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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un 09. 2023

#7. 벌금형을 받아내다

권선징악 마지막 편

2010년의 긴 여름이 갔다. 무더위가 한 풀 꺾일 즈음, 마포경찰서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형사: 정원씨 정원씨! 정말 잘됐어요. X천만원 벌금형이 나왔습니다. 다행히 판사가 이 쪽 분야에 의식이 있는 분이었어요.

정원: 진짜요? 정말 잘됐네요!

형사: 네. 억울하다면서 항소할 거라고 하더군요. 항소해봐야 본인만 힘들 겁니다. 저도 사실 벌금 액수 보고 놀랐어요. 이 정도까지 나오는 경우는 잘 없는데 말이죠. 더 이상 저희도 신경 안써도 될 것 같습니다.

정원: 형사님이 자료를 열심히 만들어주셔서 가능했던 것 같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형사: 네, 사실 이번 일로 경찰서 내에서 표창도 받게 되었어요. 스토킹법 제정되고 이번이 가장 큰 케이스였을 거에요.

정원: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축하드려요 형사님. 제가 법원에 가는 일 없어도 되어서 너무 좋았어요. 그 사람 대면하는 거 저, 힘들었을 거에요.

형사: 네, 이런 사건은 거의 피해자 부르는 일 없어요.

정원: 그럼 이 사람 범죄 기록이 생기는 거에요..?

형사: 사실 성폭력특별법 관련 사건은 범죄기록 뿐 아니라 수사기록도 남아요. 찾기가 좀 어렵긴 한데, 고용주들이 찾으려면 찾을 수 있어서. 사실 이 분은 합의 거부했을 때부터 이미 기록이 남게 된 거에요.

정원: 아 그렇군요. 그러면 정말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겠네요.

형사: 그게 그렇게 걱정이 돼요?

정원: 걱정이 된다기 보단, 앙심을 품는 것이 무서워요.

형사: 걱정마세요. 그냥 응분의 대가를 치르는 거에요. 합의를 거절한 것도 그 쪽이잖아요. 정원씨는 할 만큼 했어요.

정원: 네....

형사: 정원씨, 부탁할 것이 있는데, 이번에 xx일보 기자가 이번 사건 취재하러 온다고 해요. 스토킹법에 대한 인식도 높일 겸해서요. 혹시 인터뷰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정원: 아..... 얼굴이 나오는 거에요?

형사: 네... 그렇긴 할 것 같아요. 아무래도 좀 어렵겠죠?

정원: 네, 당장은... 성폭력특별법과 제 이름이 같이 나오는 게 무섭고, 항소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섣불리 나서면 안될 것 같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모를까 아직은 제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이 조금 어려워요.

형사: 네! 그쪽이 너무 간곡하게 부탁해서 혹시나 싶어 여쭤본 거에요. 그리고 정원씨가 워낙 조리 있게 말도 잘하니까.. 다른 여성분들도 관심 갖고 볼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부담갖지 마세요.

정원: 네.. 제가 생각해보고 말씀 드릴게요.



결국 정원은 인터뷰에는 응하지 않았다.


대단한 일을 한 것이 아닌데 나서는 것도. 성범죄의 피해자로서 사회자에 전면 등장하는 것도 싫었다. 형사님은 아쉬워하셨지만, 아무래도 용기가 없었다. '성범죄의 여지를 준 사람' '돈 밝히는 사람'에서 갑자기 강단 있는 여성 인권운동가라도 되는 듯 당당하게 나서는 것이 어색하게 느꼈졌다. 세상의 시선이 한창 무섭던 20대였다. 



정원은 이제는 길에서 철종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밉고 원망스러운 감정도 없었고. 딱히 용서도 하지 않았다. 철종이 합의안을 받아들였어도 진심으로 용서하거나, 다시 친구가 되거나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철종도 그가 원해서 법의 심판을 받았고. 법이 정원을 대신해 그를 심판해주었으니.


아무런 마음의 찌꺼기가 남지 않았다.

정원은 그 맑은 상태가 좋았다.




상대를 응시하는 힘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5)


정원은 마네의 <올랭피아>를 좋아한다. 인상파의 시대를 연 대작 중 하나다. 당시 화가들은 우리나라로 치면 '국전'과 비슷한 '살롱전'을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살롱전에 입선하게 되면 귀족들로부터 줄줄이 초상화 외주가 들어와서 먹고 사는 걱정을 안해도 되었기 때문이다. <올랭피아>는 살롱전에서 떨어졌고, 떨어진 작품들끼리 모아서 전시를 하는 <낙선전>에 출품이 되었다. 그런데도 살롱전에 온 관객들이 이 작품을 보고 너무나 분노를 해서 거의 작품을 부술 뻔 했다고 한다.


