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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뷰의 정원 Sep 23. 2023

부러운 정치, 우리도 가능할까

김황식 저,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 1>

유튜브를 보면서 'passive income'을 만든다는 영특한 사람들에게 감탄을 하다가, 나는 어떻게 돈을 못 벌어보나 궁리를 하다가, 결국은 돈 한 푼 벌어주지 않는 독서로 돌아온다.

책 안에 숨어 있을 때는 안전하다.

남편도 내가 책을 읽을 땐 귀찮게 하지 않는다.


오랜만에 <리디셀렉트>를 켰다.

정책이나 정치에 관한 책은 (공부 생각이 나서) 잘 안 읽으려고 하지만,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 이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지은이가 '김황식'? 전 총리님이 아닌가? 총리를 그만둔 후에 다른 나라의 총리를 깊게 공부해서 책을 쓰셨다니.



글쓰는 것은 꽤 힘든 일이다. 여러 요직을 두루 거친 후 은퇴한 대가들이 구술로 다른 사람이 받아 적은 책을 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내가 내 손으로 쓰는 게 너무 힘드니까! 그나마 그런 에너지를 들일만한 건덕지도 할아버지도 할머니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자기 이야기'일 터이다. 그런데 김황식 전 총리께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긴 호흡으로 쓰셨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웠다.


아마도 너무너무 부러우셨던 것 같다. 왜, 독일의 정치인은 나라의 어른으로 존경을 받을까. 왜 강대강의 죽고 죽이는 정쟁에 빠지지 않고, 너른 공익을 쫓는 협치를 해내는 것일까. 본인이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얼마나 안타까움이 많았기에, 다른 나라의 총리들의 족적을 쫓아 볼 생각을 하신 것일까. 정말 대단한 지혜와 겸손함, 그리고 열정이다.





독일의 정치 시스템은 우리나라와 다르다.


머릿 속으로 상상했던 제도를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처럼 선거구 의원과 정당 비례대표 의원 양측으로 표를 던진다. 그런데 최종 하원 의석수는 비례대표 득표수로 결정이 된다. 만약 선거구 선출 의원이 50명인데 비례대표 의석수가 5%밖에 되지 않는다면? 50명은 모두 당선처리되고, 나머지 정당도 그에 비례해서 의석수를 늘려준다고 한다. 그래서 매 선거마다 의원 수가 달라진다고 한다.


하나의 정당이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하면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한다. 지금까지 독일 역사 상 연립정부가 아닌 적이 없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기민당 43% 사민당 40% 자민당 11% 그 밖의 소수정당 6%라고 가정해보자. (이 책에 따르면 5% 미만의 표를 받는 소수정당은 의석수를 아예 받지 못한다고 한다. 처음에는 소수정당 탄압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읽다보니 조금 생각이 바뀌었다.)


이 경우 어느 정당도 단독으로 총리를 선출할 수 없다. 만약 사민당이 자민당을 설득한다면 51%가 되므로 연립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면, 기민당은 43%나 획득했지만 연립정부 내각(우리나라의 장관들)에 참여하지 못한 채 야당으로 남게 된다. 반면, 자민당은 11%밖에 못 받았지만 4-5명 장관직을 차지할 수 있고, 특히 명망 있는 인사가 있을 경우 국방, 경제, 외교 등 주요 부서에 장관을 만들 수도 있다. 자민당은 이렇게 '캐스팅보트' 역할 덕에 실제 득표수보다 많은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정치신인이나 소수정당 출신의 사람들은 이렇게 연립 정부의 '파트너'로서 내각 경험을 쌓으면서 리더십을 기르게 된다. 현재 1권에 나오는 아데나워, 에드하르트, 키싱저, 빌리 블란트는 모두 이런 길을 밟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대통령 선거와 총선이 모두 중요하지만, 독일에서는 총선이 가장 중요하다. 총선 결과에 따라 자연스럽게 총리가 바뀌기 때문이다. 만약 현 정부의 성과가 좋다면 총선에서 승리해 또 다수당이 될 수 있으므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기존 총리가 계속 연임을 하게 된다. 그렇게 10년 이상 재임한 총리가 적지 않다. 전후 서독의 초대 총리인 아데나워는 72세에 총리직에 도전해 주변 사람들에게 1~2년 정도만 하겠다고 말을 하고 다녔으나, 자그마치 14년이나 재임을 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16년...  



총선이 있기 전이라도 연립정부를 구성한 정당 사이에 의가 상하면 식물국회가 된다. 예를 들어, 자민당이 더 이상 사민당의 방침에 동조하지 않을 경우 40% 의석만으로는 예산이나 법률을 통과시킬 수 없으므로, 이 때는 내각이 해산된다. 총리가 의회에 내각 불신임을 요청하고('저희를 불신임해주세요'라니 이상하지 않은가! 이를 '건설적 불신임'이라 부른다고 한다.) 의회가 불신임하면 총선이 다시 치러진다. 선거를 예상보다 빨리 치르는 건 힘든 일이지만, 정치인들이 교착 상태에 빠졌을 때 국민의 의중을 다시 묻는 것이 차라리 합리적인 면이 있는 것도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흡사 위인전을 읽는듯, 각 총리들의 아름다운 리더십과 흥망성쇠에 탄복하기도 했지만. 직업병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머릿 속으로는 우리나라와 독일의 제도가 어떻게 다른지,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사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그리고 있었다. 책의 내용에 나의 상상을 보태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는 듯하다.



1. 행정기관 인사권이 분산되어 있다. 국민으로부터 직접 선출받은 대통령 1인이 수만 명의 정부 인사, 공공기관 인사를 단번에 하는 것이 아니라, 당에서 오래 활동한 당 대표급의 사람이 인사를 하게 되므로 당내 의견을 수렴해 인사를 할 수밖에 없다. 연립정부를 구성할 경우 '파트너 정당'의 추천인사도 포함을 시켜야 한다.


