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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Aug 09. 2023

공무원, 복직이냐 퇴직이냐  

"사무관님. 더 이상 휴직 연장이 불가능합니다. 혹시 9월 6일에 세종 발령을 해도 괜찮을까요?" 


어제 문자가 왔다. 

쿵 하고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사실 3+2년이 휴직 가능 기간이라고 알고 있었어서, 1년 더 연장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연장이 안된다고? 확인해보니, 최초에 내가 휴직신청을 할 때 2년으로 신청을 했어서 최초 신청연수가 1년이든 2년이든 3년이든 그에 더해서 +2년만 추가 휴직이 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자세히 해 준 사람은 없었다. 나는 처음부터 3년 유학을 계획했으나 3년 휴직은 결재받기 어려울 것 같다기에, 2년을 신청했었다. 그리고 위의 내용은, 공무원임용령이나 공무원법이 아니라, 인사과 담당자들이 읽는 Q&A 책자에 나와 있는 것으로 나로서는 접근이 불가능한 정보였다. 지난 해에 휴직 연장을 할 때도 2024년 졸업으로 향후 계획을 냈더니, '4년까지는 어떻게 해보겠으나 5년은 너무 이례적이라 쉽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을 해주었다. 그래서 나는 '법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갖고 있지 않았다. 한 번도 정확한 정보를 주지 않다가 이제 와서 규정을 내미는 담당자들이 원망스럽기도 했으나, 어차피 문제를 삼아봐야 감정만 상하고 얻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복직이든 퇴직이든 결정을 해야 한다. 


그것도 일주일 내로. 




예전에 유학을 올지 말지 깊은 고민을 하고 있던 때가 기억난다. 

장학금을 받고 원서를 쓰면서도 거의 6개월 간, 이 길이 맞나, 실수하는 것이 아닌가, 좌고우면을 했었다. 그 때 50명도 넘는 주변 사람들에게 질문을 했다. 나를 잘 아는 친구들에게, 지혜와 경험이 많은 선배들에게. 


어느 일요일 오후, 충북대에서 학회를 마치고 원로 교수님을 오송역까지 태워드리고 있었다. 나는 세종시에서 근무하며 그 근방에 살고 있었기에 운전을 해서 왔었고, 가는 길에 선생님을 모셔드리라 명을 받았던 것이다. 그 날도 내 머릿 속을 가득채우고 있던 '유학을 가야 하오리까' 질문을 했고, 선생님께서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오송역 안으로 따라 들어오라고 하셨다. 


우리는 작은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장학금의 제한사항(JD과정에 진학하지 못한다는 것), 향후 승진에서의 불이익, 결혼 등의 불투명함에 대해 차근차근 말씀을 드렸다. 선생님께서는 한참을 들으시더니, 개구장이 같은 웃음을 띠고 말씀하셨다. 


"그런 결정은 새벽에 화장실 갔다가 나오면서 하는거야." 



선생님께서는 어린 나이에 판사로 임용되셨다가 독일에서 박사 유학을 하셨다. 유학 생활을 하다가 판사직으로 돌아가서 평생 법관으로 근무할 생각이셨다고 한다. 그런데 박사 유학 후 얼마되지 않아, 법원에서 휴직 연장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으셨단다. 휴직 연장의 근거가 충분히 있었지만, 당시 인사를 담당하시던 분이 젊은 판사들이 해외에서 오래 머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서 휴직 연장을 해주지 않기로 기조를 정했었다는 것이다. 박사를 마치려면 아직 몇 년이 더 필요한데, 공부는 너무 재밌고, 함께 따라온 가족들을 건사하려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이 걱정되고. 어떡하나 어떡하나 고민을 하다가, 새벽에 화장실에 갔다가 나오면서 불현듯 떠올리셨다고 한다.


'난 공부가 더 하고 싶다.' 



판사를 그만두면 한국에 돌아와서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당시 로스쿨도 없던 때라 젊은 나이에 교수 임용이 가능할지 걱정되는 것이 많았지만, '젊을 때 하고 싶은 것 하자.'라는 쪽으로 생각이 기우셨다고 한다. 다만 가족들이 경제적 궁핍 등 희생을 감내해야 하기에, 사모님에게 어떻게 생각하는지 여쭤보셨고, 놀랍게도 사모님도 같은 생각이셨다고. 


"나는 어떻게든 사니까 당신 하고 싶은 것 실컷 하세요." 


젊은 나이에 판사를 중간에 그만두는 것이 흔치 않던 시절, 수입이 변변찮은 상황에서 사모님께서 그렇게 흔쾌히 지지해준 것을 지금도 고마워하신다고 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도 수십만원짜리 원서를 사서 모으시고, 아침에 잠을 깨기 위해 불어나 프랑스어책을 보신다고 한다. 이런 분이니 사모님께서도 남편의 행복에서 '공부'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아보셨던 것이리라. 



그래서 나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셨다. 


유학을 가든 가지 않든, 가보지 않은 길은 어차피 모르는 것이다. 둘 중의 어느 하나가 완벽히 우월한 선택지였다면, 네가 지금처럼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두 선택지가 고만고만하면, 하나하나 어떤 게 나에게 불리하고 유리한지 꼼꼼히 따져도 어차피 답이 안나온다. 그러니 모두가 잠든 시간에 화장실에 고요히 앉아 있다가 불현듯 '그래, 나는 이렇게 해야 겠다. 이유는? 그냥 내가 하고 싶으니까.' 이렇게 결정을 할 수밖에 없고 그 결정에 충실히 따르면 된다. 



