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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Sep 18. 2023

정리는 처언처언히

 


같은 아파트에 나보다 한 살 많던 언니가 있었다. 그 언니는 유난히 정리를 잘하고, 어린 나이에도 혼자 책상, 책장, 옷장을 번쩍번쩍 들어서 방 구조를 주기적으로 바꾸었다.


하루는 양말이 구멍나서 언니에게 양말을 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 언니가 "첫 번째 서랍 열어봐."라고 해서 열었더니 맙소사. 돌돌 말린 양말이 200ml 우유곽 하나하나에 각각 놓여있는 것이 아닌가. 백화점 진열대 같았다.


"언니 , 이거 우유곽을 다 자른거야? 어떻게 했어??"

"응. 우유곽 잘라서 그냥 서랍장 크기에 맞춰서 넣어놓은거야. 그렇게 하면 양말끼리 안 섞이고 좋잖아."


나는 장난감을 장난감 통에 넣는 것도 힘든데.. 양말을 백화점처럼 가지런히 말아서 넣어놓는 것도 그렇고... 우유곽을 하나하나 자르는 정성도 그렇고... 어떻게 이렇게 정리에 재능이 있을 수 있을까?


당시 그 언니는 열 살이었다. 우리가 같은 아파트에 살던 8년 동안 언니의 정리력은 계속 상승했다. 언니를 제외하면 나머지 가족들은 그다지 정리나 살림에 신경쓰는 것 같지 않았다. 그래도 언니는 자기 방을 홀로 치우고 구조를 바꾸고 또 치웠다.


우리 엄마도 정리를 잘 하는 축에 속했다. 엄마는 먼지에 예민해서 항상 손에 행주나 걸레를 들고 있었다. "먼지를 쌓아두면 먼지를 다 먹는거야." 엄마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깔끔한 집안에서 더러운 아이로 태어난 나.

평범한 집안에서 깔끔이로 태어난 언니.



친구집에 놀러갔을 때 친구가 배낭을 열어 그 안의 물건을, 옷 핀 하나, 볼펜 하나까지 다 꺼내서 박스 안에 넣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매일 이렇게 해?"라고 물으니, "당연하지. 난 가방은 전부 빈 채로 옷장 안에 넣어두는데? 이 가방 저 가방에 물건이 남아있으면 찾기가 어렵잖아?"라고 답했다. "어떻게 저 조그만 박스 안에 가방 속의 물건이 다 들어가?"라고 하니, "큰 건 제자리에 갖다 놓고 작은 것들, 열쇠나 카드나 머리 끈이나, 뭐 그런 잡동사니들만 넣어놓는거지. 난 집에 오저마자 가방 정리하는 게 너무 당연한데, 넌 안해?" "응...." 부끄럽게 대답했다.


'난 이 가방 저 가방에 막 대충 넣어놓고 한참 찾아.'







 나는 그렇게 '정리에 재능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리고 죽지 않을 만큼만 정리를 했다. 어른이 되면서 혼자 살 때는 벌레가 생기지 않을 만큼만. 룸메가 있을 때는 룸메에게 욕먹지 않을 만큼만 치웠다. 내 개인공간은 최대한 대충대충, 공용공간은 최대한 깨끗이.


폴더 정리 같은 것도 잘할 리가 없다. 내 구글드라이브는.... 내가 죽은 후에 잊혀질 권리를 행사하지 않아도 괜찮을 정도이다. 어차피 아무도 파일을 못찾을테니. 다만 직장에 다닐 때는 내가 폴더 정리를 안해놓으면, 후임자가 파일을 못찾기 때문에 매일매일 파일을 지우고 파일명, 폴더명을 정리했다.


그렇게 더러운 자아를 꽁꽁 숨기고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왔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나니, 개인공간과 공용공간의 구분이 없어졌다. 남편은 남자치고는 깔끔한 성격이다. 머리를 감지 않고는 베개에 머리를 대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새 수건을 사서 깨끗한 수건으로 새해를 시작한다.


