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오후에 대출한 책을 퇴근한 후에 뚝딱 끝내는 기쁨은 오로지 나의 모국어로만 가능하다.
벨뷰를 방문한 친구가 가고 싶다던 '딕스 버거'에 들렀다가, 킹카운티 도서관 분원에서 한국책 한 무더기를 만났다. 미국 공공행정에는 크게 기대가 없지만, 킹카운티의 도서관 시스템 만큼은 마음 속 깊이 존경심을 지니고 있다.
'저희 도서관을 애용하십시오. 소장 자료의 방대함에 감탄하실 것입니다!'
누군지 몰라도 choice라는 단순한 영어 단어를 '소장 자료의 방대함'이라는 멋진 말로 번역을 하였다. 이 도서관의 다국어 서적에 기여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 훑어 보니 낯선 이름의 현대 작가가 많았다. 미국에 처음 와서 서점에 아는 이름이 없어서 당황을 했었는데, 이젠 한국 서가에서도 당황하는 처지가 되었다.
킹 카운티 도서관에서는 자그마치 100권의 책을 빌릴 수 있다. 처음에는 20권씩 빌렸는데, 이제는 책을 찾고 뒤지고 가져다주는 수고로움을 덜기 위해 5권을 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늘 내 손이 멈춘 곳은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코리안 티처>. 전직 한국어 선생으로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명문대 H대 어학당의 여성 한국어 선생님 4명의 삶을 차례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자신감 없고 쭈삣쭈삣해서 사람들의 챙김을 받는 '선이.'
합리적이고 당찬 '미주'.
체제에 순응해 위(무기계약직. 정규직)를 향해 올라가는 책임강사, '한희.'
그리고 모두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아름다운 선생님, '가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책에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주인공이 바뀐다. 전 편에서 얼핏 등장했던 캐릭터가 다음 편의 주인공이 된다. 멀리서 볼 땐 개성이 강한 듯 하지만, 가까이 들여다보면 다들 내 주변에 있을 법한 다정하고 귀엽고 사연 많은 사람들이다. 넷은 모두 많이 배웠고, 영민하다. 그런데 할 줄 아는 것이 논문 읽고 가르치는 것 뿐이라, 더럽고 치사해도 대학 내에서 어떻게든 비빌 구석을 마련해야 하는 처지다. 나만큼 똑똑한 내 옆자리의 사람도, 이 불합리한 생활을 꾸역꾸역 참아낸다. 우울증, 공황장애, 조산, 대인기피증. 병은 쌓이고 월급은 늘지 않는다.
이 넷 중 유일하게 '가은'은 키크고 아름답고 무려 강의평가 '만점'을 받는 유니콘 같은 존재다. 그녀의 성과에 기분이 좋아진 원장은 150만원의 인센티브를 안겨 준다. 무엇보다 그녀의 가장 큰 장점은 '현재에 만족한다'는 것. 계약직 신세지만, 한국어를 배우려는 열의가 있는 학생들의 사랑을 받으며 뿌듯함을 얻으니 스스로 '운이 좋다'고 생각한다. 운이 좋아서 행복하다는 가은을 보며, 부당한 현실에 시달리는 나머지 선생님들은 묘한 부러움과 이질감을 느낀다.
이 책은 '선이'를 주인공으로 한, '코리안핫걸'이라는 단편으로 시작했다고 한다. 선이의 선함은 학생들에게 금세 마음을 사게 되는데, 선이의 사진을 무단으로 촬영한 학생들이 #KoreanHotGirl이라는 해쉬태그를 달아 인스타그램에 전파한다.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일이라는 듯 미주는 선이에게 귀띔을 준다. 선이는 자신의 사진 밑에 외설적인 댓글이 달려 있는 것에 충격을 받고. 경찰에 신고하려고 하지만, '한희'가 '선생님의 선택이지만, 학교의 조치를 기다려주면 좋겠다.'는 제지를 한다. 몇 주 후 학생들은 제적을 당한다.
제적이 별거냐 싶지만. 어학당 학생들에게 제적은 '한국 추방'이다.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온 베트남 학생들은 낮에는 불법으로 카페에서 알바를 하고 밤에 수업에 와서 잠을 잔다. 그들에게 한국어학당은 비자를 받기 위한 구실이기도 하다. 그들은 비자를 위해 비싼 수업료를 감당하고, 마음에 안드는 선생님을 강의평가로 '벌'한다. 어떤 학생들은 자기가 '갑'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듯이 행동한다.
