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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un 05. 2023

#2. 죽음

*등장인물

정원: 주인공

경희: 주인공의 엄마 




'우리 아빠는 아홉 살에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이제는 또박또박 쓰지만, 정원은 열아홉 살이 될 때까지 눈물 없이 저 문장을 쓰지 못했다. 


하필이면, 정원의 가족이 처음으로 오롯이 행복을 느끼던 때였다. 독한 시집살이를 10년 이상 견딘 정원의 어머니가 '시어머니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지 딱 6개월이 되었을 때, 하늘은 거짓말처럼 그녀의 남편을 데려가셨다. 정원은 기억한다. 어머니가 부엌에서 월남치마를 바닥에 사각사각스치며 '비둘기처럼 다정한~' 노래를 흥얼거리던 모습을. 


정원은 평생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엄마가 시어머니 때문에 우는 모습도 보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서울을 떠나서 대전으로 이사를 왔다. 처음으로 살아보는 49평 아파트. '여기는 운동장인지 집인지 모르겠어요!' '서울에서 보던 꽃들은 가짜였구나! 여기는 진짜 꽃밭이 있네!' 정원과 동생들은 대전을 곧바로 사랑하게 되었다. 





정원의 엄마, 경희는 세 남매를 낳았다. 

큰 딸, 작은 딸, 막내 아들. 

큰 딸 이전에 사실 딸이 하나 더 있었다. 뱃 속에서 아이가 자라 성별을 알게 되었을 때, 경희의 시어머니는 시누이와 함께 경희를 앉혀 놓고 '아기를 낳으려는 이기적인 생각을 하지 마라'고 이르셨다. 경희는 시누이의 유치원에서 '원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무상노동을 하고 있었다. 이렇게 가족의 비즈니스를 위해 중요한 시기에, 아들도 아닌 딸을 낳으려 하는 것은 이기적이라는 논리였다. 


경희가 분부 받은 내용을 전하자, 

서른 살이던 경희의 남편은 침묵했다. 

스물 다섯 살의 경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나중에 경희는 말했다. 

'그 당시에는 그런 일이 많았어.'


정원은 스물 아홉이 되었을 때 이 이야기의 파편들을 아주 희미하게 들을 수 있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언니가 있었다. 엄마는 언니를 잃어서 아주 슬퍼했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인간에 의한 의사결정이었는 줄은 몰랐다. 차마 자세한 내막을 물어볼 순 없었다. 


첫째를 잃고 1년 만에 정원이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경희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단 한 순간이라도 '아들이 아니어서 어쩌나'라고 생각했을리 없다. '목숨을 걸고 이 아이는 지킨다'라고 분명 생각했으리라. 정원은 한 치의 의심도 없다. 그리고 죽은 아빠는 용서할 수 없다. 



아이 셋은 내가 키울 수 있으니 이혼합시다.


정원의 가족이 갑자기 이사를 하게 된 배경에는, 순하디 순하던 경희의 이혼 선언이 있었다고 한다. 

경희는 시댁에서 요구하는 잡다한 일을 했지만, 그래도 경단녀였다. 아주버님의 유학비용을 대느라 모아 놓은 재산도 별로 없었다. 경희가 정원을 업고 가서 분양권을 당첨받았던 아파트 한 채가 전부였다. 그래도 대학 나온 여자, 그것도 이대 나온 여자인 경희는 어떻게든 남편 만큼은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경희가 남편을 버리는 결정에 왜 이르게 됐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칼부림을 했다는 설도 있고, 딸들에게 자꾸 욕을 해서였다는 설도 있다. 


정원은 걸음마를 할 때부터 할머니에게 '재수 없는 년' 소리를 들었다. 경희의 남편은 4남 1녀 중 막내이고 가장 가난했다. 시어머니는 하필 막내아들의 집에 살기를 택하셨다. 경희는 매일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아침을 준비했다. 입맛이 까다로운 시어머니는 메주로 만든 된장이 아니면 숟가락을 들지 않았다. 우는 딸들을 유아원에 놓아두고 시누이의 유치원으로 출근을 했다. 이 시절 정원의 별명은 '똥 냄새'였다.  


아주버님께 유학비를 보내드리고 나면, 가끔 김치를 담글 배추살 돈이 없기도 했다. 경희는 이웃집을 돌아다니며 김장을 돕고 김치를 얻어왔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어린 새댁이 고생이라며 한 포기씩 더 얹어주었다. 경희는 돌아와 메주를 쑤었다. 




경희가 이혼을 선언했을 때, 남편은 바로 어머니를 버리겠노라 선언했다고 한다. 왜 여자들은 끝까지 참은 후에야 모진 마음을 먹고, 남자들은 그 모진 마음을 직면하고 나서야 역할을 하겠다고 나서는 걸까.  


남편이 생각해낸 방법은 이사였다. 아무 연고도 없는, 신도시 대전으로 이사하자. 그러면 평생 서울에서만 생활한 엄마가 안 따라오겠지. 그러면 내가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할머니는 몇 달이 지난 후 짐을 싸서 내려오셨다. 큰 엄마들이랑은 도저히 못살겠다고 아홉 살짜리 정원에게 불평을 했다. 그래도 더 이상 정원을 '재수 없는 년'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어느 날 경희가 정원에게 말했다.


언젠가 이 넓은 아파트에 봉을 달고 싶어. 
그러면 거동이 불편한 외할머니가 봉을 붙잡고 걸어다니실 수 있을 거 아니야.
아빠가 약속했어. 할머니를 모신 기간 만큼, 외할머니도 모시고 살자고.


정원은 경희의 얼굴에서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경희의 남편은 대전에서 작은 수출업체를 차렸다. 대전엑스포 붐을 타고 사업도 금방 성장세를 띄었다. 아주버님이 한국에 교수로 임용되어 귀국하면서 유학자금을 대는 일도 중단되었다. 경희네 집은 더 이상 가난하지 않았다. 경희는 광목천을 오려서 커튼을 만들고, 한 번도 사보지 못한 까사미아 가구를 들였다. 정원은 밝고 하얗고 나무색이 가득한 집이 좋아서 매일 아침 학교에서 집까지 뛰어 왔다. 


얼리 어답터였던 경희의 남편은 모두가 삐삐를 쓰던 94년도에 휴대폰을 들고 다녔다. 정원은 매일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서 깨끗한 목소리를 듣고는 바로 끊었다. 아빠의 사무실에도 전화를 했다. 아빠가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하면, 친절한 비서 언니는 이따금씩 과자 선물상자를 집으로 보내주었다. 엄마는 절대 사주지 않는, 비싸고 달디 단 과자들이었다. 남편은 경희에게 롯데백화점의 화랑을 사주기로 약속했다. 경희는 아이들이 좀 더 자라면 대학원에 다니고 화랑 주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출 예정이었다. 


경희가 '비둘기처럼 다정한~'을 흥얼거리고, 정원이 쇼파에 앉아 있던 오후에 뉴스에서 재난재해가 나왔다. 


정원이 경희에게 물었다. 


"세상엔 저렇게 불행이 많은데, 왜 내 주변엔 불행이 없죠?" 

"넌 그렇게 행복한가 보구나." 경희가 웃었다. 



그리고 정원은 평생 그 말을 입 밖에 낸 것을 후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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