.
양심 없는 가해자를 미워하는 것은 심플하다. 그리고 '밖'을 향한다. 하지만 자신에게 울면서 비는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탐탁치 않아 하는 것은 '안'을 향한 복합적 감정이다. 가해자를 확인하고 나서 오히려 더 괴로움을 겪던 정원은 이제 상황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철종이 어떤 사람인지도.
자신이 잘못을 하고도 언제든지 정원의 행실을 책잡을 수 있는 그 사람. 자신에게는 관대하고(회사 일이 힘들어서 스토킹을 한거야) 타인에게는 엄격한(나를 용서해줘야지. 돈을 밝히면 안되지) 그 사람에게 굳이 자신이 관대하게 대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7월의 어느 날, 마포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형사: 절차가 잘 진행되고 있어요. 대면조사도 했고요. 영수증이나 소셜미디어는 인정하지 않더군요. 하지만 지난 몇 달 간 통화기록이 너무 많아서, 자료는 충분합니다.
정원: 네. 조사할 때 변호사를 대동했나요?
형사: 아뇨, 혼자 왔던데요. 요즘은 정원씨에게 연락안하죠?
정원: 네. 제가 변호사를 통해서 합의를 제안했는데, 그 쪽에서 응답이 없었어요.
형사: 아 정말요? 합의해 줄 의향이 있었어요, 정원씨? 고생을 많이 해서 합의 의사가 없는 줄 알았어요.
정원: 저는 그런 부분을 잘 몰랐는데, 변호사님이 말씀을 해주셨었어요. 저희 쪽에서 2백만원 합의금을 제안했는데, 너무 많다고 했대요.
형사: 하! 그 사람 정말 바보군요. 이제 고생이 시작될텐데. 2백만원을 안받았다고요?
정원: 그런 것 같아요. ㅎㅎ
형사: 잘됐네요. 제대로 수사를 해서 끝까지 형을 받아내보죠.
정원: 정말 감사합니다. 형사님.
정원의 생활은 점차 정상으로 돌아왔다. 버스정류장에서 혼자 걸어서 집에 갔다. 고시반에서도 정원이 경찰서 등을 왔다갔다 하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기에, 위로의 말을 건네주는 사람이 많았다. '쌕쌕' 영수증의 출처는 밝혀지지 않았다. 소셜미디어에서 적대감을 품고 왔던 연락도, 왠지 철종일 것 같지 않았다.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그 시기에 영수증이나 이상한 이메일이나, 모두 멈추었다. 그럼 전부 철종이 한 짓일까?
그래도 일단 멈추었다는 것만으로, 정원은 웃을 수 있었다.
용서란 무엇일까
정원은 타인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으면서 자랐다. 정원의 엄마, 경희는 용서의 아이콘이다.
경희는 시어머니의 죄를 용서했고, 남편의 유약함을 용서했고, 남편이 죽은 후 아주버님들의 배신(경희의 남편이 죽은 후 경희네 몫의 유산을 가로챘다... 전형적인 이야기다)을 용서했다. 하느님은 죄를 고백하면 누구든 용서하시기 때문에, 죄가 많은 우리도 타인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런 경희의 인격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정원은 철종에게 분노했지만, 이내 그의 눈물 어린 사죄를 보는 것에 괴로움을 느꼈다. 너무나 용서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가 몇 달 동안, 자기보다 한참 어린 애를 죄책감 없이 심심풀이로 괴롭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원이 경찰을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몇 달 몇 년이 계속되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를 용서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리고 생각해보았다. 경희가 남편과 시댁 친척들을 용서한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 따뜻한 마음으로 용서를 했던 것이 아니라, 상황 상 용서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던 것이 아니었을까. 용서하지 못한다면 이혼을 해야 했는데, 아이 셋이 있으니 쉽지 않았다.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가 치매에 걸리고 난 후엔 그들을 미워해봐야 소용이 없게 되었다. 시댁 친척들이 유산을 챙겨간 것은 나쁜 일이지만, 경희는 어차피 친척들과 소송을 할 에너지도 없었다.
스물넷에 남편과 결혼해 십년 간 시집살이를 하다가, 세 아이를 키워야 할 책임을 갖게 된 경단녀 경희에게, '소송'은 너무 크고 버거운 벽처럼 느껴졌다. 3명의 아주버님과 올케들, 1명의 시누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남편이 죽기 전에도 이미 경희네 집을 착취하고 있던 터였고, 남편은 형들과 누나에게 한 마디도 제대로 못했다. 권력구조가 고착화된 상태에서, 혼자 된 경희가 그들을 상대하려면 그들보다 몇 배로 악바리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경희는 그렇게 될 수 없었다.
경희는 진심으로 그들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냥 넘어갔을 뿐.
그리고 그들도 용서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죽었으면 더 이상 우리 집 사람이 아닌데, 왜 유산을 탐을 내?'
'올케는 젊고 능력 좋다며. 애들 셋 잘 건사하면 되지. 우리 집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워.'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에 보면 엘리자베스의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가져가게 된 사촌 남동생('한정상속'이라는 제도로 인해 여성은 상속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아빠가 일찍 죽으면, 딸과 엄마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었다)이 '예의상 엘리자베스네 집에 주어야 할 재산'이 얼마일지 부인과 마차를 타고 가며 논의하는 장면이 나온다. 처음에는 1년에 5만 파운드를 주려고 했는데, 부인의 꼬드김('아니 네 여자가 시골에서 돈을 그렇게 많이 쓰겠어요!' '재산을 우리가 관리한다고는 하지만 이자도 얼마 안되고, 우리가 관리하는 데 써야 하는 비용도 커요!)에 넘어가 몇 시간이 지난 후에는 '하하, 1년에 5천 파운드를 주는 것만도 내가 참 관대한 것이지'라고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은 간사하다. '에이, 그건 그래도 너무하지' '이 정도면 많이 챙겨준 거지' '네가 좀 더 너그러이 봐줘야지' 이런 기준은 극히 상대적이고 자기방어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간사함이 큰 피해를 입히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권선징악'이라는 체계가 수 천 년에 걸쳐 만들어진 것이다.
이번 일을 통해 정원은 몇 가지 깨달음을 얻게 된다.
첫째, 용서를 당해서는 안 된다.
상대가 진심으로 용서를 빌지 않는데 혼자 용서한다면, 용서는 성립하지 않는다. 혼자 최대한 망각의 영역으로 넘길 뿐이다 (경희의 경우).
둘째, 용서는 신중해야 한다.
그 사람이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고 해도 지은 죄가 크다면, 그리고 그 죄를 타인에게 반복할 우려가 있다면, 함부로 용서를 해주어서는 안 된다. 도덕적 관념이 부족한 사람은 '대가'를 치러야, 진정한 '깨달음'을 얻을까 말까다.
셋째, 법은 권선징악을 구현하는 사회 시스템이다.
피해를 입으면 적극적으로 법의 보호를 구하자. 경찰이든, 변호사든. 도덕적 관념이 희미한 사람들은 법에 의해 객관적으로 두드려 맞아야만 비로소 수치심이라는 걸 느낀다. 그들에게 혼자 맞설 생각을 하지 말자.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면 더 없이 좋다. 같은 일을 겪는 피해자분들이 인권단체나, 법무부 마을 변호사 제도 등을 통해서라도 꼭 조력을 받을 수 있기를 간절희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