아마도 그에게 나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시애틀에선 하루종일 요리를 하고 앉아 있어야 하니 끊임 없이 그릇이 쌓였다. 하루에 두 번씩 식기세척기를 돌리지 않으면 싱크대가 지저분해진다. 게다가 코비드 이후 나도 남편도 재택 근무를 하고 있으니, 커피 한 잔, 과자 한 봉지, 읽다가 던진 책 한 권이 전부 치울 거리가 된다. 한국에서는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사무실 청소 직원이 내 일을 다 대신해주고 있었구나...!


남편은 내게 뭐라 하지 않고 묵묵히 집안일을 했지만. 그도 나도 바쁠 땐 하루이틀 만에 작은 집이 쑥대밭이 되었다. 세탁기, 청소기, 로봇청소기가 인간의 일을 대신해주고 있는데, 어쩌면 이렇게도 할 일이 많은 것인지. 더러워지는 집안을 보며 스트레스를 받다가, 30년 이상 정리와 이어 온 적대적 관계를 조정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집안일 해 줄 분을 고용할 만큼 돈을 많이 벌기도 어렵고(명분도 없고), 내가 꿈꿨던 옷을 집고 개고 넣어주는 로봇은 빠른 시일 내에 나오지 않을 것 같다. 게다가 당분간은 재택과 요리로 점철된 일상을 살아야 할 것 같으니 말이다. 살려면 정리를 해야 하고, 기껏 할거면 싫어해서는 안 된다. 불행해지니까.





내가 좋아하는 Jenn Im, Julie Cho, Michelle Choi 같은 유튜버들은 모두 정리를 잘한다. 특히 미쉘 최는 집이 정말 정말 깔끔. 이사를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지, 뉴욕에서 점점 더 크고 멋진 집으로 이사를 가고 있다. 이사해서 짐 풀고 정리하고, 사람들은 이쁜 사람이 이쁜 집을 만들어가는 것을 뿌듯하게 보고. 구독자가 늘어나서 수입이 많아지니 더 이쁜 집에 들어가고. 선순환의 구조이다. 그 사람들의 가지런함을 보고 있으면 보송보송한 기분이 든다.


그러다가 문득, 그 사람들이 정리에 쓰는 시간이 꽤 많아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정리는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었던가?


건강해지고 싶으면 하루에 한 시간 운동을 해야 하듯이, 정리도 그만큼 '시간을 들이면' 되는 것인가???


이 당연한 진리를 왜 난 아직 깨닫지 못했던 것인가?



이불 정리를 '잘' 하는 법을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불 정리를 '하고' 창고를 '효율화'할 것이 아니라 그냥 '30분 동안 버릴 것을 버리고.' 짬이 날 때 2분씩, 10분씩 '뭔가를' '제 자리에 놓으면' 정리가 되는 것이었구나.



정리를 '잘' 해야 한다는 압박을 벗고 나니까.

그냥 아주 비효율적으로 '정리'라는 항목에 '시간만' 들인다고 생각을 하니, 요상하게도 정리가 할 만해졌다. 더 이상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업이 아니었다.



난 공부도 재능이 아니라 노력이라고 믿는데, 왜 유독 정리에 있어서만 '자질론'을 신봉해왔는지 모르겠다. 아마 정리를 싫어하는 나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질이 없다'는 식으로 퉁치려고 한지도?


정리도 시간 쌓기라고 생각하니, 더 이상 도망갈 곳이 없어저서 이제는 돌쇠처럼 묵묵히 명상하는 마음으로 처언처언히 처언처언히 정리에 시간을 쏟는다. 신바람이 나는 것은 아니고. 잘해야 한다는 부담이 없으니 스트레스를 좀 덜 받는다. 누군가 우리 남편에게 묻는다면, 여전히 갈 길이 멀다고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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