관객들이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첫째는, 매춘부를 소재로 했다는 것. 흑인 하녀가 들고 있는 꽃다발은 부자 귀족 손님이 곧 올 것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누드 여성모델을 구하기 힘든 당시에 화가가 매춘부의 누드를 그리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보통은 여신으로 승화시켰다. 그런데 이 그림은 '올랭피아'라는 평범한 이름을 제목으로 삼고, '곧 매춘을 할 예정인 여성'을 대놓고 그리고 있다. 이들의 '손님'인 파리의 귀족 남성이 살롱전의 주된 스폰서일텐데. 감히 고객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그림을 출품하다니!


둘째는, 올랭피아가 관객을 전면으로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간의 여성누드 작품은 관능적인 몸을 관객에게 기꺼이 보여주면서도 살짝 부끄러운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미소를 띠고 살짝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부끄러운 듯 눈을 가리거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큐피드를 바라 보고 있거나. 이런 누드화의 정석을 보여주는 작품,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이 같은 해 살롱전에서 대상을 수상했었다.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5)


이 작품에서 여성은 지극히 이상화되어 있고, 또 수동적이다. 평평하고 사각형인 올랭피아의 몸과 달리 카바넬의 비너스는 굴곡지고 보드라운, 비누같은 몸을 지니고 있다. 눈을 가리고 있기에, 아무리 그녀의 몸을 바라보더라도 관객은 '움찔'하는 느낌을 갖지 않는다. 와! 여신이 탄생하고 천사들이 이를 축하하고 있구나! 이 얼마나 아름다운 여성성인가! 이를 객체화(Objectification)라고 한다.


하지만 마네의 올랭피아는 현실적인 이름과 현실적인 몸을 갖고 관객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다. 관객을 기쁘게 만들기 위해 미소 짓지도 않는다. 이로써 관객과 동등한 위치에 서는 것이다.


<목로주점>으로 잘 알려져 있는 에밀 졸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의 예술가들이 우리에게 비너스를 보여줄 때, 그들은 실물의 자연보다 더 아름답게 포장된 것을 보여줌으로써 거짓말을 합니다. 에두아르 마네는 스스로에게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는가,' '우리는 왜 진실을 말하지 않는가'를 질문합니다. 그는 우리에게 올랭피아를, 우리가 길거리에서 만나는 우리 시대의 평범한 여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When our artists give us Venuses, they correct nature, they lie. Édouard Manet asked himself why lie, why not tell the truth; he introduced us to Olympia, this fille of our time, whom you meet on the sidewalks.)



합의금을 요구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거니 네가 생각해보고 말해줘'라고 할 수 있는 그 적극성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스토킹을 당하고 살려 달라는 문자 공격을 당할  때 정원은 수동적 인격체였다. 그가 정원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고 있으니, 겉보기엔 정원이 강자의 위치였던 것 같지만 사실은 내내 약자였던 것이다. 정원이 '적극적인 주체'로 도약하자마자! 그는 곧바로 정원에게 돈 밝히는 사람이다, 자기에게 협박을 한다며 '무엄하다!'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나서야 정원은 '말로만 하는 사과'의 뒤에 숨겨진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되었고, 멀쩡한 사람(?) 인생을 망친다는 죄책감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었다.


'당신이 시작했고, 당신이 원한거야.'


이 당연한 진리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눈물이 필요했던가. 왜 용서하지 못하느냐, 육체적 위해를 입은 것도 아니지 않냐, 너를 좋아해서 그랬다는데 그렇게 문제니. 어디부터가 실제로 들은 이야기인지, 어디부터가 정원의 머릿 속에서 스스로 되뇌인 이야기인지 불분명했지만. 정원은 메아리치는 그 소리들을 멈추기 위해 여동생, 교수님, 변호사, 경찰 등 공식적이고 비공식적인, 수 많은 도움을 얻어야 했다.


세상은 여성이 수동적인 객체로서 존재할 때 훨씬 관대하다. '피해자가 어느 정도 협조하지 않았다면, 강제로 청바지를 벗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라던 판결을 하던 것이 얼마 안되었기에. 많은 이들이 타인을 열심히 용서하고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그렇게 밖에 할 줄 모르니까. 그렇게 배웠으니까.




정원은 이제 용서를 남발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다면 조용히 공식적인 창구로 넘겨서, 감정 소모를 최소화하기로 한다.

사회가 '그렇더라'고 하는 것을 덮어두고 믿지 않고 하나라도 더 스스로 공부하기로 한다.


그리고 언젠가는 같은 처지에 놓인 이에게,

정원과 같이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던 행운이 없던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권선징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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