이런 요상한 어학당 내에서 누가 일을 할까 싶지만. 고학력 여성들이 일을 찾기 위해 줄 서 있다. 대부분 국문학과나 문예창작과 석사 졸업자이다. 책임강사 한희는 언젠가 교수가 되기 위해 박사 과정을 다니고 있다. 일반 선생님은 단기계약직(3개월). 책임강사는 2년 계약직이다. 책임강사라고 딱히 굉장히 안정적이라거나 시급을 많이 받는 건 아니지만, 정규직 같은 느낌이 있어서 교구 개발이나 선생님 일정 관리와 같은 행정업무를 전담해야 한다. 단기계약직 선생님은 책임 강사에게 잘 보여야 다음 학기 강의를 얻을 수 있다. 책임강사는 대학 행정실 직원이나 원장에게 한없이 을이고, 강사는 책임강사에게 을이고, 원장은 비자 발급 여부를 관할하는 법무부에 을이다.
어학당 강사는 국문과 교수를 '바라볼 수 있는' 고급스러운 일인 동시에, 이윤추구 동기로 인한 인격의 수단화를 매일매일 바라봐야 하는 직업이다. 원장은 '미래는 베트남!'이라며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인원의 베트남 학생들을 데려오는 데에 골몰한다. 상위 10% 강의평가자에 인센티브를, 하위 10% 강의평가자에게 모멸감을 주어 선생님들은 책상에 놓인 강의평가지 앞에서 손을 덜덜 떨게 된다. 일본인 학생보다 중국인 학생이, 어려운 수업보다 쉬운 수업이 평가를 잘 받곤 하지만, 원장은 디테일에 관심이 없다. 중요한 것은, 증기기관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시스템!
원장이 자신의 미래비전을 발표하고, 선생님들은 자신의 '소논문'을 발표한다. 한국어 문법 구조와 한국어 문학에 대한 연구를 놓지 않는다. 3개월 단기계약직 선생님이지만, 상아탑 속 긍지 있는 학자로서의 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어느 날, 한희는 '한국어에는 미래 시제가 없다'라는 소논문을 발표한다.
'했다' '갔다'와 같은 과거 동사는 모두 확정적인 표현인 반면, '할 것이다' '하겠다' '할 것 같다'는 모두 주관적인 추측이나 의지의 표현이지, 미래에 실제 벌어질 일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일 학교에 갈 것이다.'
나의 의지가 충분히 굳지 않다면, 내일 비가 온다면 학교에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여행을 가겠다.'
의지를 잃는다면, 돈이 모이지 않는다면 안 갈 수도 있다.
'나는 이번에 졸업을 하려고 한다.'
교수가 졸업을 시켜주지 않으면 못한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미래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니까.
그래도 영어로 It will rain tomorrow라는 표현이 있다. 왠지 내일은 무조건 비가 온다는 느낌이 든다. 심지어 영어에는 '미래 완료'도 있다. I will have worked on this piece by next Friday. "나 다음 주 금요일까지는 이 작업에 매달려 있을거야." 다음 주 금요일까지 꼼짝 없이 이 일을 할 신세야. 절대 웬만해선 변할 일이 없어.
반면, 한국어의 미래 시제에는 말하는 사람의 '주관성'이 포함된다. 이 주관성으로 인해 현재에서 바라보는 미래는 항상 불확실성과 불안이 섞여 있다. 영어에는 fleeting이라는 표현이 있다. 한국어로 표현하자면 '아스라이 사라질 듯한, 찰나의' 정도일까. A fleeting moment of happiness라고 하면 '찰나의 행복'이다.
한희의 미래는 fleeting moment처럼 느껴진다.
잘 될 것이지만,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행복할 테지만,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
아이를 낳는 한희는 아이와 함께 자신이 꼿꼿이 발 딛고 서 있는 확실한 미래를 꿈꾼다. 세상이 자신에게 부당함을 안겨주면 법적 지식으로 무장해서 온 몸으로 다퉈보기로 한다. 가진 것은 지식과 버티는 힘밖에 없으므로. 그렇게 이 책은 '언어'의 결에 대한 복잡한 이해, 그리고 인간관계의 지리멸렬함을 적당한 거리와 깊이를 두고 풀어간다. <82년생 김지영>처럼 가벼움과 무거움과 담담함이 좋은 밸런스를 이루고 있는 소설.