2. 국무회의가 곧 국회다. 내각과 의회가 분리되어 있기는 하지만, 의회 다수석을 차지한 정당의 대표자가 내각이 되므로, 내각에서 결정된 사항이 국회에서 무산될 가능성이 훨씬 적다. 우리나라는 여소야대 상황도 흔하고, 여대야소에서도 대통령이 당에 대한 장악력이 없을 경우 여당이 야당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우리나라는 행정부에 대한 '감시' 기능이 주된 국회의 역할 중 하나로 인지되어 있고, 장관들이 반드시 정당 출신도 아니기 때문에 행정부의 수반과 국회가 끈끈히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적다. 오히려 대통령이나 장관이 정당의 입장을 강하게 대변하는 것이 다소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노무현 대통령 때는 특정 정당의 편을 드는 것이 탄핵 사유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다).


3. 스타성 정치인의 가능성이 적다. 유대인 기념비 앞에서 무릎 꿇는 사진으로 잘 알려져 있는 빌리 브란트가 이 책의 1권에서는 그래도 가장 스타성 정치인일 것이다. 하지만 이 분 또한 아데나워 시절의 전후 독일 시절부터 꾸준히 이 책에 등장한다. 총리가 되기 전 수십년 간 서베를린 시의 젊은 시장으로, 기자로, 하원 의원으로, 내각의 일원(외무장관)으로, 끊임 없이 '트레이닝'을 받은 후에 비로소 총리가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유럽에서 28세의 장관이 나왔다고 가끔 뉴스가 되지만, 어쩌면 장관직의 무게감이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 장관을 '정치 트레이닝' 자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독일에서는 장관 개인이 아무리 인기가 많아도 정당에서 신임을 잃게 되면, 영영 총리가 될 수 없을 뿐더러 다음 총선에서 앞 번호를 받지도 못한다. 따라서 다음을 내다보는 사람은 장관이 되어서도 정당과 부처를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데에 신경을 쓸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장관이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갖고 주요 정책을 '지휘'하는 자리로 인식이 되기 때문에 젊은 장관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반면, 독일에서는 정치 신인이 대중의 인기를 바탕으로 총리 후보가 되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독일에서 오바마나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사례가 나올 수 있을까? 케네디 대통령도 독일인들이 보기에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어떻게...'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다. 이에 더해 총리가 된 후에도 집권이 1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알 수 없기에, 총리는 정당의 일을 '남일 보듯' 할 수가 없다. 자신의 정당 내 정치지형과 주변 정당의 상황을 읽어가면서 끊임 없이 주사위를 굴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오늘의 적이 내일의 동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영원히 얼굴을 안 볼 만큼 심한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된다. 겉으로는 다투더라도 뒤로는 도량 있고 넓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 TV 화면에서 멋진 이미지를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아르하르트 총리의 '담배 피는 모습'을 사람들이 좋아했다고 한다), TV에서 잘 보이지 않는 자질 또한 주변 정치인들에게 장기전으로 평가를 받게 된다.  


즉, 정치의 일상화 또는 양성화가 우리나라와 독일의 가장 큰 차이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정치의 본성은 단순하다. 일단 내가 살고 그 다음으로 당이 살아야 한다.


SNL의 정치인 인터뷰에 종종 이런 질문이 등장한다.


1번! 나님 재선 실패. 대통령 지지율 50% 달성
2번! 나님 재선. 대통령 지지율 10%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도 "공익적 차원에서 저는 대통령 지지율 50%를 택하겠습니다. 안정적인 정책목표의 실현이 우선이죠!"라는 답변을 기대하고 만든 질문 같지만, 인터뷰이들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2번을 고른다. 그리고 덧붙인다. "제가 국회에서 대통령 지지율 50% 만들겠습니다. ^^"


겉으로는 국익과 공익과 세계평화를 외치지만, 그 이상을 실현하려면 일단 그 이상을 지니고 있는 그리고 나와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힘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나는 공직에 있으면서, 사람들이 앞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뒷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꺼려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치인이 자신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은, 왠지 '멸사봉공'의 정신에 반하게 느껴지기 때문일까?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정치는 사람의 마음을 사고 상호 이익을 추구해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런 정치의 속성을 인정하고, 사람을 잘 등용하고 국제 정세를 잘 읽고 껄끄러운 사람들과도 타협을 잘 해내는 훌륭한 정치인을 길러가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생각해본다. 아마도 정치는 AI에 대체될 가능성이 가장 낮은 직군 중의 하나일 테다. 이런 직무를 잘 수행하는 데에는 다른 직군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다른 직군보다 더, 트레이닝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일본처럼 일반인과 괴리된 엘리트 정치인 족벌이 생겨날 우려도 있다)






서평으로 시작했으나 정치학스러운 글이 되고 말았다.  

전후와 분단 독일의 급박한 상황, 각 총리의 개인의 훌륭한 인품과 통찰력, 그리고 저자 특유의 제도에 대한 깊이 있는 사고가 어우러져 있어서 책장이 휙휙 넘어갈 만큼 재미가 있다. 이따금 성근 문장들에서 저자가 누군가를 고용하지 않고 직접 쓰신 문장인 것 같다는 '진정성'이 느껴진다. 마치 독일에 다녀온듯 이런저런 저자께서 과연 이 내용이 책으로 낼 만한 가치가 있을까 고민하실 때 출판사 대표님이 꼭 내달라고 격려를 하셨다고 한다. 독자로서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내가 직접 아는 분은 아니지만, 언젠가 김동연 지사님도 이런 책들을 남겨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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