선생님은 우리 학계에서 천재적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분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분께서 이렇게 '직감에 따른 결정'을 한다니? 특히 유불리가 모호하고 인생에 영향이 큰 문제일 수록 더욱 더 직감을 믿으신다니!


그 때 깜짝 놀랐던 마음을 아직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인생에서 크고 작은 결정을 할 때마다 늦은 밤 모두가 잠든 시간에 내 마음 속에서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했다. 


결혼을 할 때도. 

전체 학교 단위 학생회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할 때도. 

동기들이 모두 승진을 했을 때 복직을 하지 않고 휴직을 연장할 때도. 

법학과에서 강의를 하는 대신, 컴퓨터사이언스 학과 사람들과 일을 하기로 했을 때도.


언젠가부터 누군가에게 묻지 않게 되었다. 

미국에 있으면서, 시시콜콜한 걸 물을 사람을 찾지 못했던 탓도 있다. 한국 사람들에게 미국에서의 고려사항을 주구장창 설명하는 것도 미안했다.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믿고 그 결정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훈련이 되어서 이제는 동전을 뒤집듯이 즉각적으로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만두자. 



이번에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랬다. 


그 '즉각적임'에 조금 놀랐다. 공직에 대한 나의 복잡한 마음.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돌아갈 곳'으로 분명히 생각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2024년에 어떻게 할지를 생각하면 50:50의 마음이었지만. 2023년 9월에 어떻게 할지를 결정하라고 하니 99:1의 마음이 되었다. 10월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천지다. 마무리하지 못하더라도 누가 죽이지는 않겠지만, 프로젝트 하나하나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이어서 꼭 마무리를 짓고 싶다. 



나의 어머니와 시부모님은 슬퍼하실 것이다. 내가 공직에서 과장, 국장으로 승진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셨으니. 한국에서 내가 좋아했던 교수님들도, 2011년 행시 합격파티에 와주었던 모든 사람들이 안타까워할 것이다. 


20대 때 미친 사람처럼 공부했던 시간들이 아쉽지만.

동료들과 선후배들과 술 한 잔 기울이며 회포를 풀던 것이 사무치게 그립지만. 

다들 어떻게든 20년을 채우는 것을 보면 연금이라는 것이 중요한가보다 싶지만... 

"정 사무관처럼 마음이 열린 사람이 공직에 있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알아? 절대 그만 두어서는 안 돼. 더럽고 치사해도 꼭 버텨서 끝까지 올라가." 남편은 이기적 동기에서 한 말이라며 내 선택에 염두에 두지 말라고 하지만, 나에게는 앞으로 나아갈 힘이 되었던, 예술인과 이해관계자 분들의 따뜻한 말들. 


나는 한국의 공직생활이 잘 맞았던 것 같다. 

외부 사람들을 만나서 현장을 배우는 일이 재밌었다. 업무강도가 높았지만 참을만 했고. 비합리적인 일이 많이 있었지만, 상사에게도 무섭게 날을 세우는 나를 그럭저럭 받아주는 조직적 관대함이 있어서 그래도 괜찮았다. 다른 사람들보다 임기응변 능력이 좋은 편이고 잘 떨지 않는 성격이어서, 국회나 예산 당국이나 언론과 소통할 때 기죽지 않았다. 누구보다 빠릿빠릿하게 정보를 정리해서 갖다 주어서, 그 사람들이 나에게 기댈 수 있게 만들었었다. 그렇게 '갑'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었다.



학자로서의 삶은 (나중에 더 두고봐야 공정한 판단이 가능하겠지만) 영 잘 맞지 않는 것 같다. 

인간을 좋아하는 나는, 오롯이 책상에 앉아 글을 쓰는 시간이 괴롭다. 약간 ADHD 성향이 있어서, 공직 생활을 할 때는 전화 받으면서 엑셀작업 하는 일을 잘 했었지만, 5시간 내내 흰 화면에 내 글씨를 욱여나가는 것은 텁텁한 모래를 토해내는 기분이다. 학자들 간에 기대수준이 정립되지 않은 채로 협업을 하는 과정이 어색하다. 학부생 때 팀플을 영원히 하는 기분이랄까. 미국 학계 내의 네트워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정말 정말 알 수가 없고. 설령 어딘가에 자리를 찾더라도 내내 인공위성처럼 떠도는 기분일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난 공부를 더 해야겠다. 

이제야 비로소 얼굴을 찡그리지 않고 영어 법학 논문을 쓸 수 있게 되었는데. 

다시 휴먼명조 15를 쓰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 영 아쉽게 느껴진다. 쓰고 싶은 논문이 최소한 5개는 더 있는걸! 그렇게 깊고 느린 지식을 쌓아가는 일을 아직 조금 더, 아마도 45세까지는 하고 싶다. 여러 다른 방법으로 휴직을 어떻게든 늘려보는 방안도 있겠지만, 확실히 돌아갈 것도 아닌데 조직에 내내 무리를 끼치는 것도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브런치에서 글을 쓰면서, 언젠가는 글 만으로 벌어 먹는 직업을 갖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 과정에서 나의 팀도 생기고, 믿을 수 있는 사람들도 생기고, 나의 지식과 체력과 임기응변 능력(영어로는 매우 떨어지지만 ㅎㅎ)을 필요로 하는 조직이 생기기를. 



틀린 결정일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의 고독하고 비루하고 이따금 기쁨이 찾아오는 삶을 지속하는 것이 

오늘의 내가 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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