세상에는 겪어보지 않으면 쓸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 책은 아주 사실적이어서 저자가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토대로 재구성했으리란 추측이 든다. 저자는 '선이'처럼 내향적인 구석이 있었으나 세파를 겪으면서 '한희'처럼 진화했고, 정의로운 '미주'나 협잡꾼 스타일의 '강이슬' 같은 친구를 두었었고, '제이콥'(한희의 영국인 남자친구) 같은 남편을 둔 사람이리라 추정했다.
제이콥의 태양 같은 사랑, 대책 없는 비현실적 귀여움은 국제 연애를 해본 이들만 알 것이다.
기사를 찾아 본 결과, 저자는 호주에서 한국어 강의를 하고 있으며 결혼을 한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 남편인지는 알 수 없다.한국어 강사들이 처한 부당한 현실을 깨부수기로 결심한 한희와 달리, 저자는 결국 남편을 따라 호주에 가게 되었을까.
편혜영 작가가 아주 알맞은 문구를 서평으로 적었다.
이 책에서 가장 안타까운 캐릭터는 '가은'이었다. 비현실적이게 아름다운 이 캐릭터는, 저자가 멀리서 흠모만 했던 어떤 선생님이 아닐지 상상해보았다. 가은은 학생들의 흠을 사랑으로 덮어주고 선생님들의 질시나 비아냥은 흘려 듣는다. "제가 학생 운이 좋아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서 더 미움을 받는 그녀. 가은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읽고 나서도 정확히 알기가 어렵지만, 가은이 좀 더 현실감 있는 캐릭터였다면. 덜 드라마틱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코리안티처"라는 명칭을 보고 나는 저자가 분명 '대학'에서 일했으리라 추정을 했는데 그 이유는 '티처'라는 용어 선택 때문이었다.
나는 미국 대학에서 한국어 TA를 한 적이 있다. 교수님을 보좌하는 TA 자리이기에 나는 질문을 받아주고 그레이딩을 하는 자리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작은 분반을 단독으로 가르치는 책임이 있었다. 선이, 미주, 가은처럼 나는 교수님이 준비해준 교구로, 짜여진 양식대로 수업을 했다.
동네에서 좋은 주립대에 속하기 때문인지, 내 수업에 들어 온 학생들은 이 책 속의 어학당 학생들에 비해 훨씬 가르치기가 편했다. 학생들은 한국 문화를 좋아했고, 기꺼이 공부를 할 의지가 있었다.
영어를 방해하던 내 '한국 액센트'가, 수업에서 만큼은 '유창한 한국어'를 만드는 힘이 되었다. 학생들이 '내가 청소가 싫어'라는 말이 왜 이상하냐고 물으면 "It doesn't feel natural to me."라는 도움 안되는 답변을 하면서, '원어민이란 이런 기분이구나!' 하고 짜릿함을 느꼈다.
내가 교수님과 함께 수업에 서지 않아서인지, 학생들은 나를 Professor이라고 불렀다. 미국에는 교수와 구분되는 '강사'라는 단어가 없다. Instructor는 '강의를 하는 사람'을 의미하기에 정교수도 모두 instrutor이다. 따라서 학생들은 나를 부르려면 이름을 부르거나 Professor라고 불러야 한다. Professor라고 불릴 때마다 난 움찔하며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한편, 아이들이 어눌하게 '정 선생님'이라고 하면 어딘가 귀엽기도 하고 진실이기도 해서 난 그 명칭을 더 선호했다.
그 후 로스쿨에서 강의를 할 때는 공식 instructor가 되었다. 월급은 TA의 반의 반의 반도 안됐지만, 내 전공을 가르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 때도 학생들에게 "나는 PhD 학생이니 professor라고 부르지 말고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수 차례 부탁을 했었다. 그래도 학생들은 나를 professor라고 불렀다. 그리고 깨달았다. 학생들은 본인들이 부르고 싶은대로 부르는데, 신분이 불안정한 내가 제 발 저리듯이 명칭에 결벽증을 부리는구나.
선생님.
가르침.
배움.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한편 교수와 강사는 계급적이다.
둘 다 분명 아름다운 일에 종사하는데,
강사는 '교수님'이라고 불릴 때마다 움찔하며 죄책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코리안 티처>라는 이 범스러운 영어에도 저자의 경험과 통찰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