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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Jun 22. 2023

새벽 라면에 감사 인사를 드리다

박연준 시인의 글쓰기를 참 좋아한다.


이 분을 처음 만난 것은 <서로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라는 책이었다. 사당동의 독립 책방에서 사장님 추천을 받아 구입했다가, 아름다운 문체와 독특한 구성에 감명을 받아 주변에 5권 정도는 선물한 것 같다.


박연준 시인과 그의 남편은 둘 다 출판인이다. 오랜 동거 끝에 새삼스레 결혼식을 하는 것이 어색해서, 글 쓰는 부부 답게 책으로 결혼사실을 알리기로 했다고 한다. 시드니에서 한 달 살기를 하면서 연애 기간을 돌아보고 투닥거리며 싸우고 앞으로의 사랑을 다짐하는 두 사람의 '따로 또 같이' 에세이.


책에 따르면 남자가 훨씬 나이가 많고 출판계에서 뼈가 굵다고 한다. 여자분은 젊은 시인이었다. 미술학원 선생님이 고등학생과 연애를 할 때처럼, 둘이 처음만날 때 여자분은 동경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연애와 결혼 모두 부인이 밀어붙인 결과였다.


남편은 소싯적 나쁜 남자 답게, 이런 저런 본인의 컴플렉스를 이유로, 왜 누군가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운지 이유를 꽤 오랜 기간 늘어놓았다고 한다. 여자는 남자의 방어적인 태도를 모두 참아내고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한참 연애를 한 후에도 그 남자의 천재성을 동경하며, 그의 부족한 배려심에 상처를 입는다.


여자분의 파트를 다 읽을 때쯤엔 남자분이 아주 미웠다. 그래서 '도대체 얼마나 천재길래?' 비아냥거리는 마음으로 남자분의 파트를 읽었다. 여자의 언어는 생동감이 있었다. 한편 남자의 언어는 박식하고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렇게 나이가 많은데도 이렇게 젠체한단 말인가. 하긴, 이런 남자는 20대엔 더 젠체가 심했겠지. 쳇. 이런 남자가 뭐가 그렇게 좋다는 거지!


이 책이 추천사를 써주던 지인들도 이 커플에 대해 불안을 드러내고 있었다. 연준이 눈에 눈물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에욧!!! 천재적인 기획력으로 유명한 김민정 시인이자 문학기획자가 책표지에 이런 식의 문구를 남겨놓았었다. 그들의 사랑은 날카롭고 뜨거운 것 같았다. 가까워지면 피가 날 걸 알면서도 서로에게 얼굴을 묻는 고슴도치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최근에 출간된 박연준 시인의 새 에세이집, <고요한 포옹>. 더 이상 남편은 대단하거나 위세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함께 고양이를 돌보는 집사2가 되어 있다. 고양이처럼 느리게 꿈벅꿈벅 눈을 깜빡이는 중년의 남성이 머릿 속에 그려진다.


그녀의 남편에 대한 갈망은 검붉은 빛으로 출렁이는 와인 같았는데, 지금은 보이차처럼 함께 노화를 맞이하는 사이가 된 듯 하다. 연하인 내 남편도, 나의 노화를 애도하곤 하는데, 이 분도 노화가 왜 죽음보다 슬픈 것인지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이 많다. 그것도 사랑의 한 갈래겠지!



오늘은 잠을 안 잤다. 노력해도 잠이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럽여행 비행기표를 알아보다가, 직장을 제안하는 이메일을 보고 식겁을 했다가, 아침 7시에 주섬주섬 일어나 '열라면'을 끓였다. 남편이 질색팔색하는 나의 습관이다.



"도대체 아침부터 라면을 왜 먹는거야? 속을 다 버릴 작정이야?"


회식이 길어진 후 새벽 4시에 혼자 24시간 순대국 집에 앉아 순대국 먹기를 그렇게 좋아했었다. 요즘도 밤이 되면 탄수화물이 당기는데, 살이 찔까봐 못 먹겠다. 그러다가 이렇게 날밤을 샌 날에는, 아침에 탄수화물 먹는 건 괜찮으니까. 그리고 밤 새서 피곤하니까. 나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다.


온 몸이 예민한 편인 남편은 잠을 못자면 맥을 못 춘다. 그래서 잠들기에 실패한 날에는 아침에라도 2-3시간 어떻게든 자보려고 노력한다. 한편 나는 기왕 못 잔 거 깨어 있다가 그 다음날부터 불현듯 아침형 인간으로 거듭나는 계기로 이용해보려고 노린다. 아침형 인간은 하루 아침에 될 수 없음에도...


그래도 감사한 것은 이 나이가 되도록 날밤을 새도 튼튼하다는 것. 아침 7시에 열라면을 먹어도 속이 든든하다는 것. 이렇게 미국 땅에서 한국 종이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시부모님이 들고와주셨다). 박연준 시인이 여전히 팔팔하다는 것. 박연준 시인의 글 위에서 오늘 낮에 읽던 버지니아 울프가 인용된 것을 보고 '책의 길'을 짜릿하게 느꼈다는 것이다.




<조심하라고 말하며 걸었다>를 읽을 때는 내 인생에 결혼이 없을 줄 알았다. 또 그 책에서 결혼이 그다지 좋아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넉넉해진 마음의, 편안하게 자기 색의 글을 계속 찾아가는 박연준 시인을 보니. 이 분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지켜봐주는 반려자를 잘 만났구나 싶다.


라면 먹지 말라는 잔소리도 그러고보니 '조심하라고 말하며 걷는' 것과 비슷하구나. 불편하지만 따뜻한 이런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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